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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185화 (185/372)

185화

“어? 아…. 소리, 소리가 들려서. 신탁이 또 머릿속에서 들리는 바람에. 그대로 행동한 것뿐이야.”

“신탁이요?”

당황한 실비아는 순간 가장 좋은 변명거리인 신탁 얘길 꺼냈다. 말하고 보니 이 상황에 딱 맞는 소리였다. 세비스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녀는 말을 덧붙였다.

“응. 가끔 이해 안 되는 행동을 하더라도 이해해 줘. 난 신의 목소리를 따를 뿐이니까….”

그녀가 갸륵한 눈빛으로 가슴에 두 손을 얹은 채 허공을 바라보자 세비스가 탄성을 흘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결에 한 소린데 신탁이란 단어가 효과가 좋았다. 별다른 거 묻지도 않고 바로 납득해 버리다니. 앞으로도 곤란한 일이 있으면 이 신탁 얘길 주절대면 될 터였다. 실비아는 속으로 흐뭇해한 뒤 세비스를 데리고 폐교 뒤뜰로 향했다.

갸륵한 표정을 유지한 그녀는 뒤뜰을 둘러보다가 딱 봐도 타임캡슐 묻기 좋아 보이는 커다란 아름드리나무를 발견했다. 그 아래를 살펴보니 친절하게 3-5반이란 푯말이 보였다. 실비아는 곁에 있는 세비스를 의식하며 아련하고 갸륵한 표정으로 땅을 팠다. 얼마 되지 않아 캡슐들이 들어 있는 상자가 나왔다. 상자 안에 신발주머니와 지구본을 넣자마자 천국에 온 것 같은 영롱한 효과음이 들리더니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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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덕분에 토마스는 한을 풀었다. 그가 실비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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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가 사라지고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흐릿한 형체가 나타났다. 그 형체는 자세히 보면 미소 짓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고마워요. 누나.’

소년의 것으로 보이는 명랑한 목소리가 짧게 들리고 곧이어 형체조차 연기처럼 사라졌다. 멍해져 있던 실비아는 고개를 내렸다가 처음 상자를 살펴봤을 때는 없었던 새로운 물건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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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성공! 성공 보상으로 <뜯어 먹는 단어장>을 획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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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딱 봐도 지력 상승 아이템이네!’

그녀는 단어장을 손에 쥐고 상세 설명을 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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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뜯어 먹는 단어장>

- 뜯어 먹는 건 단어 외우기의 고전적인 방법이다. 우리 조상들은 옛날부터 종이를 뜯어 먹으며 단어를 익혔다. 하루에 한 장씩 단어장을 뜯어 먹을 때마다 지력이 10 상승하는 아주 효과 좋은 아이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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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아이템이었다. 이런 걸 폐교 던전에서 얻을 줄이야.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물론 팔자에 없는 염소 노릇은 좀 그렇긴 했지만…. 지력이 10이나 오른다는데 종이가 뭐야, 그녀는 쇠라도 씹어 먹을 각오가 돼 있었다.

‘온 우주가 블루를 따먹을 수 있게 도와주는구나!’

실비아의 가슴이 찡해졌다. 착한 일을 한 덕분에 보상을 받았다. 물론 보상을 받을 줄 알고 착한 일을 한 거긴 하지만 말이다. 그녀는 감동한 얼굴로 단어장을 얼른 뜯어 맛보았다. 그러곤 남은 단어장은 누가 가져갈세라 인벤토리에 곧장 집어넣었다. 질겅질겅 애써 종이의 맛을 즐기고 있으려니 그녀의 어깨를 세비스가 약하게 두드렸다. 돌아보니 세비스의 붉은 눈에 경악이 들어차 있었다.

‘아, 맞다. 세비스가 안 볼 때 먹었어야 하는데.’

“실비아 님! 배고프시면 말을 하시지. 땅을 파시더니 갑자기 흙 묻은 수첩은 왜….”

흙이 묻어 있었나? 멀찍이 떨어져 있었으니 흙 묻은 종이를 씹었다 오해할 법도 했다. 급히 고개를 저은 실비아는 세비스에게 ‘시, 신탁! 신탁 때문이야.’라고 얼버무리며 종이를 마저 씹어 삼켰다.

“네? 아무리 신탁이라 해도 그렇지….”

하다 하다 이제 종이까지 씹어 먹는 제 주인을 세비스가 안쓰럽게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목구멍으로 단어장을 완전히 삼킨 실비아의 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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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뜯어 먹는 단어장>의 효과로 지력이 10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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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한 장 뜯어 먹으면 지력 10 상승이라니. 엄청난 꿀템!’

좋아하며 어깨춤을 추던 그녀는 늘 하듯이 게임 개발자 걱정을 잠시 했다. 하루에 한 장씩이라는 제한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능력치를 퍼다 주다니. 게임 밸런스가 좀 이상한 거 같았다. 출시하고 욕을 얼마나 먹었을까. 아니지, 플레이한 사람이 자신이 최초라고 했으니 욕먹을 일도 없었겠다 싶다. 그건 그거대로 안쓰럽지만…. 뭐, 아무려면 어떤가. 지옥에 안 가려고 게임하는 그녀의 입장에선, 게임이 퍼다 줄수록 감사한 일이었다.

종이를 다 삼킨 실비아는 입안이 까끌까끌한 느낌에 입가를 훑었다. 어느새 피크닉 가방에서 물병을 꺼낸 세비스가 컵에 물을 따라 건넸다.

