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거실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까지 한 10명 정도가 모여서 도시락을 까먹는 중이었는데, 동네 잔칫날도 아니고 온갖 음식이 신문지 위에 거나하게 차려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운동을 하고 있었던 건지 그들은 모두 에어로빅복을 입고 있었고 실내공기가 후덥지근했다. 어르신 무리를 힐끗댄 세비스가 실비아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어떡하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런 다층 건물에서 단체 운동이라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다들 나이가 지긋해 보이셔서 함부로 말하기가….”
“그러게. 할머니, 할아버지뻘이라서 뭔 말을 못 하겠네. 그래도 그렇지, 아파트에서 뭔 단체 에어로빅을 하냐고.”
실비아네가 붙어서 속닥거리고 있자 아주머니 한 명이 손을 흔들며 그들을 불렀다.
“아유, 보기 좋네. 아직 밥 안 먹었지? 한입들 해.”
“네? 아아. 아침 드시고 계신 거였군요. 여기 핫케이크도 드세요.”
“핫케이크? 좋지!”
아주머니의 갑작스러운 식사 권유에 세비스가 얼떨결에 핫케이크를 내밀었다. 아주머니는 넉살 좋게 핫케이크를 한 장 가져가더니 핫케이크와 수육, 그리고 피클을 함께 얹어 싸 먹어 버렸다!
“핫케이크 삼합도 색다르네. 존슨 할배, 한입 할텨?”
“핫케이크 삼합 좋지!”
협상 도구로 가져간 핫케이크는 순식간에 삼합의 희생양이 됐다. 얼핏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핫케이크를 왜 가져온 건지 묻지도 않는 모습에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실비아네의 팔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몇 갑잔지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내공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삼합이 뭐야, 심지어 핫케이크를 찢어 리소토에 비벼 먹는 에어로빅 무리의 모습에 실비아네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는 짓을 보니 아마 실비아네가 층간 소음 얘길 꺼내도 허허 웃으며 ‘좋은 게 좋은 거지’하고 대충 넘길 터였다. 실비아가 에어로빅 무리를 찬찬히 살펴보니 아주머니는 허리에 타이어를 매달고 있었고 근육질의 할머니는 한 손으로 육중한 덤벨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핫케이크 삼합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녀의 여유로운 표정에서는 한 치의 힘겨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거 어쩌면 좋지? 쉽게 말을 못 꺼낼 분위기네. 잘못하면 서로 기분만 상할 거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층간 소음을 참을 수도 없어. 아우, 스트레스!’
실비아가 머리를 싸매며 살짝 비틀하자 세비스가 그녀를 급히 부축했다. 그때, 현기증을 느끼는 실비아의 눈앞에 선택지가 떠올랐다.
———————————————
[이사 오자마자 층간 소음에 시달리는 실비아네! 위층에 올라가 보니 에어로빅 무리의 내공이 장난이 아닌 것 같아! 어떻게 하면 좋지?
- 올라온 이유를 솔직하게 말하고 주의를 준다.
- 에어로빅 무리에게 친해지고 싶다고 말한다.
- 손수건을 던지며 결투를 신청한다.]
———————————————
‘음, 어떻게 하면 좋지?’
선택지를 보는 실비아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새우잡이 배에서 떠올랐던 선택지와 비슷한 유형으로 그녀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니 떠오른 듯했다. 선상에서의 경험으론 이 일을 잘 해결해야 앞으로의 게임 생활이 편해질 것이다.
첫 번째는 가장 빠른 해결 방법이지만 자칫하면 에어로빅 무리의 신경을 거스를 수도 있었다. 두 번째는… 음, 친해진다고 해서 층간 소음을 해결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 번째는 결투 신청인데 우락부락한 팔로 덤벨과 삼합을 동시에 든 할머니를 힐끗 본 실비아는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딴 건 몰라도 세 번째 선택지만은 절대 고르고 싶지 않았다.
‘우선 이사 온 첫날이니까. 조금은 참아 볼까? 두 번째를 선택해야겠어.’
두 번째 선택지를 고르자마자 그녀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안녕하세요. 어르신들! 저희는 어제 이사 왔거든요. 신혼부부는 아니고요. 앞으로 주민분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실비아의 맑고 명랑한 목소리에 삼합을 즐기던 에어로빅 무리들이 고개를 들었다. 실비아가 눈을 마주치며 방긋 웃자 근육질 할머니가 덤벨을 내려놓더니 인자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부끄러워하지 마. 둘이 잘 어울리는구만, 뭐. 우리도 젊은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면 좋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에어로빅 무리가 ‘맞아, 맞아!’ 하면서 실비아네가 앉을 수 있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귀신같이 훈훈해진 분위기에 실비아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처음의 핫케이크 삼합은 기 싸움이었구나.’
뭐, 신혼부부가 아니라고 해명해도 전혀 듣지 않는 건 조금 그랬지만 세간의 평가 때문인 거라고 생각하고 놔두기로 했다. 실비아네는 에어로빅 무리와 사이좋게 핫케이크 삼합을 나눠 먹으며 그들의 비위를 맞췄고 덕분에 이런저런 정보를 들었다. 아파트 쓰레기 분리수거 시간과 오일장 서는 날 등등. 그러다 보니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들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그들은 새싹 주민회의 10대 천왕으로 이 아파트의 실세들이었다.
