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실비아 님, 오셨군요.”
“…아! 세비스. 세비스구나. 난 또.”
세비스임을 뒤늦게 알아차린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엉거주춤하게 일어났다. 세비스가 소파 옆에 있는 전등을 켜자 거실이 밝아졌다. 백화점에서 보내온 쇼핑백이 소파 테이블에 올려져 있었다. 그는 속에서 한껏 끌어 올린 것 같은 한숨을 내쉬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붉은 세비스의 눈이 잠을 안 잔 건지 눈가까지 시뻘겠다.
“안 들어오셔서 걱정했어요.”
어쩐지 목소리가 음산하게 들리는 건 착각일까. 실비아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뒷머리를 긁었다.
“미안해. 미리 말할 걸 그랬네.”
“저…. 아니에요. 그럼 좀 더 자고 일어나서 던전으로 가죠.”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그는 피곤함이 잔뜩 묻은 눈으로 실비아를 힐끗 바라보더니 걸음을 옮겼다. 탕-하고 문이 닫히고 실비아도 쇼핑백을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데서 자고 온 티가 나는 실비아를 보고도 세비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실비아는 어쩐지 서운한 마음으로 짐을 정리하고 잠이 들었다.
밝은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늦은 아침. 실비아는 세비스가 해 준 아침을 먹은 뒤 설거지를 했다. 그녀는 그릇을 헹구며 획득한 씨앗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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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암, 이젠 익숙해진 야외플. VIP룸? 에이, 조금 식상하네요. 그게 최선이었나요? x2의 씨앗을 획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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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품을 하는 건방진 시스템의 메시지가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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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피팅 룸에서 엄청난 체위를! 이건 좀 볼만 했습니다. x2의 씨앗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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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만 하다는 찝찝한 시스템의 메시지까지. 이렇게 백화점 VIP룸에서 총 4개의 씨앗을 얻었다.
‘지가 보고 있단 거야, 뭐야. 하여튼 건방지게시리!’
입을 삐죽인 실비아는 손을 움직여 다음 메시지를 터치했다. 스위트룸에서 한 세 번의 섹스는 무난했기에 3개의 씨앗을 획득했다. 그리고 마지막 온실에서 했던 섹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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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킹을 찢었다! 검은 스타킹이면 더 좋았을 텐데. 겨울에 한 번 더 해 줄 거죠? 믿고 있을게요. 야외플에 스타킹 패티쉬까지. x3의 씨앗을 얻습니다.]
[루카가 참 많이 발전했네요. 가르칠 줄도 알고 말이죠. 청출어람, 스승보다 더한 제자를 길러 냈습니다. 이 정돈 해야 19금 게임 플레이어라 볼 수 있죠. x3의 씨앗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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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6개의 씨앗을 얻었다. 어제 얻은 것과 기존의 것까지 다하면 루카의 씨앗은 총 52개. 루카랑 할 때마다 위험한 장소에서 변태 같은 짓만 골라서 했더니 씨앗이 순식간에 늘었다.
‘이놈의 19금 게임.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게 답이었구나. 대장간이라고 했나? 그건 몇 개가 되면 만들 수 있지?’
실비아는 씨앗을 터치해 대장간 제작에 필요한 씨앗 개수를 살펴보았다. 40개의 씨앗을 소모해야 한다는 설명이 보였다. 잠시 고심한 그녀는 지금 당장 대장간이 필요한 건 아니니 씨앗을 넉넉하게 모아서 신중하게 결정하기로 했다.
시스템 창을 종료한 실비아는 순식간에 늘어난 루카의 씨앗을 다시 생각했다. 이로써 확실히 알게 된 건, 변태 같은 시스템은 야외플과 색다른 플레이를 좋아한다는 거였다.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시스템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변태 같으니라고! 일상생활 가능하세요?’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실비아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듯 한참을 쯧쯧거리며 그릇을 식기 건조대에 올렸다. 어느새 뒤로 다가온 세비스가 그런 실비아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뭐 하세요?”
“응? 아냐. 그릇이 잘 안 닦여서.”
당황한 실비아가 수세미로 그릇을 벅벅 밀며 끙끙거리는 척하자 세비스가 그녀의 옆에 끼어들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어? 뭐야.”
좁은 공간에 갑자기 그가 끼어들자 싱크대가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기역자 싱크대의 구석에 몰린 실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 고개를 돌리자 그의 입술이 이마를 스쳤다. 깜짝 놀란 실비아는 몸을 움츠리며 구석으로 바짝 붙었다. 싱크대가 좁은 건지, 세비스의 몸이 자란 건지. 그녀의 놀란 표정에 그릇을 닦던 세비스가 무심한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왜요?”
“아, 아냐.”
실비아는 고개를 젓곤 다시 수세미를 들어 남은 설거지를 했다. 싱크대에서 함께 서 있으니 곁에 선 세비스의 몸이 간간이 제 몸에 부딪혔다. 예전과 달리 그의 체격이 단단해진 게 느껴졌다. 거기다가 눈높이도 달랐다. 가까이 붙어 있으니 새삼 커진 그의 체격이 실감 난 실비아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다 컸네.’
고작 한 달 반 동안 함께 지낸 거지만 세비스가 성장한 모습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실비아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를 힐끗대며 그릇을 세비스 쪽에 있는 식기 건조대에 올렸다. 몇 번을 반복하고 있으려니 세비스가 어색하게 몸을 굳힌 채 말을 걸었다.
