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퀵 마차는 순식간에 엘리셔스 월드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실비아는 문을 닫기 전 마부에게 인사를 했다.
“마부님,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인턴십 시험 보나 봐요? 합격할 겁니다! 아자!”
실비아의 인사에 세비스와 실비아의 대화를 들었던 마부가 실비아의 합격을 응원하며 떠났다. 아무래도 수도 사람들에게 이곳 인턴십은 유명 행사인 모양이었다. 놀이동산 앞은 관람객 없이 입구가 휑했다. 상담사에게 듣기론 인턴십 모집일엔 엘리셔스 월드 운영이 중지된다고 했다. 그들은 상담원이 준 모집일 안내지에서 본 대로 놀이동산 뒷길로 돌아갔다.
인턴십 모집엔 신흥 부자와 유력 가문의 자제들이 많이 참여하기에 놀이동산 뒷문 앞에는 고급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마차에서 내리는 이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남달랐다. 화려한 원단의 제복이나 고급 양복을 걸친 이들은 데려온 사용인의 시중을 받으며 여유롭게 놀이공원 뒷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근처에서 어슬렁대던 실비아네는 그들을 응원하는 무리를 발견했다.
“선배님 힘내세요!”
“사랑해요! 제국 아카데미를 빛내고 돌아오세요!”
무리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 보니 제국 아카데미 학생들도 이 인턴십 모집에 참여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를 훑으니 ‘3년의 노력이 결실을!’이란 글자가 보였다. 그 말은 엘리셔스 월드 인턴십을 위해서 3년이나 준비했단 것. 벼락치기인 실비아는 살짝 기가 죽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하는 거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저런 사람들을 제치고 내가 붙을 수 있을까. 정직원은 바라지도 않고 인턴십 턱걸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들을 따라 뒷문으로 들어선 실비아네는 오늘 면접을 위해 바닥에 붙여 놓은 이정표를 보며 길을 걸었다. 그들은 곧 검은 대리석 건물에 다다랐다. 건물의 로비는 마치 호텔의 라운지 같았는데, 곳곳에 놓인 테이블 의자와 소파에 자리한 지원자들이 종이를 들고 중얼거리는 게 보였다. 그 옆에 주인보다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는 사용인들까지.
슬쩍 그들을 따라 소파 끝에 엉덩이를 댄 실비아도 기출 문제집을 펼쳤다. 세비스는 실비아를 위해 간식거릴 사러 갔다. 집중이 되질 않아 주위를 두리번대던 그녀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잠깐, 내가 들고 있는 거랑 쟤들이 들고 있는 거랑 좀 다른데?’
실비아는 황급히 제 것과 남들이 들고 있는 책의 표지를 비교해 봤다. 혹시나 옆 사람들만 그런가 싶어 목을 빼 이리저리 둘러보니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출판사가 다른 걸까?
옆자리 사람이 잠시 자리를 비운 새 그녀는 은근슬쩍 엉덩이를 옮겨 소파 위에 엎어 놓은 책을 들여다봤다. 책 제목을 본 실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족집게 1타 강사의 엘리셔스 월드 인턴십 족보?’
큰일이었다. 인력 사무소에서 준 기출 문제집만 달달 외웠던 벼락치기 실비아와는 달리 오랜 기간 인턴십을 준비한 학생들은 족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목만 봐도 인력 사무소에서 준 기출 문제집보단 훨씬 좋아 보였다. 자신감을 잃은 실비아의 눈이 동태 눈깔처럼 흐릿해졌다.
‘이걸 어쩐다. 헛수고하는 거 아냐?’
매점에 가서 간식을 사 온 세비스는 선반 위에 한 달 방치한 시금치처럼 시들시들해진 실비아를 보곤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는 간식을 건네며 조그만 어깨를 토닥였다.
“이거 좀 드세요. 긴장되죠? 시험 잘 보실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다들 준비를 철저하게 한 것 같은데 이길 수 있을까 모르겠네.”
실비아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보던 세비스가 망설이더니 실비아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저기, 사실 어제 윗집에서 만난 할아버지한테 실비아 님이 인턴십을 볼 거라고 얘기했었거든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몇 가지 정보를 알려 주셨어요.”
음료를 마시던 실비아는 세비스의 말에 놀라 사레가 들렸다. 한참 기침을 하다가 진정이 된 그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세비스의 손을 고이 잡았다. 어제 마냥 재롱만 떨다가 온 줄 알았더니 실비아가 재롱떠는 동안 세비스는 정말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녀가 ‘뭔데, 뭔데?’ 하고 호들갑을 떨며 묻자 세비스가 그녀의 귀에 속닥거렸다.
할아버지가 말한 정보에 따르면 실비아가 원하는 ‘아쿠아리움 조련사 보조’ 직렬은 사파리 직렬까지 포함, 대부분 지원자의 기피 대상이라는 것. 실비아가 걱정했던 아카데미 출신들은 물론 다른 쟁쟁한 사람들은 그녀와 다른 직렬을 지원할 거라는 거였다. 그의 말에 실비아가 화색을 띠며 좋아하자 세비스가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의 말론 경쟁자가 거의 없을지라도 심사위원들의 맘에 들어야 합격할 수 있다는 거였다. 말하자면 경쟁률이 적더라도 최소 인원을 필수로 뽑는 직렬은 아닌 만큼 열심히 해야 한단 소리였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그녀의 몸이 저절로 풀어졌다.
눈에 띄게 밝아진 실비아는 실실 웃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왜 기피 대상이란 거지? 이곳 사람들은 동물을 별로 안 좋아하나.’
뭐가 됐든 이제 한시름 덜었기에 그녀는 다시 헤실거리며 좋아했다.
