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잠깐 사이에 블루는 바닷가 마을에서 본 모습대로 변해 있었다. 왼쪽 눈 밑에 콕콕 박힌 점 두 개에 갓 구운 빵 같은 건강한 갈색 피부, 심해와 같은 감색 눈동자, 지중해 바다 같은 맑은 하늘색 머리. 드디어 원래 블루가 돌아왔다. 실비아는 감격한 얼굴로 블루를 바라보다가 ‘어, 설마?’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혹시 물개에서 사람으로 변신하다가 옷을…. 한껏 기대를 담고 시선을 내려봤으나 실망스럽게도 블루는 옷을 멀쩡히 다 챙겨 입고 있었다.
‘쩝, 마법을 쓸 줄 알아서 그런가.’
잠시 아쉬워한 실비아는 다시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블루와 눈을 마주쳤다. 밝은 빛이 다 사그라들자 블루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실비아의 손을 가져가더니 제 뺨에 가져다 댔다.
『자, 실비아. 이게 내 본래 모습이야. 어때?』
“감동적이야.”
실비아가 눈을 반짝이며 블루의 보드라운 뺨을 매만졌다. 블루는 그녀가 만지는 대로 조용히 있더니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실비아.』
블루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퀘스트 성공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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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사파리에 가서 원인을 알아보자!> 성공! 블루의 호감도가 10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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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블루의 호감도는 60. 아직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 못 했지만 오랜만에 물개가 아닌 블루의 사람 모습도 볼 수 있고 호감도도 올라갔으니 일석이조였다. 실비아는 블루의 은혜로운 얼굴을 보며 감동하다가 별안간 정색했다.
‘이 얼굴에 홀리면 안 돼. 얘 때문에 한 번 죽었잖아.’
경계를 풀었다간 어떤 끔찍한 사태가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얼른 시스템을 켜 세이브를 했다. 잘생겼다고 넋 놓고 있다가 갑자기 데드엔딩을 맞을 수도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저장을 완료한 그녀는 다시 활짝 웃으며 블루를 바라봤다. 블루는 제 모습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힘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것 같아. 이 모습을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걸로도 충분히 괜찮아. 내가 올 땐 꼭 이 모습을 하고 있도록 해.”
블루가 녹아들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물개가 웃을 때랑은 감흥이 남달랐다. 한참을 즐거워하던 실비아는 블루에게 첨탑에서 봤던 마법진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다. 아직은 마법진이 완전히 파훼되지 않았다는 것과 자료실에 있는 고서를 보고 마법진을 완전히 없애 버려야 한다는 얘기까지.
그녀의 말을 들은 블루가 우울한 얼굴을 했다. 몇 번 손 위에 뭔가를 불러내려고 시도하던 그는 뜻대로 되지 않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쿠아리움을 나가서 너랑 함께 밖에서 놀고 싶었는데…. 그 마법진을 완전히 없애기 전에는 여길 떠날 수 없겠구나. 지금 상태론 잠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게 고작이네.』
“으응. 마법진은 금이 갔을 뿐 완전히 없어진 게 아니니까.”
한숨을 흘리던 블루는 제 팔을 쓰다듬더니 별안간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실비아에게 물었다.
『있잖아.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될까?』
“어떤 거?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뭐든지!”
눈치를 보는 블루의 모습에 실비아는 가슴이 간질거렸다. 저렇게 탈인간 같이 생긴 애가 부탁을 들어 달라니. 당장 죽으라는 말만 아니면 다 들어줄 수 있었다.
『여기서 사람들을 지켜보니까 가끔 서로 껴안더라? 대화를 엿들어보니 포옹이라고 했던 거 같아. 친한 사람들끼리 하는 거 같던데…. 내가 널 포옹해도 될까?』
별거 아닌 부탁에 실비아는 헛웃음을 쳤다. 포옹이라니. 허참. 그녀는 블루를 위해서라면 물개 우리에서 지금 당장 바지를 벗을 수도 있었다. 이런 남주가 왜 이제야 나타났는지! 먼저 스킨십을 하고 싶어서 부탁해 오는 남주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블루의 섹시한 눈 밑 점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실비아가 흔쾌히 두 팔을 펼쳤다.
“난 또 뭐라고…. 그 정도야 언제든지! 자, 포옹하자.”
『정말? 고마워, 실비아!』
블루가 예쁘게 눈웃음을 치더니 실비아를 와락 껴안았다. 숨 막힐 듯이 강하게 껴안는 바람에 실비아는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이참, 얘도 뭘 이렇게 세게…. 읏, 으윽?!’
“커억!”
『실비아, 고마워. 포옹이란 건 정말 포근… 실비아?! 실비아!』
껴안는 정도가 세도 너무 셌다. 실비아는 순간 몸에 가해지는 엄청난 압력에 급격한 호흡 곤란을 느꼈고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압박사 했다. 블루의 말이 저 먼 곳에서 들리는 양 희미하게 들려왔다. 잠시 후 눈앞이 시커메지더니 익숙한 새드엔딩곡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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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쓰러운 새댁>인 당신은 게임 시작 <47일> 만에 <블루의 숨 막히는 포옹에 압박사> 엔딩을 맞았습니다.
