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림보 번호 기억해? 위치추적까지는 무리지만 공공시설을 이용했으면 기록이 남아 있을 텐데. 수도의 제국센터에 가서 물어봐.”
고개를 끄덕인 실비아는 미니 백에서 수첩을 꺼내 제국센터에 갈 것을 기록했다. 루카의 조언 덕에 림보를 찾을 수 있단 희망이 생겼다. 그녀가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올리자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루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센터는 언제 가게? 내가 같이 찾아 줄까?”
“정말요? …아, 아니에요. 마음은 고맙지만, 제국센터를 찾아가는 건 저 혼자 할 수 있으니 알아서 해 볼게요. 루카 님은 사업으로 정신이 없으실 테고….”
실비아의 사양에 루카가 그녀와 얼굴을 가까이하며 속삭였다.
“아니야. 너랑 있을 수 있다면 없는 시간도 내야지.”
루카가 거듭 같이 가겠다고 말했지만, 실비아는 극구 사양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황실의 복지혜택을 불법으로 받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번뜩 생각나서였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루카는 내가 500만 골드를 얻었단 걸 알고 있는 두 명의 사람 중 한 명이지. 나머지 한 명은 공범인 세비스뿐이고 말이야. 센터에 같이 갔다가 혹시라도 내가 탈세하고 있단 걸 알게 되면 곤란해.’
실비아는 계속 거절했으나 루카는 계속 그녀를 도와주고 싶어 했다. 결국 실비아는 루카의 손을 잡으며 그를 설득했다.
“저도 루카 님이랑 늘 함께 있고 싶어요. 그러나 림보는 제 식구니까 제가 알아서 찾아볼게요.”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혹시 못 찾겠으면 말해. 나도 방법을 생각해 놓을 테니까.”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루카의 손을 잡고 그가 이끄는 대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루카가 헛기침을 하더니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있잖아. 좋은 소식이 있어.”
“네.”
얼굴이 살짝 상기된 루카가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 한동안은 수도에 자주 오게 될 것 같아. 좋은 소식… 맞지?”
실비아는 깜짝 놀라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루카는 실비아가 곧 입을 크게 벌리며 좋아하자 눈에 띄게 안도했다. 금빛 눈이 황홀하게 휘어지며 호선을 그렸다.
실비아가 ‘정말? 정말요?’ 하면서 여러 번 되묻을 때마다 루카는 지치지 않고 ‘응.’이라고 다정하게 대답해 주었다. 실비아는 대로변인 것도 잊고 루카의 허리를 껴안고 얼굴을 마구 비볐다. 한동안 볼 수 없을까 봐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이제 자주 볼 수 있다니.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
실비아는 행인들이 피하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루카의 양손을 잡아 강강술래 하듯 돌면서 한참을 기뻐했다. 즐거워서 발을 동동 구르던 실비아는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했다. 루카의 얘길 들으니 집안의 사업을 물려받아야 해서 본격적인 후계자 교육을 받으러 본가에 올라오는 거라고 했다. 그는 바닷가마을의 사업을 아예 놓을 순 없으니, 부하에게 맡겨 놨다가 가끔 보러 갈 거라고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섬을 공략하고 돌아온 날, 루카의 본가가 수도에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맞네요. 루카 님 본가가 수도에 있다고 했었죠!”
“응. 넌 엘리셔스 월드 인턴에 합격했다고 하지 않았었나? 능력 좋은 줄은 알고 있었는데 대단하다. 내 주변엔 오래 준비하고도 떨어진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실비아가 쑥스러워하며 얼굴을 붉히자 그가 자랑스럽다는 듯 맞잡은 손을 쓰다듬었다.
“우리 인턴님 바빠서 어떡하지? 나랑 볼 시간이 있겠어?”
“딴 건 몰라도 루카 님 볼 시간은 충분해요.”
실비아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대답하자 루카가 그녀의 허리를 더 단단하게 감쌌다. 붉어진 귓가를 뜨거운 숨이 간질였다.
“그런 말 하니까…. 또 안고 싶다.”
“아이, 몰라!”
실비아는 ‘어머, 어머.’ 하며 단단한 가슴팍을 주먹으로 솜방망이질 했다. 루카가 그런 그녀를 예뻐 죽겠다는 듯 꽉 껴안곤 번쩍 들어서 한 바퀴 돌렸다.
“꺄르르!”
“하하!”
둘은 행인들의 눈 건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길가에서 계속 민폐를 끼치며 걸어갔다. 남들의 눈 따위 알 바인가! 우리가 즐거운데! 한참 눈꼴 시리는 장면을 연출한 둘은 어느새 한적한 공원에 들어섰다. 몇몇 산책 하는 이들 빼곤 휑한 곳이었다.
루카는 안이 들여다보이는 아치형 철문 앞에서 경비와 간단한 눈인사를 하곤 열쇠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구불구불한 길 사이사이 동상이나 조그만 장식품이 있는 정원이 보였다.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며 웃고 떠들던 그들은 어느새 유리로 된 온실 앞에 도착했다. 온실에서 새어 나온 환한 불빛이 그들의 얼굴을 밝혔다. 루카는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로 유리온실의 문을 열어 실비아를 먼저 들여보냈다.
“우와!”
