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오늘 출근 첫날인데 다들 업무 적응은 잘 하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여러분들도 시찰 날을 대비해 직원분들을 많이 도와주세요. 하루하루 점수가 매겨지고 있으니까 다들 농땡이 피우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담배는 피워도 농땡이는 피우시면 안 돼요!”
그의 말이 끝나자 직원들이 하하! 하면서 웃음을 터트렸고 실비아도 뭔진 모르지만 분위기를 보고 ‘아이고! 웃겨!’하면서 웃었다. 그녀의 때를 놓치지 않은 웃음에 부장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인턴들 몇몇은 벙쪄 있었다. 실비아는 배를 잡고 웃다가 천천히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억지로 웃기가 힘들어 얼굴을 숨기기로 한 것이다.
‘설마 저거 농담이야?’
다시 식사가 재개되고 실비아는 은근히 눈치를 살폈다. 동물 파트 권력의 주축인 부장과 메리 할머니가 함께 앉아 있었는데 대화를 엿들으니 둘은 오랜만에 만난 아카데미 동창인 듯했다. 메리 할머니와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던 부장은 간간이 말도 안 되는 저질 유머를 구사했다. 그러면 주변의 직원들이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도록 웃음을 터트렸다. 심지어 오버액션을 하느라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실비아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사회생활이 이토록 힘든 거였다니!
‘사파리가 따로 없구나.’
눈치로 보아 부장의 농담을 진심으로 재밌어하는 건 본인과 동창인 메리 할머니뿐이었다. 실비아는 빨리 이 끔찍한 자릴 벗어나고 싶어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렸다. 비빔밥 같은 음식이 나왔기에 입에 와구와구 퍼 넣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눈을 반짝이던 부장의 레이더에 딱 걸리고야 말았다.
“실비아 양. 급하게 먹지 마. 누가 안 쫓아와.”
“앗, 네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부장이 혼자서 푸흡, 하고 웃더니 그녀를 재차 불렀다. 이거다. 실비아는 부장이 저질 농담에 시동을 걸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실비아 양은 곧 경찰서 신세를 지겠는걸?”
“…왜요?”
“참기름이 고소하니까! 푸하하. 비빔밥 먹고 있잖아. 그 안에 든 참기름이 고소하겠다고! 크흐흡!”
순간 어금니를 꽉 물었던 실비아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푸하하, 하면서 크게 웃었다.
“아니, 부장니임! 어떻게 그런 센스가. 아, 밥 더 못 먹겠어요. 그만 웃기세요! 까알깔!”
짧은 식사 시간 동안 실비아는 직장생활이란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체감했다. 실비아의 오버액션에 신이 난 부장이 계속 저질 농담을 던졌기 때문이다.
“아유, 실비아 양이 유우머를 잘 아는구먼! 아주 맘에 들었어!”
식사가 끝나고 식판을 들고 일어나는 실비아에게 부장이 쌍따봉을 날렸다.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부장과 헤어졌고 잔반처리대 앞에서 잠시 휘청했다. 계속 억지로 웃어댔더니 정신력이 순식간에 고갈된 탓이었다.
그나저나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부장의 농담을 듣느라 죽어 가던 실비아의 귀에 메시지 효과음이 들렸었기 때문이다. 기록 창을 켜보자 놀라운 메시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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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근을 한 실비아는 부장님의 저질개그에 눈치껏 호응했다. 지력이 10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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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부장님의 아재 개그를 견딘 걸로 지력이 10이나 상승하다니. 대박이다!’
메시지를 보자마자 아재 개그에 혹사당해 지끈지끈하던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이런 식이면 점심마다 즐겁게 부장의 개그를 들으리라. 즐거워진 실비아는 오후 일정을 위해 사파리로 향했다. 아까 밥을 먹을 때 메리 할머니에게 부탁해서 내일이던 사파리 일정을 오늘로 당겼다.
‘게임 속 사회도 인맥이면 만사형통이구나!’
남은 점심시간에 잠시 휴식을 취한 실비아는 사파리 월드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여러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그녀를 반겼는데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보니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예상보다 사파리 월드는 무척 큰 곳 같았다. 세렝게티 초원 같다고나 할까.
‘아, 실패하면 안 되니까 세이브를 해놔야겠다.’
그녀는 시스템 창을 켜 세이브를 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생각 없이 걸어 들어가던 그녀를 누군가 급하게 잡아챘다.
“실비아 양! 그냥 들어가면 어떡해. 그러다가 큰일 나.”
“어? 할머니!”
손의 주인공은 메리 할머니였다. 그녀는 실비아를 데리고 입구에 있는 오솔길을 따라갔다. 멀지 않은 곳에 조그만 건물이 보였는데, 사파리 월드의 사무소였다. 그 안에 들어서자 점심시간에 봤던 사파리 직원들이 실비아를 반겼다. 그들은 실비아가 아무 준비 없이 맨몸으로 사파리에 들어가려고 했단 소릴 듣고는 사색이 됐다.
“아이고, 큰일 날 뻔했어.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걸어 들어가다니.”
“아, 죄송해요.”