“수고… 하셨어요.”

“으응….”

물을 마셔도 종이를 씹어 먹은 감각이 입안에 생생했다. 그녀는 이물감이 드는 입안을 애써 외면하며 보스 몬스터를 잡기 위해 건물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녀를 세비스가 불러 세웠다.

“실비아 님. 이 던전엔 보스 몬스터가 없나 본데요? 오염된 기운이 아예 사라져 버렸어요.”

보스 몬스터가 없다니? 실비아는 폐교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던 폐교가 아까와 달리 평범한 낡은 건물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등 뒤를 맴돌던 싸늘한 기운도 어느새 사라져 몸이 가뿐해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폐교 던전은 보스 몬스터가 없는 대신에 퀘스트만 주어지는 새로운 유형의 던전인 모양이었다. 큰 보상을 주는 보스 몬스터가 없다니 좀 아쉬웠지만, 그 대신에 학생 유령의 한도 풀어 주고 좋은 아이템도 얻었다. 실비아는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폐교를 바라봤다.

“오늘의 할 일은 끝났구나. 그럼 집으로 돌아가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실비아는 앞으로의 원활한 게임 공략을 위해 세비스에게 간략하게 이번 퀘스트의 내용을 신탁의 개념을 얹어 설명했다. 혼자서 다 해결하는 것보단 퀘스트가 뜨면 세비스에게 도움을 받아 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단어장을 씹어 먹는 등 이상한 짓을 하게 될 일이 많을 텐데 그런 걸 미리 납득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 짓을 한 거야.”

“아…. 그럼 단어장을 씹어 먹은 이유는요?”

아차. 단어장 얘기를 까먹었다. 순간 고민하던 그녀는 단어장을 씹어 먹은 이유는 신께서 고난을 견디면 능력을 준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말을 하고 나자 세비스는 어쩐지 더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당장은 좀 이해가 안 되지만, 이해해야겠죠. 신께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제가 감히 어떻게 짐작하겠어요….”

“그래. 맞아. 너무 알려고 하면 큰코다쳐. 적당히 그러려니 하고 살면 되는 거지. 판도라의 상자를 함부로 열고 그러면 안 돼.”

“판도라요?”

이 세계엔 판도라 신화 같은 건 없나 보다. 그녀는 대충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먼 산을 바라봤다.

“쉽게 말하자면 호기심을 가지지 말란 거지. 모든 걸 다 알려고 하다간 머리에 과부하가 걸릴걸?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옳은 길로 가게 되는 법이야….”

그녀는 뒷짐을 진 채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가 있는 척하는 표정을 지었다. 세비스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으나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 * *

빠아앙-. 마차 경적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출근 시간의 수도는 어느 곳이나 바삐 이동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인도엔 토스트를 물고 급하게 뛰어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고 도로엔 폭주마들이 마차 사이를 가로질렀다.

실비아는 퀭한 눈으로 롤러 운동화를 타며 엘리셔스 월드를 향해 달렸다. 그녀는 어젯밤 베개 밑에 폐교 던전에서 얻은 <전교 1등의 속옷>을 넣고 잠들었다가 악몽을 꾸었다. 효자손을 든 나이 지긋한 학생주임 선생님이 실비아의 자율학습을 감시하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나무 의자에 앉아 학생주임의 감시 속에서 괴로운 자율학습을 했다. 학주는 그녀가 눈을 돌릴라치면 효자손을 허공에 휘두르며 위협조의 말을 내뱉었다.

‘책에서 눈 떼는 순간 재미없을 줄 알아라잉.’

‘시발….’

그 고생을 했으면 지력이 올라야 마땅하건만. 일정 확률로 지력이 상승한다는 망할 놈의 설명대로 꿈에서 깨어난 그녀의 앞엔 아무 메시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의식이 꿈을 만든 건지 아이템이 꿈을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최악이었다.

‘이젠 자면서까지 고생을 해야 하다니!’

투덜대던 그녀는 시커메진 눈가를 비비며 놀이공원 입구로 들어섰다. 그래, 뭐 어쩌겠나. 속옷을 베고 자다 보면 한두 번은 지력이 상승하겠지. 꿈도 꿈이지만 남의 속옷을 베고 잔단 게 그녀를 찝찝하게 했다.

‘제대로 빨고 베개에 넣을 걸 그랬나. 어휴 찝찝해.’

똥 씹은 얼굴로 사무실에 도착한 실비아는 옷을 갈아입고 바로 아쿠아리움으로 향했다. 오늘은 물개 쇼가 있는 날. 블루는 다른 물개들과 달리 재주를 잘 못 부렸지만, 적응을 시키기 위해 실비아를 따라 무대 위에 오르기로 했다. 물개 우리에서 조련사가 블루와 실비아를 불러 모은 뒤 할 일을 설명해 주었다.

“실비아 양, 별로 어려울 건 없어요. 제가 이 수신호를 줄 때마다 정어리를 공중에 던지시면 됩니다. 그리고 막바지에는….”

실비아는 배 위에 양손을 모은 공손한 자세로 조련사의 설명을 들었다. 그는 이주 후에 있을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저하의 놀이공원 시찰 때도 물개 쇼를 할 예정이니 미리 잘 익혀 두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말을 마친 조련사는 곁에 선 블루의 머리를 쓰다듬곤 정어리를 주둥이에 내밀었다.

“파돌아. 배고프지? 정어리 먹어.”

『너나 처먹…가 아니라. 먹기 싫어. 실비아, 생선은 이제 지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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