“잠깐, 실비아 님.”
“으응. 왜?”
“…좀 떨어져 계시면 안 돼요?”
실비아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그녀는 그릇을 정리한답시고 생각 없이 세비스의 곁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상태였다. 순간 벙찐 실비아는 눈을 올려 세비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얼굴을 살짝 붉힌 그는 화가 난 거 같기도 하고 당황한 거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이었다.
‘아, 얘가 이제 어른이 다 됐다고 내외를 하는 건가?’
실비아가 어색하게 미소 짓곤 곁에서 떨어지자 세비스는 잠시 눈을 질끈 감더니 다시 설거지를 시작했다. 어색한 분위기에 실비아는 싱크대를 바라보며 손을 꼼지락댔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더 할 거 없어?’라고 묻자 세비스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거실을 가리켰다. 거실에 앉아서 쉬란 소리였다.
‘사춘기? 뭐 그런 건가? 맞아…. 세비스가 요새 좀 이상하긴 해.’
거실에 앉은 실비아는 포도와 비슷하게 생긴 과일을 먹으며 최근의 세비스를 떠올렸다. 섬을 갔다 온 후로 세비스가 변했다. 몸이 커지기도 했지만, 성격이 전과 달라졌다. 죽을 뻔한 경험 때문일까? 아니면 몸이 자라면서 사춘기가 온 걸까?
‘늑대 수인에게도 사춘기가 있나? 사춘기 왔냐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신경 안 건드리게 조심해야겠네.’
실비아는 자신의 사춘기 시절을 떠올렸다. 한창 염세주의자였던 어린 시절의 그녀는 개인 SNS에 눈물 셀카를 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티 없이 맑은 아이….’라는 글귀를 써 흑역사를 만들었다. 그 사진은 박제되어 두고두고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됐었다.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며 ‘윽!’하고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테이블을 갈겼던 실비아는 아려오는 손을 쥐고 소리 없이 소파를 뒹굴었다.
“실비아 님, 갈까요?”
어느새 세비스는 싱크대 정리를 끝냈는지 외출복을 입고 실비아를 불렀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든 실비아가 손을 내려다보니 강아지 몸줄인 하네스였다.
“뭐야?”
“…가끔 해야 한다고 했었잖아요.”
얼굴이 발그레해진 세비스가 뻣뻣하게 걸어 벽 너머로 사라졌다. 잠시 뒤 벽 뒤에서 중형견이 한 마리 나타났다. 중형견은 아니고 중형늑대…. 새우잡이 배 위에서만 해도 이 정도 크기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어느덧 세비스는 꽤 자라 있었다. 적당히 늠름해진 늑대개 같다고나 할까.
세비스는 타닥타닥-하는 발소릴 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부끄러운지 살짝 고개를 휘젓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실비아는 그의 주둥이를 깨물어 주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조심스레 그의 몸에 하네스를 매 주었다.
‘오랜만에 늑대가 된 세비스랑 산책이네. 역시 너무 귀엽단 말이야.’
실비아는 피크닉 가방을 들고 나갈 채비를 했다. 세비스가 옷을 물고 와 피크닉 가방을 앞발로 톡톡 두드렸다. 피크닉 가방을 열어 준 실비아는 그가 옷을 집어넣는 걸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변신할 거면 아침부터 변신해 있던가. 왜 옷을 입었다 벗고 그래.”
“밥은 그럼 누가 하나요?”
“음. 맞네.”
계면쩍어진 실비아가 머리를 긁적이는 동안 세비스는 잠시 주저앉아서 발로 제 주둥이를 비볐다. 오랜만에 실비아 앞에서 변신하니 민망해서 얼굴이 간지러웠다. 얼굴을 발로 문지르고 있으려니 허리에 따뜻한 감촉이 닿더니 시야가 붕 떴다. 정신 차리고 보니 실비아가 그를 껴안은 채 집 밖을 나서고 있었다.
“앗! 실비아 님. 왜 이러세요.”
“아직 안아도 될 거 같은데? 안 무거워.”
“그게 문제가 아니라!”
버둥대는 세비스를 포근하게 감싸 안은 실비아는 입을 귀에 건 채 엘리베이터를 탔다. 몸집이 커진 세비스는 살짝 무겁긴 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좋았다…. 세비스의 보들보들한 털을 한껏 느낀 실비아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아, 간만에 산책하려고 변신한 거라고요. 이러면 기껏 늑대가 된 의미가 없는데….”
“잠시만 안고 있을래.”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세비스는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실비아가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숨을 내쉰 그는 얌전히 실비아의 품에 안겼다. 최근 림보 때문에 주인님이 자주 우울해했으니, 자신을 안고 행복해졌다면 참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머, 저 강아지 봐.”
“귀여워.”
아파트 밖으로 나온 실비아의 앞머리를 산들바람이 흔들고 지나갔다. 세비스를 안고 걸으니 행인들이 선망의 눈길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개를 가지지 못한 자들의 부러워하는 눈빛에 실비아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녀는 한참을 세비스가 알려 주는 대로 폐교 던전을 향해 걸었다. 그때 수도에서 드물게 보이는 머리통에 갈색 귀가 달린 너구리 수인이 그들의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고개를 들었다가 그를 발견한 세비스는 망신스러웠는지 급히 실비아의 품에 파고들며 속삭였다.
“딴 길로 가요. 코너 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