직원들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실비아는 일단 사과부터 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던 직원들이 사파리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말해 주었다. 그들 말에 따르면 엘리셔스 월드는 원래 놀이동산이 아니라 동물원이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동물수용소였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하니 엘리셔스 제국이 처음 건국될 때 초대 황제가 허허벌판에서 먼저 자리 잡았던 동물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뒤 수도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 특히 위험한 동물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감시하던 게 동물수용소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선 수용소를 포함한 부지 위에 놀이공원이 서며 관람객들이 즐겁게 관람하는 사파리 월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론 수용소는 아직도 이 사파리 월드 안에 있고, 가끔 자리가 부족할 경우 사파리 월드 안에 동물들을 풀어놓고 감시한다며 조련사가 설명했다.
조련사는 말만 해도 긴장되는지 연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는 세렝게티 초원을 방불케 하는 이 넓은 사파리 월드 안에는 고대의 동물들이 호시탐탐 인간들을 도륙하려고 몸을 숨기고 있으니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말만 들으면 당장 폐쇄를 해도 모자랄 판이네요. 여기에 관람객들이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실비아의 물음에 ‘그거 마침 잘 말했어요!’라며 조련사가 캐비닛을 열었다. 그가 테이블에 늘어놓은 건 호신용품들이었다. 방탄조끼나 보호구, 못이 박힌 몽둥이 등등이 있었다.
“관람객들은 보통 철저하게 무장된 마차를 타고 들어가죠. 호신용품도 필수고요. 그냥 들어갔다면 뼈도 못 추렸을 겁니다. 자, 이걸 단단히 챙겨 입어요.”
“우선 입으라고 하니 입긴 할 텐데. 말 못 하는 동물들에게 이런 못 박힌 몽둥이라뇨? 너무 잔인한 거 같아요.”
실비아가 동물들이 가엾다는 듯 눈썹을 내리자 조련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뭐가 더 잔인한 건지는 맨몸으로 들어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추천해 드리진 않지만요.”
“…일단은 입을게요.”
보호구를 챙겨 입은 실비아는 몽둥이는 괜찮다고 사양했다. 어차피 전용 무기 망치가 있으니 급하면 불러내면 된다고 하자 조련사가 아, 하면서 안심한 표정을 했다.
“아! 맞다. 실비아 양은 던전 공략 경험이 있다고 했었죠! 그럼 큰 걱정은 없겠네요.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네네. 그럼 저는 누구와 함께 가면 될까요?”
그녀의 물음에 소파에 앉아 있던 메리 할머니가 몸을 털고 일어났다.
“실비아 양은 나랑 함께 가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인 실비아는 사파리 마차 운전사와 메리 할머니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할머니는 별다른 보호구를 걸치지 않았는데 뒤늦게 그걸 깨달은 실비아가 깜짝 놀랐다.
“할머니! 보호구랑 무기가 없으시네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야….”
“괜찮아요. 메리 할머니는 몸 전체가 걸어 다니는 무기니까요.”
실비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옆에 서 있던 운전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힐끗 옆을 돌아본 실비아는 메리 할머니의 우락부락한 근육을 보고 괜한 걱정을 했음을 알고 침묵했다.
끼익-소리와 함께 한참을 달린 사파리 마차가 정차했다. 사파리 마차는 밖에서 보던 일반 마차들과 달리 뾰족한 가시가 마구 박힌 철조망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잘못 부딪치면 바로 곤죽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사파리 마차는 그렇다 치고 창문 틈으로 밖을 내다본 실비아는 살풍경한 모습에 경악했다.
우선은 바깥이 예상보다 화창하지 않고 무척 어두웠다. 영문을 몰라 시선을 위로 올려보자 몇백 년은 자랐을 거 같은 시커먼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햇살을 막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휑한 초원을 한참 달려 사파리 월드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듯했다. 실비아는 침을 꿀꺽 삼키곤 눈을 조심스레 굴렸다.
상식적으로 사파리 월드면 우리가 쳐 있고 그 안에 동물들이 뛰어놀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우선 들어온 건 몸길이가 3미터도 넘을 것 같은 보아뱀이 나무 몸통을 감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다음은 어디 선캄브리아대에나 존재할 것 같은 이빨이 달리면 안 될 곳에 달린 고대 생물들….
심지어 공룡이랑 비슷하게 생긴 동물도 언뜻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실비아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이딴 이상한 동물들을 사파리 월드에 넣어 놓다니. 못 박힌 몽둥이가 뭐야, 총을 들고 들어와도 일반인이면 목숨을 보장하기 힘들 듯했다.
‘시발, 설명을 제대로 해 줘야지. 조심하라고만 하면 어떡해. 이건 사파리 월드가 아니라 쥐라기 월드잖아.’
사색이 된 실비아는 메리 할머니를 돌아봤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살롱에라도 온 것처럼 여유가 넘쳐흘렀다. 저 험악하게 생긴 동물들을 손주 재롱 잔치 보듯이 바라보는 할머니의 모습에 실비아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메리 할머니는 거침없이 밖으로 나갔고 실비아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할 일 다 끝나시면 전서구로 불러 주세요. 저는 사무실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운전사는 메리 할머니와 실비아를 내려 준 뒤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갔다. 실비아는 아무렇지 않게 맨몸으로 돌아다니는 메리 할머니 뒤에 바짝 붙었다. 저 할머니와 떨어지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전투상태도 아닌데 망치를 인벤토리에서 꺼내서 쥐고 있자 메리 할머니가 뒤돌아보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실비아 양. 쫄지 말아. 이 동물들은 보기보다 귀엽다고.”
“아하하,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