실비아는 속으로 뭔 놈의 아파트에 실세까지 있냐고 코웃음을 쳤지만 이어지는 얘기에 진지한 표정이 됐다. 놀랍게도 10명 모두 다 이 아파트 주민이 아니었고 젊을 때 한 가닥 하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비아네를 아직 완전히 믿진 않는지 신상 명세를 세세하게 풀진 않았다. 다른 걸 떠나 아파트 주민도 아니면서 주민회 일동인 데다가 굳이 아파트를 운동할 용도로 빌려 층간 소음을 유발하며 단체 운동을 하는 건 좀 많이 그랬다. 허나 그녀는 굳이 의문을 제기해 10대 천왕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로 했다.
친해지기로 마음먹고 나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다. 실비아와 세비스는 특유의 싹싹함으로 어르신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들은 열심히 어깨도 주무르고 앞에서 꼭두각시 춤도 추면서 한참 재롱을 피우다가 어르신들과의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잘들 가더라고!”
“어르신들, 그러면 다음에 봬요!”
덜컹-. 실비아와 빈 접시를 든 세비스가 복도로 나오자 문이 닫혔다. 빈 접시를 들고 복도에 선 세비스는 문이 닫히자마자 만면에 띠던 웃음을 서서히 거두었다.
“아니, 층간 소음 얘기는 못 하고 재롱만 피우다가 나왔네요. 잘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우선 알짜배기 정보를 많이 얻긴 했는데….”
실비아도 입을 삐죽대면서 세비스의 귓가에 조심스레 입을 가져갔다. 그 와중에도 에어로빅 무리가 뒷담을 들을까 봐 겁이 나서였다.
“보통내기들이 아니었어. 싸웠다면 승산이 없었을 거야. 우선 층간 소음은 한동안 참기로 하자. 계속 소음이 심하면 다시 해결 방안을 찾아봐야겠어.”
집으로 돌아온 둘은 어제와 똑같이 모의 면접을 하며 실비아의 인턴십 준비를 했다. 끼니도 챙기지 않고 열중하던 그들은 내일 인턴십 준비를 위해선 정장을 사야 한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부랴부랴 옷가게가 닫기 전에 나가서 정장도 한 벌 구입했다.
“실비아 님, 오늘은 빨리 주무세요. 팩도 하시고요. 아침에 일찍 깨워 드릴게요.”
“응. 먼저 자. 나도 금방 자러 갈게.”
세비스가 졸린 눈을 비비며 방으로 들어간 뒤 베란다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고독을 씹던 실비아는 참둘기가 호로록 날아오는 걸 발견했다. 발에 노란색 편지지가 묶여 있는 걸 보아 노엘에게서 온 편지일 터였다.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진 실비아는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펼쳤다.
———————————————
[실비아 님, 수도로 올라오셨다고요? 정말 슬프네요. 이렇게 엇갈릴 수가 있을까요. 저는 계속 수도에 머무르다가 삼 일 전부터 황제 폐하가 내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른 지역에 와 있답니다. 만나 뵙고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제 몸이 건강한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요. 실비아 님이 살펴 주시면 바로 알 수 있을 텐데요. 임무가 다 끝나면 당장 수도로 올라가 실비아 님께 제 몸을 검사받고 싶습니다. 자세하게 확인해 주시길.
그럼 다시 만나는 날을 고대하며 이만 줄일게요.
-귀여운 걸 좋아하는 노엘-]
———————————————
“어우, 미쳤어. 나보고 몸을 검사하라니, 내가 의사도 아니고 증맬! 샅샅이 살펴봐야징.”
실비아가 좋아 죽으며 꺄르르 웃자 물통에서 물을 마시고 있던 참둘기가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안 자니?”
참둘기를 들어 둥지에 조심스레 집어넣고 토닥인 실비아는 편지를 다시 봤다. 마지막 구절도 실비아를 웃게 했다. 귀여운 걸 좋아한다니? 바로 전에 보낸 편지에서 실비아가 자신을 ‘귀여운 자매’라고 지칭한 걸 염두하고 쓴 멘트가 분명했다.
“아이참. 몰라 몰라.”
실비아는 허공을 손으로 찰싹찰싹 때리며 한참을 좋아하다가 편지지를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웃는 낯으로 거실에서 춤을 추던 실비아의 입꼬리가 점점 내려갔다. 내일 있을 인턴십 면접을 생각하니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방으로 들어가 초조하게 기출 문제집을 한 번 더 읽은 실비아는 얼굴에 팩을 붙이고 침대에서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다.
* * *
드디어 면접날이 돌아왔다! 세비스가 차려 준 아침을 먹은 실비아는 거울 앞에서 정장을 입은 본인의 모습을 확인한 뒤 긴장되는 표정으로 밖을 나섰다. 근데 세비스도 함께 따라 나오는 게 아닌가.
“실비아 님! 같이 가요.”
“응? 너도 볼일이 있어?”
실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세비스가 싱긋 웃었다.
“실비아 님한테 중요한 일이면 저한테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따라가서 응원해야죠.”
“세비스….”
세비스의 따뜻한 미소에 실비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자세히 보니 세비스는 이미 검은 바지에 흰 와이셔츠를 입은 외출복 차림이었다. 집에서 편하게 기다릴 줄 알았더니 자신을 응원하러 같이 간다니 기특했다. 마음이 훈훈해진 실비아는 세비스와 함께 퀵 마차를 타고 엘리셔스 월드로 향했다. 림보를 타는 것과 비교할 순 없지만 퀵 마차라서 그런지 빠르게 목적지로 갈 수 있었다. 창문 밖을 내다보는 그녀의 얼굴을 바람이 세차게 때리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