“진작 말하지! 난 그것도 모르고 겁먹었잖아.”
“미리 말하면 실비아 님이 제대로 준비 안 하실까 봐 그랬어요. 그래도 열심히 해야 붙을 수 있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늦게 말하긴 했지만 세비스 덕에 맘이 한결 나아졌다. 실비아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기출 문제집을 읽었다. 잠시 후 관계자가 로비 앞에서 다른 면접자들을 호명했다. 그러자 실비아와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그를 따라갔다. 아무래도 다른 직렬인 모양이었다. 저들과 경쟁했다면 실비아는 백 프로 졌을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쉰 실비아는 잠시 후 호명을 받았고 몇 안 되는 지원자들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아 참, 실비아 님, 잠시만요.”
“응?”
시험장에 들어가려는 그녀를 세비스가 급하게 불러 세웠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알록달록한 반투명 포장지로 싼 엿을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세요. 어제 위층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챙겨 주신 거예요.”
세비스가 준 엿을 받아 들자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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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는 <운이 좋아지는 엿>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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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거 아이템이네.’
“어어, 그래. 고마워.”
급히 상세 설명을 보자 ‘복용할 시 하루 동안 더 좋은 선택을 하게 도와주는 아이템’이란 메시지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실비아는 엿을 까 입에 물었다. 에어로빅 무리에게 층간 소음에 대해 항의하지 않고 재롱을 피운 덕에 운빨 아이템을 얻다니!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그건 시험 결과를 보면 알게 될 터였다. 세비스는 시험장까지 따라올 수 없었기에 복도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시험장에 들어서자 잠시 후 감독관이 4절지 사이즈의 시험지를 나눠 줬다. 첫 번째 시험은 적성 검사였다. 시험지 안에는 현생의, 머리에 쥐 나는 대기업 적성 검사와 달리 정말 ‘동물 조련사 보조 인턴’으로서 적성을 파악하는 질문들이 있었다. 객관식 시험이었기에 OMR 카드를 배분받은 실비아는 신중히 하나하나 마킹했다.
‘고양이가 꼬리를 세우고 다가오는 건 어떤 뜻입니까?’ 같은 간단한 질문부터 ‘닭이 먼저입니까, 달걀이 먼저입니까?’ 같은 심오한 질문까지. 엿의 효과인지 답을 모르겠어서 끙끙댈 때면 오지선다 중 하나가 반짝거리며 빛났기에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크, 이럴 때 플레이어 버프가 빛을 발하는 법이지.’
신나게 마킹을 하던 실비아는 한 질문에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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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과 사자가 한 우리에 갇혔다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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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딴 질문이 다 있단 말인가. 심지어 답은 ‘사자를 먼저 구한다.’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시계를 힐끗 보니 시험 시간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실비아는 급하게 마킹을 했다.
“시험은 잘 보셨어요?”
“응. 좀 잘 본 거 같긴 해.”
시험이 끝나고 복도에서 세비스가 건네는 물을 마시고 있자니 감독관이 바로 합격자 명단을 벽에 붙였다. 응시자가 몇 명 없어서 그런지 결과가 빨리 나왔다. 후다닥 달려가 살펴보니 엿의 가호 덕분에 합격자 명단에 그녀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이 시험에서 두 명이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집으로 갔다. 거의 대부분 합격한 걸 보니 1차는 부적격자를 가리기 위한 검사인 듯했다.
2차는 바로 압박 면접. 적성 검사는 쉽게 통과했지만 아마 이 면접에서 탈락자가 꽤 나올 것 같았다. 면접을 앞두고 1시간 정도의 휴식이 주어졌다. 실비아는 세비스와 함께 놀이동산 매점에서 간단한 점심을 사 먹었다.
“여기서 대기하고 계시다가 이름이 불리면 입장하시면 됩니다.”
휴식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세비스는 매점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면접장 복도의 대기석에 앉은 실비아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세비스가 도와준 덕에 면접 연습을 많이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현생에서도 본 적 없는 대기업 면접에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실비아는 고개를 들어 대기자들을 대충 훑어보았다. 경쟁자가 적다곤 하지만 하나같이 똘똘하고 야무져 보이는 게 제가 통과할 수 있을지 자신을 할 수가 없었다.
‘인턴십 모집 공고에는 이 직렬은 합격자가 단 2명이라고 적혀 있던데…. 8명 중에 2명이니 4대2. 내가 합격할 수 있을까.’
“…실비아 씨. 실비아 씨 안 계십니까?”
‘어우, 놓칠 뻔했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실비아는 제 이름을 듣고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계자한테 가 보니 이미 차례가 한 번 지나간 아찔한 상황이었다.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사과한 실비아는 다행히 면접 볼 기회를 다시 얻었다. 혀를 찬 관계자는 2조 지원자들을 따라가라고 했다. 그녀는 면접실로 들어서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는데 그들의 뒷모습이 반짝- 하고 빛났다.
‘어? 엿의 효과인 거면 2번째 조가 내 행운의 조란 건데.’
기대감에 찬 실비아는 면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긴장한 얼굴로 안에 들어선 그녀는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어? 할머니!”
“아유, 아래층 새댁이구만.”
층간 소음을 유발하던 에어로빅 무리의 실세 중의 실세. 근육질 할머니가 인자한 얼굴로 실비아를 맞이했다. 세상에나, 설마 이건 ‘면접날 길에서 할머니의 짐을 들어 줬더니 알고 보니 회장님’ 같은 유구한 클리셰인 걸까!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할머니니까 말이다.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이던 실비아는 할머니가 조끼를 열어젖히며 속삭이자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