저런…. 성층권에서 죽은 후 조심해야겠다는 교훈을 얻지 않았나요? 심지어 블루의 상태 창에도 인간을 모르니 가르쳐야 한다는 경고가 있었을 텐데요…. 여기까지 와서 탓해 봤자 뭐하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걸요.
인간의 몸이 자신보다 훨씬 약하단 걸 몰랐던 블루는 있는 힘껏 당신을 껴안아 버렸네요. 그는 영문도 모르고 즉사한 당신을 안고 한참을 울었답니다.
아, 가엾은 블루! 당신이 조금만 조심했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요.
결국 당신은 노엘과 루카만 먹고 나머지 세 명의 동정 미남은 먹지도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실비아! 그래도 두 명이나 먹었으니 퍽 괜찮은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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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가 끝남과 동시에 실비아는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렸다.
다시 눈을 뜨니 마지막 세이브 지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폴리모프가 풀린 블루가 제 몸을 내려다보며 행복해했다. 기가 막힌 광경이었다. 누구는 방금 황천길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처웃는 꼬라지라니!
‘웃어?!’
실비아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요가용 나무막대기를 하나 찾아내 손에 들었다. 그러곤 블루에게 휘두르며 위협했다.
“이 개새끼! 가까이 오지 마! 저리 가! 훠이!”
핏발이 선 눈으로 이를 가는 실비아의 모습에 블루가 영문을 모르고 울먹였다.
『갑자기 왜 그래….』
“몰라서 그러냐?! 드루 와! 마! 조련사가 시키드나?!”
갑작스러운 데드엔딩의 충격으로 실비아는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블루가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리곤 몸을 떨자 분노가 차츰 가라앉으며 제정신이 돌아왔다. 지중해에서 갓 건져 올린 인어상이 저렇게 생겼을까. 그까짓 데드엔딩 하나 더 추가된 게 뭐 대수라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벗어난 은혜로운 블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울먹이는 가련한 모습에 실비아의 가슴이 아려 왔다.
‘휴, 그래. 얘가 무슨 죄냐. 그래, 성층권에서 죽어 놓고도 방심한 내 죄가 크지.’
실비아는 한숨을 내쉬곤 요가 막대기를 집어던졌다. 그러나 무기를 내려놓은 대신에 걸어 다니는 살인 병기와의 거리를 벌리는 건 잊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이 풀어지자 블루가 방긋 웃으며 가까이 다가오려 했으나 실비아가 손을 들어 방어하는 제스처를 취하자 멈칫했다.
“잠깐! 조금 떨어져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떻겠니?”
『왜? …실비아. 나 뭐 잘못했어? 난 너랑 가까워지고 싶어.』
실비아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직진남인 줄 알았더니 노빠꾸 살인마였다. 그럼 그렇지, 이놈의 게임이 멀쩡한 직진남을 제 앞에 데려다 놓을 리가 없었다. 실비아는 지끈대는 머리를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휴…. 블루야. 드래곤인 넌 모르겠지만 인간에게는 적정거리란 게 존재한단다. 아직 우린 가까워질 때가 아닌 것 같아.”
『적정거리라니. 이 방의 끝과 끝이 적정거리야? …내가 싫으면 싫다고 말해. 너무해.』
그의 말대로 실비아는 최대한 멀찍이 블루에게 떨어진 상태로 문에 붙어 서 있었다. 블루의 울먹임에 실비아는 맘이 약해졌지만, 포옹으로 압박사 당한 충격이 너무 컸다. 그 때였다. 블루가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붉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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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를 유지 시 블루 공략 루트가 파괴됩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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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진짜! 가지가지한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이를 악물곤 블루와 거리를 좁혔다. 그녀가 블루에게 다가갈수록 눈앞의 메시지가 희미해졌다. 그러곤 실비아가 블루의 근처에 서자 완전히 사라졌다. 실비아의 기척을 느낀 블루가 헤실대면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 참, 웃는 것만 보면 진짜 무해해 보인단 말이지. 그렇지만 눈앞의 남자가 살인 병기란 걸 잊으면 안 돼. 경계심을 풀었다가 두 번이나 죽었다고.’
실비아가 떨떠름한 표정인 걸 보고 블루의 낯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실비아! 화 푼 거지? 표정이 뭔가…. 좀 그래!』
“크흠, 화난 거 아냐. 그냥 어제 잠을 잘 못 잤더니 허깨비가 보여서….”
‘너도 한번 나한테 죽어 봐. 그럼 내 앞에서 처웃을 수 있겠느냔 말이야.’
실비아는 또 험한 생각을 하다가 마른세수를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얘한텐 죄가 없다고 여러 번 자기세뇌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블루는 머뭇거리더니 실비아의 곁에 더 바짝 붙어왔다.
『저기. 혹시 부탁 하나만….』
“이 개새…! 안 돼.”
순간 데드엔딩 전에 했던 살인 포옹을 부탁하려는 걸 알아차린 실비아의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막곤 고개를 저으며 살인 포옹 시도를 단칼에 저지했다.
『왜? 왜 안 돼? 어떤 부탁인 줄 알고? 너무해!』
“후우…. 너랑 나는 이제 네 번째 만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고작 네 번 스치듯 만난 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을 인간세계에선 호구라고 부른단다.”
블루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의 말뜻을 가늠해 보는 듯했다. 그러곤 반듯한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호구? 호구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