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선의의 경쟁을 해 보자고.”
“…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가슴팍을 바라보니 조끼 안에 입은 티셔츠에 실비아와 똑같이 지원 번호표를 붙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할머니는 ‘알고 보니 회장님’ 뭐 이딴 클리셰가 아니라 선의의 경쟁자 중 하나였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적성 검사 땐 없었던 거 같은데. 아니, 있었던가? 애당초 그런 걸 떠나서 할머니가 왜 인턴십 면접을 보는 건데. 실비아의 의문은 면접관이 할머니에게 말을 걸자 해소됐다.
“장인 전형 통과하신 메리 씨 맞으시죠?”
“예.”
“크으, 익히 명성은 들었습니다. 북극곰을 한 손으로 때려잡으셨다고요. 이런 분이 저희 아쿠아리움에 오시다니! 알아서 모셔야죠.”
실비아를 포함 나머지 면접자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세워 둔 채 메리 할머니와 면접관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면접관은 메리 할머니의 팬인 듯 연신 업적을 추켜세우며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근육질 할머니는 먹이 사슬 최상층에 자리하여 자연스럽게 동물들의 정점에 선 자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아무리 포악한 동물도 메리 할머니를 보면 저절로 허리를 굽신대며 못된 버릇이 고쳐진다고 했다.
외유내강이 아니라 그냥 외강내강. 그런 사람이 왜 인턴 면접을 통해 아쿠아리움에 오려고 하는가 들어 보니 할머니는 이미 부자고 재미로 여길 지원한 거였다. 실비아는 겉으로 평온한 표정을 지은 채 속으로 구시렁댔다.
‘이게 뭐냐고. 아오, 이대로라면 할머니가 이미 합격자 중 한 명이네. 칫, 선의의 경쟁은 무슨! 그럼 7명 중에 1명이 뽑힌단 건데 이거 합격할 수 있는 거야?’
“이제 면접 시작하셔야죠.”
한참을 계속되던 면접관의 칭찬 세례는 할머니의 점잖은 말에 끝이 났다. 뒤늦게 민망한지 헛기침을 한 면접관은 다른 지원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조련사 직업에 동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지원자들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대답에 면접관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무슨 질문을 하려나? 세비스랑 한 면접 스터디가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초조함에 볼 안쪽 살을 씹던 실비아의 차례가 돌아왔다. 그녀가 낸 이력서를 뒤적거린 면접관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자격증이나 별다른 경력이 안 적혀 있어서 그런 듯했다. 그는 실비아를 위아래로 잠시 훑더니 입을 열었다.
“별다른 경력이 없으시네요? 자격증도 없으시고요. 이거 원.”
“네! 그렇지만 성실함은 누구 못지않다고 생각합니다.”
면접관의 태도가 영 재수 없었다. 하지만 세비스의 실감 나는 면접관 연기를 겪은 덕에 실비아는 당황하지 않고 무난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이력서는 휑한데 그런 것치곤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실비아의 대답에 면접관이 호오, 하면서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몇 개의 기본 질문이 오고 갔다. 순간 <헛소리를 진지하게> 스킬을 써서 면접관을 홀려 볼까 생각했던 그녀지만 그건 다른 지원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즉각 나오는 그녀의 대답에 면접관은 처음의 시큰둥한 태도와 달리 흥미롭게 귀를 기울였다. 옆 사람과 속닥대던 면접관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저희 아쿠아리움에 인턴으로 입사하신 후 포부를 듣고 싶은데요.”
포부! 세비스와 면접 준비를 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여러 번 복기했던 기본 질문이었다. 큼, 하고 목을 한번 가다듬은 실비아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면접관들을 바라봤다. 그러곤 준비한 대답을 떠올리며 거기에 살짝 하나 더 내용을 추가했다. 메리 할머니와 대화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다.
‘이게 통하려나? 모르겠다, 우선 질러 보지 뭐!’
“저는 동물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조련사가 되고 싶습니다. 옆에 계신 곧 조련사가 되실 분이 힘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에게 군림한다면 저는 동물들의 마음을 두드려 그들의 친구이자 가족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합니다.”
“흠, 조금 추상적이군요?”
실비아가 옆에 선 메리 할머니를 언급하자 면접관이 할머니와 실비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추상적이란 그의 질문에 실비아가 쉬지 않고 바로 되받아쳤다.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외제마와 깊은 교감을 나눠 제가 금전적 어려움에 시달릴 때 그가 선뜻 장난감을 전당포에 맡기라고 건넨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서구와도 꾸준히 친밀감을 쌓은 덕에 집이 무너져도 전서구는 저를 묵묵히 기다려 줬습니다.”
“호오.”
참둘기 얘길 할 땐 조금 찔렸지만, 결과적으로 틀린 말은 없었기에 그녀는 애써 가슴을 당당히 폈다. 면접관들은 감탄사를 흘리며 속닥거렸는데 실비아 귀에 다 들렸다.
“그 콧대 높은 외제마가 장난감을 건네다니. 보통내기가 아니군.”
“전서구가 집이 무너졌는데도 도망을 안 갔다고? 그건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전서구 연구가 닥터 제임스도 해내지 못한 일이야.”
그들의 속삭임을 엿들은 실비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녀는 기세를 몰아 있어 보이는 말을 총집합해 포부를 계속 말했다.
“나그네의 외투는 강한 바람이 아닌 뜨거운 햇살로 벗겨 내는 법입니다. 강한 힘은 좋지만, 그 옆엔 부드러운 회유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를 모색해 아쿠아리움의 동물들을 훌륭히 조련할 것입니다.”
