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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178화 (178/372)

178화

피할 수 없는 순간이 다가오고야 말았다. 루카는 그녀를 받쳐 안고는 맘을 단단히 먹은 듯 거침없이 여신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여신상 앞에 딱 서더니, 그녀가 대비할 틈도 안 주고 돌직구를 날려 버렸다.

“실비아, 나랑 결혼해 줘!”

“네?!”

실비아는 화들짝 놀라서 도망칠 만한 곳을 찾았지만, 루카가 그녀를 안고 있었기에 퇴로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실비아를 내려다보는 루카의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루카는 오늘 실비아에게 프러포즈를 하려고 했다. 백화점에서 돈에 초탈해 보이는 실비아의 태도에 그는 돈 지랄로 프러포즈하려던 계획을 급하게 변경, 실비아의 눈을 피해 부하를 닦달하곤 조언을 들었다. 여자들은 꽃을 좋아한단 말에 온실을 통으로 빌린 것까진 좋았으나 여신상 뒤에 숨겨 놓으라고 말했던 반지가 손위에 있는 걸 본 순간부터 머릿속이 하얘졌다.

프러포즈란 게 원래 순서나 분위기를 잡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나. 그러나 연애 경험이 전무했던 루카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반지를 건네고 분위기를 봐서 운을 띄우는 절차를 다 생략하고 본론부터 말해 버렸다. 타고난 로맨티시스트들은 그런 걸 배우지 않아도 척척 잘하지만, 루카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와! 최악이다. 완전 망했어.’

돌처럼 굳어 있는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실비아의 머릿속은 지금 엉망진창이었다. 관계가 발전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대뜸 프러포즈를 해 올 줄이야. 좀 놀랐지만, 말하고 싶은 건 곧바로 말해 버리는 루카의 성격상 이상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한 그를 보니 편지에 쓰여 있던 ‘내 사랑’이 아무 생각 없이 쓴 게 아니구나 싶어서 살짝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마음 같아선 받아 주고 싶지만…. 문제는 자신의 현재 처지였다. 아직 세 명의 남주를 더 공략해야 하는데, 한 사람의 마음을 받아 줄 순 없었다. 여러 생각을 하던 그녀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서툴지만 진심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그의 모습에 미안한 마음과 함께 묘한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지한 얼굴을 보니 흔들려. 그렇지만 당장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한 실비아는 고개를 들다가 흠칫했다. 그녀는 자신을 안고 있는 루카의 손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단 걸 알아차렸다. 루카가 받치고 있는 허벅지 뒤쪽이 미끌미끌했다. 늘 자기 잘난 맛에 살며 뻔뻔한 낯빛이 기본 얼굴인 루카가 이렇게 긴장하다니,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올려다보니 그는 이제 실성한 사람처럼 먼 곳을 보며 피식거리고 있었다. 완전히 맛이 간 것 같았다. 저라도 정신을 차려야지. 목을 살짝 가다듬은 실비아는 부드럽게 미소짓곤 루카의 목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할 말은 그게 단가요?”

“응? 아…. 하아,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루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실비아를 내려 주었다. 실비아가 벤치에 앉자 그도 옆에 걸터앉곤 혼자서 자책하는 듯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입가에 미소를 띤 실비아는 루카의 불룩해진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상자를 손으로 끄집어냈다. 루카는 그 작은 손짓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금빛 눈을 커다랗게 뜨며 몸을 크게 떨었다.

“왜, 왜.”

“이거 저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에요?”

실비아의 물음에 그가 손으로 얼굴을 여러 번 쓸어내리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응. 맞아. 아, 부하한테 가져다 놓으라고 했는데, 그 자식이 여기다가 놔두는 바람에…. 놀라서.”

“보여 주세요.”

실비아가 손을 내밀자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상자를 열어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예상대로 반지였다. 실비아의 눈 색과 똑같은 화려한 에메랄드가 박힌 반지에 그녀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루카는 실비아의 표정을 손가락 사이로 힐끗 살폈다. 그녀의 표정이 좋은 걸 확인한 그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손에 들었다. 그러나 머뭇거리며 반지를 선뜻 그녀에게 건네지 못했다. 루카는 흡사 제 머리색과 똑같은 얼굴색이 된 채 땀에 젖은 손을 제 옷에 여러 번 닦은 뒤 심호흡을 했다.

“후우…. 반지, 이런 식으로 주려던 건 아니었는데…. 받아 줄래?”

“음, 이건 어떤 의미인 거죠?”

다 알면서 실비아는 다시 한번 그에게 질문했다. 제대로 된 고백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질끈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골랐다. 천천히 눈을 뜬 그는 실비아와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진지한 관계가 되자는 의미야. 실비아. 난 너랑 있으면 행복해.”

“저도 그래요.”

“정말?”

루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고개를 끄덕인 실비아는 루카의 반지 쥔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네. 당장은 그래요. 그렇지만…. 우린 아직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요.”

“…그건 그렇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대던 루카는 곧 힘없이 대답했다. 그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속을 알기 쉬운 루카를 보며 귀엽다고 생각한 그녀는 할 말을 신중히 고르곤 입을 열었다.

