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나 같은 사람….’
실비아가 방금 전의 데드엔딩을 떠올리며 울분을 삼키고 있는데, 블루의 몸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섬광이 번쩍이더니 블루가 파란 물개로 돌아왔다. 저를 죽였던 살인 병기가 사라지자 실비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 힘이 아무래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나 봐. 이럴 수가. 네 앞에서 내 본모습을 더 많이 보여 주고 싶었는데….』
블루가 제 몸을 내려다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은 무척 가련했지만, 실비아는 한동안 블루의 본체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함부로 막 본모습을 보이고 그러지 마.”
『응? 무슨 소리야.』
실비아는 블루가 되묻는 소리에 잠시 딴청을 피웠다. 그러곤 첨탑에서 본 마법진 얘기를 해 주었다. 아까 한 얘길 또 하려니 살짝 한숨이 나왔지만, 어쨌든 열심히 말했다. 그러자 블루가 휴우,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릴 내더니 통통한 몸을 구부러트렸다.
『힘이 다 돌아와야 아쿠아리움 밖으로 나갈 텐데. 너랑 밖에서 놀고 싶었는데…. 슬퍼.』
‘밖으로 나간다니. 큰일 날 소리! 얘는 힘이 돌아오는 게 문제가 아냐. 이대로 밖으로 나가면 도시살인마가 되겠는걸.’
실비아는 차마 속엣말을 하지 못하고 삼켰다. 상태 창의 설명대로 인간이 낯선 블루에겐 앞으로 많은 교육이 필요할 듯했다. 그녀는 블루에게 마법진은 내가 해결할 테니, 한동안은 아쿠아리움에 있으라고 당부했다. 우울해하는 블루에게 내가 자주 들릴 테니 남들 앞에선 절대 본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뭣도 모르는 블루는 자주 들른다는 말에 활짝 웃으며 실비아의 다리에 제 머릴 비비적거렸다.
‘더 이상의 희생자가 생기는 건 막아야지.’
“하여튼! 난 이제 가 볼게. 잊지 마. 절대 다른 사람 앞에서 아까처럼 돌아가면 안 돼!”
『알았어. 휴우…. 빨리 힘이 돌아와서 이곳을 나가고 싶어.』
“걱정 말고 하지 말란 것만 안 하면 돼.”
그녀의 말에 블루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는 알까? 실비아가 그를 살인마로 만들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걸. 비장한 얼굴을 한 실비아는 침울한 표정의 블루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손으로 제 등을 만져 보니 어느새 티셔츠 뒷면이 긴장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오랜만에 겪은 데드엔딩의 충격이 컸다. 누구는 몸 안에 독이 있어서 곤란하게 하더니, 이번 남주는 아는 게 없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 행동으로 실비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는 소리가 있지만, 저 정도면 죄로 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혹시 야한 생각만 하고 살아서 천벌을 받는 걸까. 포옹하다가 압박사라니. 음란한 생각이 물에 씻은 솜사탕처럼 사라지는 오싹한 경험이었다.
‘미친 게임 같으니! 이러면 어떻게 공략하란 거야?’
투덜대던 실비아는 앞으론 블루와 스킨십 진도를 나갈 땐 미리 주의사항을 일러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는 이 지경에 와서도 스킨십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훌륭한 19금 게임 플레이어였다.
퇴근 시간이 되어 <롤러 운동화>를 탄 실비아는 집을 향해 쌩쌩 달렸다. 그녀는 S자로 곡선을 그리며 달리다가 가로수에 울긋불긋하게 단풍이 든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벌써 가을이라니. 이 게임 세계는 현실보다 계절이 빨리 바뀌는 것 같았다. 현생에서라면 아직 늦여름일 텐데. 성년의 날 축제 때보다 확연히 시원해진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닷가마을보다 윗지방이라서 가을이 더 빨리 오는 건가.’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신나게 달려가던 그녀는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하고 우뚝 섰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쫑긋하게 솟아오른 검은 귀, 세비스였다. 그는 길가에 선 채 신문에 한창 집중하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세비스의 모습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듯했다.
장난을 치고 싶어진 실비아는 <롤러 운동화>의 롤러를 집어넣고 세비스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러곤 부지불식간에 뒤에서 등을 톡-치며 놀랬다.
“웍!”
“어? …실비아 님! 퇴근하셨어요?”
몸을 크게 움찔하며 뒤돈 세비스는 장난친 사람이 실비아인 걸 확인하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응. 넌 왜 집에 안 가고 길에서 신문을 보고 있어?”
“아, 그게요…. 아, 아니에요.”
세비스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신문을 접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반응에 실비아의 눈에 가늘어졌다.
‘내가 보면 안 될 거라도 있나?’
눈을 굴리던 세비스는 간만에 밖에서 외식이나 하자며 실비아를 고소한 냄새가 나는 식당으로 이끌었다. 저녁 시간이 된 지라 식당은 식사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실비아는 세비스가 잠시 손을 씻으러 간 사이에 그의 가방에 삐죽 나와 있던 신문을 몰래 빼냈다.
누구나 보라고 발간된 신문이니 몰래 본다고 세비스가 화내진 않을 터였다. 신문을 뒤적거려보니 여러 가지 흥미로운 기사가 보였다. 그러나 세비스가 굳이 그녀에게 숨길 만한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실비아는 헛다리를 짚었나 싶어 심드렁하게 입을 내밀었다.