경험이 섞인 실비아의 훌륭한 대답에 면접관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때 옆에서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던 메리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음, 그건 제가 보증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확실히 실비아 양은 따뜻한 햇살 같은 사람이죠.”
예상치 못한 메리 할머니의 도움에 실비아의 낯빛이 밝아졌다. 결투 신청을 하지 않고 재롱을 피운 덕에 할머니의 도움을 받는 나비 효과가 일어났다. 유교 국가에서 살았던 경험이 여기서 빛을 발하는구나. 역시, 클리셰! 믿고 있었어. 회장님이 아니라 알고 보니 경쟁자였단 건 조금 그랬지만 결국 돌고 돌아 할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할머니가 말을 얹자 면접관들의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그러나 한 면접관이 펜을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음, 자신감 있는 태도는 좋은데 경력이 너무 없어서 좀….”
그의 말에 면접관들이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판사판이 된 실비아는 아까 할머니를 치켜세우던 면접관들의 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통할진 모르지만, 뭐라도 말해야 했다.
“경력 말씀이십니까? 북극곰은 때려잡은 적 없지만 저는 던전을 공략한 경험이 있습니다. 몬스터는 좀 많이 때려잡았죠.”
“예?! 그걸 왜 이제 말합니까? 세상에, 그런 건 경력 사항에 적어 넣어야죠.”
던전 공략 경험을 아쿠아리움 인턴 이력서에 적는 게 도움이 될 줄이야. 그건 예상 못 한 일이었다. 잠시 황당해하던 그녀는 확연히 밝아진 면접관들의 표정을 보고 승기가 자신에게로 넘어왔음을 확신했다. 그때 테이블 끝에서 못 미더운 표정으로 실비아를 바라보던 면접관이 피식거렸다.
“던전 공략을 해 보셨다고요? 말로는 누가 못 해.”
“음, 그건 그렇네. 던전 공략을 하신 분이 왜 아쿠아리움 조련사 보조 인턴에 지원하신 거죠?”
면접관의 날카로운 눈빛에 실비아의 관자놀이에 주르륵 땀이 흘러내렸다. 그거야 공략 캐릭터가 아쿠아리움에 있으니까…. 잠시 눈을 데로록 굴린 실비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증명해 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
“이 자리에서요? 허, 참. 어떻게 증명하려고요?”
“인명 피해는 없을 거예요.”
면접관이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그래, 맘대로 해 봐요. 한번 봅시… 아이고!”
실비아는 즉각 인벤토리에서 부메랑 망치를 불러내 면접관들에게 던졌다. 부웅- 소리와 함께 망치가 공중을 날았다. 순간 공포에 질린 면접관들이 고개를 숙였으나 망치는 그들을 가뿐하게 지나 뒤에 있던 검은 통창을 와장창 깨트리고 돌아왔다.
“이게 무슨!”
“인명 피해는 없을 거라고 했지만 약간의 기물 파손이 없을 거란 소린 하지 않았습니다.”
실비아가 차분하게 답하자 면접관은 물론 모두가 침묵했다. 사실 그녀는 태연한 척했지만 일을 저질러 놓고 살짝 쫄아 있는 상태였다.
‘면접관들이 열받는 소리만 골라 하길래 나도 모르게 그만. 이거 기물 파손으로 쫓겨나는 거 아냐.’
푸하하. 그러나 그 침묵을 깨고 누군가의 입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호탕한 웃음의 주인공은 메리 할머니였다.
“내 보조가 되려면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메리 할머니의 말을 들은 면접관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메리 할머니는 재미로 면접에 참여한 사람이니 수틀리면 언제라도 뒤돌아설 수 있었다. 그들은 할머니가 필요했기에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영입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아, 그렇죠. 조련사 보조가 되려면 저 정돈 되어야지. 던전 공략 경험은 사실이었군요. 실비아 양은….”
침을 꿀꺽 삼킨 면접관은 양옆의 사람들을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인 뒤 남은 말을 마저 했다.
“합격입니다! 무조건 합격!”
이렇게 실비아는 무조건 합격을 얻어 내었다. 엿의 효과로 1조가 아니라 2조에서 면접을 본 덕에 메리 할머니를 만났고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명목상의 친화력 테스트가 아직 남아 있었기에 그녀는 대기실에서 메리 할머니와 대기했다.
다른 면접자 두 명도 동석했다. 메리 할머니는 장인 전형으로 이미 조련사로 내정돼 있으니 논외고 어차피 인턴은 두 명을 뽑아야 했다. 대기실에서 메리 할머니와 얘기를 나눈 실비아는 아쿠아리움 관계자들이 왜 강함을 추구하는지 그 속사정을 알게 되었다.
엘리셔스 월드는 대륙을 통틀어 가장 큰 놀이공원으로 사파리와 아쿠아리움에 온갖 동물들이 들어온다고 한다. 귀족들과 외국 관광객들이 어마어마한 입장료를 지불하고 방문하기에 희귀한 동물은 다 데려오는데, 그중에 말도 못 할 범죄자 동물들이 있단 거였다. 그 동물들은 일반 동물들과 다르게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지만, 희소성이 있기에 동물 부서에서 함부로 방출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 동물들을 관리하는 게 사파리 월드와 아쿠아리움 조련사들이지. 보조도 그 역할을 해내야 하고 말이야.”
할머니의 말을 듣자 왜 인턴 지원자들이 동물 부서를 기피하게 되는지 알게 되었다. 목숨을 내놔야 할지도 모르니 피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 기피 이유가 생각보다 더 어마무시했지만 던전 공략 경험이 있는 실비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말을 듣고도 태연한 그녀의 표정에 할머니가 너털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