설레는 맘으로 걸음을 옮긴 실비아의 눈앞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눈부시게 하얀 꽃들이 온실 가장자리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가운데로 향하는 복도 양옆에 여러 가지 꽃들이 가득 핀 화단이 있었고, 그 길을 아치형으로 연결된 하얀 기둥들이 장식했다. 기둥 중 몇 개는 머리를 길게 내린 행잉 식물들이 걸려 있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했다. 길 끝에는 기둥과 같은 색의 고풍스러운 벤치가 보였다.
그녀는 온실의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놓았다. 문을 잠그고 온 루카가 감동한 그녀를 뒤에서 부드럽게 껴안고 속삭였다.
“어때, 맘에 들어?”
“정말 예뻐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실비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돈 자랑만 할 줄 알던 루카가 이런 힐링 되는 곳에 자신을 데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보석 가게였어도 힐링을 제대로 했겠지만…. 그녀가 행복한 얼굴로 꽃들을 구경하자 루카가 그녀의 손을 잡고 벤치로 걸어갔다.
루카를 따라 벤치에 앉은 실비아는 무심코 뒤를 돌았다가 보이는 풍경에 다시 한번 감탄사를 내뱉었다. 멀리서 봤을 땐 안 보였는데, 벤치가 있는 곳 뒤에 샛노란 꽃들이 잔뜩 피어 있었다. 아주 빼곡한 노란 꽃 군락이 무척 아름다웠다.
“이곳을 너한테 보여 주고 싶었어.“
“노란 꽃이 정말 예쁘네요. 그런데 루카 님이 보여 주고 싶단 곳이 식물원일 줄은…. 원래 꽃을 좋아하세요?”
실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하자 루카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헝클어진 갈색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정리해 주었다.
“수도에 살 때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여기 왔었거든. 그럴 때마다 이 노란 꽃을 보면 기분이 상쾌해졌었어. 널 처음 봤을 때도 이 꽃이 떠올랐어. 그래서 언젠간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했지.”
“절 보면 이 꽃이 떠올랐다고요?”
실비아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을 보면 꽃이 떠오른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딨을까. 그녀와 눈을 마주친 루카가 부끄러운 듯 턱을 쓸며 답했다.
“…응. 너랑 이 꽃이랑 닮았어.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밝은 데다가 아름답고.”
“아….”
루카의 칭찬 세례에 실비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식으로 대놓고 좋다고 표현할 줄이야. 정원 한가운데 세워 놔도 조각상인 줄 알고 지나칠 거 같은 완벽한 이목구비의 루카가 자신을 이렇게 좋아한다니. 너무 행복했다.
그녀는 입가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무심결에 루카 등 뒤에 자리한 정원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손바닥이 보이게 양손을 모은 여신상의 손 위에 조그만 상자가 놓여 있던 것이다. 벨벳 재질의 상자에 실비아는 불길함을 느꼈다.
‘어, 잠깐. 이 상황, 저 상자. 이거 설마….’
실비아는 설마 하며 루카를 조심히 관찰했다. 자세히 보니 그는 길게 꼰 다리를 덜덜 떨며 얼굴을 연거푸 손으로 쓸어내리고 거칠게 심호흡을 하는 등 누가 봐도 불안증세를 호소하고 있었다. 마치 중요한 일을 앞둔 것처럼 보인다고나 할까. 그를 본 실비아도 어느새 함께 다리를 떨며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떡해! 설마 프러포즈를 하려고? 진도가 너무 빠르잖아!’
그녀의 예상이 맞는 듯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루카는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실비아, 바람이 참 선선하네.’라고 말하며 무척 부자연스럽게 여신상 앞으로 다가갔다. 실내엔 난방기가 쌩쌩 돌아가고 있었다.
루카가 돌아볼 때 실비아는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리는 척했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여신상의 손에 놓인 상자를 여신상 머리에 올렸다가 다시 손에 내리며 정신없이 재배치 중이었다. 그러다 혼잣말로 ‘이 자식이 미쳤나, 여기다가 놔두면 어쩌잔 거야?’라는 뜻 모를 소리도 중얼거렸다.
‘맞나 봐!’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본 실비아는 이제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에 떨었다. 너무 앞선 생각일까? 프러포즈가 아니라 그냥 선물을 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기엔 장소가 너무 본격적이지만…. 만약 예상대로 루카가 프러포즈를 한다면 어떤 거절의 말을 해야 할지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신상 앞에 서 있던 루카는 실비아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더니 천장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실비아. 밤하늘이 참 아름답다.”
“네? 아, 예.”
유리온실 위는 지붕으로 막혀 있어서 하늘은커녕 달아 놓은 조명들만 반짝였다. 실비아는 조명에 아린 눈을 비비며 떨떠름하게 답했다. 멍하니 고개를 꺾고 있다가 천장을 보며 푸하하, 하고 파안대소를 하는 등 맛이 간 티를 있는 대로 낸 그는, 실비아의 조그만 손을 잡고 여신상 쪽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산책을 거부하는 강아지처럼 루카를 따라가지 않으려고 엉거주춤하게 버텼다.
“저, 저는 앉아 있고 싶은데. 실비아는 다리가 아픈데 말이죠.”
“어? 다리가 아파?”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가 놀라는 눈을 하더니 예고 없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안았다. 놀란 실비아가 버둥거렸지만, 루카는 흐뭇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앗, 잠깐!”
“이러면 안 아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