“좀 더 서로에 대해서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다가 널 놓칠까 봐 겁나.”

루카는 반지를 든 제 손을 바라보며 풀이 죽은 모습으로 답했다. 생전 처음 보는 루카의 힘없는 표정이 안쓰러웠다. 저런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로 겁이 난단 소릴 하다니. 실비아는 순간 다 때려치우고 결혼하자고 할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안 돼. 안 된다고.’

입술을 깨물며 충동을 참은 실비아는 다시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제가 섬에서 했던 말 기억나요? 신탁을 받아서 던전을 공략해야 한다고 했던 말.”

“기억나.”

“저는 먼저 그 일을 끝내야 해요. 그래서 지금 당장은 루카 님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어요.”

“아….”

금빛 눈이 풍랑을 만난 배처럼 마구 흔들렸다. 저 아름다운 눈에 눈물이 나게 하는 사람은 당장 능지처참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실비아는 루카가 안 좋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급하게 말을 이었다.

“신탁으로 받은 거긴 하지만 제 꿈이기도 해요. 루카 님도 꿈이 있겠죠? 서로의 꿈을 다 이룬 뒤에 프러포즈의 답을 할게요.”

“지금 당장은 답해 주지 않을 거야?”

루카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거장이 죽기 전 남긴 예술작품이 저리 처연하고 아름다울까. 그 모습을 보자 벌떡 일어나서 혼인신고 하러 가자고 외칠 뻔했다. 그녀는 계속 이성을 잃으려는 걸 가까스로 자제하곤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네, 당장은. 꿈도 이뤄야 하고 아까 말한 대로 우리는 좀 더 천천히 알아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나름 최선의 대답이었다. 신이 준 일을 다 끝내야 그다음 행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을 테고, 그때 가서야 미래에 대한 약속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거절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아. 그렇다고 해서 받아 줄 수도 없으니 이게 최선이겠지.’

모든 일을 잘 마무리 짓고 나면 자신은 천국에 가게 될까? 아니면…. 상념에 빠져 있던 실비아는 루카의 낮게 잠긴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고개를 들었다.

“…그럼, 지금 우린 무슨 사이야?”

뭐라고 말해야 루카가 상처받지 않을까. 실비아는 루카의 넓은 어깨에 한 손을 얹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이런 사이.”

고개를 돌린 실비아가 루카의 붉은 입술을 조심스럽게 머금었다. 루카는 잠시 흠칫하더니 이내 작은 몸을 부서질 듯 껴안곤 맞닿은 입술을 거세게 집어삼켰다. 두꺼운 혀가 말랑한 점막을 격정적으로 헤집고 조그만 입속을 난폭하게 휘저었다.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두드리던 혀는 곧 닿아오는 작은 혀를 붙잡고 마구 핥아 댔다.

그녀의 손을 깍지 껴 잡은 루카는 실비아를 벤치에 눕히곤 정신없이 입맞춤을 이어 나갔다. 두 혀가 난잡하게 엉키고 타액을 주고받는 젖은 소리가 빈틈없이 붙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으음….”

“하아.”

타액과 호흡을 교환하던 입맞춤은 한참이 지나서야 끝났다. 두 입술이 떨어지자 그 사이로 은색 실이 이어지다가 끊어졌다. 거친 숨을 내쉬던 루카는 깍지 껴 잡은 실비아의 손을 들어 올리곤 나머지 한 손으로 쥐고 있던 반지를 그녀의 손에 끼워 주었다. 황홀한 입맞춤에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내쉬던 실비아는 어느새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깜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어!”

“이건 선물이야. 거절하지 마.”

에메랄드 반지를 낀 손에 쪽-하고 입맞춤을 날린 루카는 나른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실비아는 루카에게 잡힌 손과 그의 눈을 번갈아 보며 당황했다.

“루카 님. 그래도 이건….”

“이거까지 못 받는다고 하면 나 진짜 삐질 거야. 나랑 다시 안 보고 싶으면 거절해.”

“아, 아니에요! 고마워요.”

다시 안 보고 싶을 리가. 실비아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비아는 벤치에 누운 채 루카가 여전히 잡고 있는 손을 빛에 비춰 보았다. 빛에 반사된 에메랄드가 오묘한 색으로 반짝였다.

“내가 특별히 제작 주문한 거야. 이 보석이 네 눈이랑 어울릴 거 같았거든. 보니까 딱이네.”

“미리 주문까지! 정말 고마워요.”

재차 감사를 표한 그녀는 엄지로 검지에 껴 있는 반지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한창 그러고 있으려니 루카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더니 뾰로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지금 기분이 별로 안 좋아. 거절당한 것 같거든.”

“절대 아니에요. 지금 당장은….”

낯빛을 굳힌 실비아가 고개를 젓자 루카가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막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제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더 말하지 마. 속상해.”

상체를 다시 일으킨 루카가 눈썹을 힘없이 내린 채 투덜댔다. 그 모습에 실비아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대뜸 신발을 벗어 던진 그녀는 스타킹을 신은 발을 들어 단단한 허벅지를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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