‘뭐야, 별거 없잖아? 나한테 숨길 게 뭐가 있다고… 어?’
그녀의 눈이 신문 한구석에서 멈췄다. 신문의 한편에는 개인들이 광고를 내는 조그만 광고란이 있었는데, 거기에 낯익은 이름이 보였기 때문이다. 광고란을 읽은 실비아의 눈시울이 점차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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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제마 림보를 찾습니다. 베이지색 말이고 사람 말을 잘 알아들어요. 처음엔 웃는 게 재수 없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계속 보다 보면 정들지도 몰라요. 실비아와 세비스란 이름을 말하면 반응할 겁니다. 림보를 찾아 주시는 분께 사례비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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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보를 찾는 광고를 세비스가 신문에 올려놓은 거였다. 네모 칸 안에는 광고와 함께 세비스가 그린 것 같은 림보의 몽타주가 있었는데,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고 있는 그림이 귀여웠다.
실비아는 붉어진 눈가에 손부채질을 하며 공공장소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제야 세비스의 태도가 이해됐다. 아마도 림보 얘길 꺼낼 때마다 실비아가 침울해한단 걸 알고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거겠지.
그때 손을 씻고 돌아온 세비스가 신문을 펼친 채 훌쩍이는 실비아를 발견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실비아 님…. 보셨군요.”
“응….”
실비아는 결국 냅킨으로 눈가를 훔쳤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지만 둘 중 누구도 쉽게 수저를 들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진정된 것 같자 세비스가 입을 열었다.
“실비아 님이 힘들어하실까 봐 일부러 말씀 안 드린 건데…. 림보는 곧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응. 광고가 효과가 있으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도 놀이동산에 있다 보면 말 농장 직원이 말한 대로 림보를 데려간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실비아는 확신 없이 웅얼거렸다. 착잡한 표정을 짓던 세비스가 낯빛을 밝히며 그녀의 기운을 북돋웠다. 언제까지 우울해하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그녀는 다시 씩씩한 자세로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실비아는 이 수도 어디에 림보가 있을지, 눈치가 없어 구박받고 있는 건 아닐지, 먹을 걸 좋아하는 림보가 당근은 제대로 챙겨 먹고 있을지, 걱정이 끊이지 않아 간간이 멍해졌다.
그녀의 얼굴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세비스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황실 타코야키 요리사를 하며 있었던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말해 주었다. 그러자 실비아의 어두운 낯빛이 차츰 밝아졌다.
“조만간 황실 개방 행사가 있거든요. 그때 재밌는 공연도 한다네요. 가진 돈도 넉넉하니까 그날 우리 예쁜 옷 입고 가요.”
“와! 기대된다. 그러고 보니 우리 각자 돈이 얼마나 남았지?”
그 말에 세비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경매하는 것처럼 수신호를 보냈다. 끄덕끄덕한 실비아도 대충 얼마 남았는지 세비스에게 손으로 보여 주었다.
“아직 넉넉하네?”
“네. 이제 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요.”
“이대로면 내 집 마련도 조만간이겠다! 좋아. 이 기세로 돈을 더 모으는 거야. 던전을 있는 대로 다 털어 보자!”
실비아의 눈이 성공을 향한 갈망으로 이글거렸다. 세비스도 그녀와 같이 눈을 반짝이며 함께 다짐했다. 돈 얘길 하다 보니 조금씩 즐거워진 실비아는 림보에 대한 우울한 생각을 잠시 떨칠 수 있었다. 그렇게 즐거운 식사 시간이 흘러갔다.
* * *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고 했지.’
엘리셔스 수도 중심에 자리한 백화점 유토피아. 실비아는 토요일인 오늘 루카를 만나기로 했다. 루카를 본다는 설레는 맘 반, 백화점을 턴다는 즐거운 맘 반으로 그녀는 참둘기가 아침을 알리는 새소릴 내기 전에 저절로 눈을 떴고 약속 시간보다 먼저 유토피아에 도착했다.
‘편지에선 분수대 앞에서 보자고 했었지.’
유토피아 앞 분수대에 몸을 기댄 그녀는 한가로이 루카를 기다렸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놀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서 행사를 하는지 줄이 달린 헬륨 풍선을 든 꼬마가 신나게 분수대 앞을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귀엽다고 생각하며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단단한 팔이 실비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놀라서 옆을 보니 오늘도 여전히 찬란한 외모를 자랑하는 루카가 시원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카 님!”
“실비아!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더 일찍 올 걸 그랬나 봐.”
“그냥, 눈이 일찍 떠져서 미리 나와 있었어요. 근데…. 와. 오늘 정말.”
그녀는 루카의 모습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루카는 타는듯한 붉은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그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인 금색 눈에 어울리는 금 피어싱과 금팔찌, 금반지까지 걸쳤다. 보통의 사람이 이렇게 액세서리를 걸쳤다면 부담스러워 보였을 텐데, 루카는 어쩜 태어날 때부터 차고 나온 것처럼 어울렸다.
거기다가 그는 평소의 껄렁한 옷차림과 다르게 어두운색의 양복을 위아래로 입었는데, 마치 연말 시상식에서 보는 배우 같은 완벽한 차림새였다. 실비아가 하트로 가득한 눈으로 루카를 바라봤다. 루카는 네 눈빛 왜 그런지 다 안다는 듯 거만하게 턱을 들었다.
“새삼 또 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