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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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쓰러운 새댁
- <안쓰러운>의 효과로 랜덤으로 상대방에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 <새댁>의 효과로 일정한 확률로 동네 주민들의 생활 꿀팁이나 중고 물품을 얻는다.
- 부작용 : 아직 미혼이라고 해명을 해야 하는 일이 가끔 발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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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이런 거 필요 없어. 중고 물품이야 조금 땡긴다만, 꿀팁이라고 해 봤자 와이셔츠 얼룩 지우기 이딴 거겠지!’
<안쓰러운>은 아까 부동산업자의 반응을 보면 나름 쓸 만한 세간의 평가였지만 <새댁>은 정말 필요 없었다.
‘잠깐, 설마?’
가구를 들여올 때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실비아가 급하게 걸어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안을 확인하자 퀸 사이즈 침대가 방을 꽉 채우고 있는 게 보였다. 불길한 예감을 가득 안은 채 다른 방을 확인한 실비아는 절망했다. 역시나 <안쓰러운 새댁> 효과였는지 부동산업자는 퀸 사이즈 침대 하나만 구해 주고 떠났다. 실비아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어느새 거실과 베란다 청소를 혼자서 다 해 버린 세비스가 걸레에 묻은 먼지를 쓰레기통에 털곤 그녀에게 다가왔다.
“다행히 전 세입자가 집을 깔끔하게 썼는지 별로 손볼 곳은 없네요. 이젠 각자 방만 치우면 되겠어요.”
“세비스! 청소 같이하자고 하지, 왜 혼자 했어.”
“별로 할 것도 없었는걸요? 그런데 얼굴이 안 좋아 보여요. 무슨 일 있으세요?”
머뭇거리던 실비아는 그의 눈치를 보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기 방에 퀸 사이즈 침대 하나뿐이야. 아무래도 오늘 만났던 사람들이 우리를 신혼부부로 착각한 것 같아.”
“어? 침대가 하나였어요? 신혼부부로 보다니. 설마요.”
“그런 거 같아. 내 감이 그래. 그래서 말인데…. 음.”
어쩐지 오버하는 것 같아 실비아가 선뜻 말을 건네지 못하자 세비스가 주방 옆 기둥에 기대어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모로 기울여 지그시 내려다보는 모습에 어쩐지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내가 왜 이러지?’
어쩐지 조강지처가 부끄러워 관계를 숨기고 싶어 하는 몹쓸 망나니가 된 기분이었다. 갑자기 병나발이 불고 싶어 자신도 모르게 소주병을 찾던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곤 더듬대며 할 말을 했다.
“어, 그! 별말은 아니고! 앞으로 조심하잔 거지. 같이 사니까 결혼한 사이라고 오해했나 봐.”
“…난 또 뭐라고. 진짜 별말 아니네요. 조심할 게 있나요? 뭐, 물어보지도 않는데 먼저 해명할 수도 없고 말이죠.”
“그건 그렇긴 하네….”
실비아가 볼을 긁으며 민망해하자 세비스가 피식하고 살짝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나선 태연하게 뒤돌아 주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뭔가 다른 태도에 그녀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전에 이런 비슷한 일들이 있었을 때는 또박또박 따지거나 섭섭한 티를 있는 대로 냈던 거 같은데, 저게 머리가 컸다고 이제 비웃기까지…. 잠깐 비웃어?
‘으응? 비웃었을 리가! 잘못 본 거겠지.’
실비아는 오늘따라 피곤해서 헛것을 봤다고 판단했다.
사실 세비스는 비웃은 게 맞았다. 정확히는 센 척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뒤돈 그는 차갑게 얼굴을 굳힌 채 의미 없는 주방 정리를 했다.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니 실비아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으나 그녀가 어쩐지 강하게 부정하니까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
‘정신 차려야지.’
눈썹을 찌푸린 세비스는 잡생각을 물리치며 열심히 주방을 정리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지나고 한참 뒤 언제 그랬냐는 듯 분위기는 다시 좋아졌다. 실비아의 인턴십 면접을 위한 가상 면접을 세비스가 도와야 했기 때문이다. 소파에 앉은 세비스가 면접관 연기를 하자 실비아가 침실 문을 열고 나와 허리를 숙이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프리랜서였던 실비아는 현생에서 제대로 된 면접 경험이 없는지라 모의 면접인데도 긴장이 됐다.
‘면접이라곤 사장과 일대일로 대충 봤던 알바 면접들밖에 없는데.’
“기출 문제집에 나와 있는 질문 중에 골라서 물어봐 줘.”
“네. 실제처럼 질문할게요.”
세비스는 실비아가 준 기출 문제집에 적힌 면접 단골 질문 중 하나를 고르곤 입을 열었다.
“어, 실비아 씨?”
“예!”
세비스가 없는 콧수염을 만지는 척했다. 쓸데없이 연기가 리얼했다. 그는 못마땅하게 실비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서류를 뒤적거리는 척하다가 있지도 않은 투명 안경을 내리고 그녀를 꼬나봤다. 눈이 붉어서 더 재수 없어 보였다. 실비아의 입이 삐죽거렸다.
“쓸데없는 연기 하지 마.”
“하? 지금 면접관인 절 모욕하신 건가요? 탈락이고요. 나가시는 문은 저쪽입니다.”
세비스의 비아냥대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배우 할 것도 아니고 대충하면 될 걸 뭐 저렇게 재수 없게 하는지 실비아는 살짝 화가 났다.
“쓰읍.”
“면접 안 볼 겁니까?”
그녀가 입술을 말아 물며 위협하자 그가 손을 들어 막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지적했다. 실비아가 쯧 하고 혀를 차자 그가 따분한 표정을 짓더니 질문을 던졌다. 턱을 치켜든 채 볼 안쪽을 혀로 굴리는 게 아주 거만해 보였다.
“음, 다른 분들보다 경험이 없네요. 자격증도 없고. 이거 영, 써먹을 구석이 없네. 다른 지원자보다 본인이 잘할 수 있는 게 뭡니까?”
세비스의 말은 마지막 질문 빼곤 즉석에서 추가한 거였는데, 문제집을 먼저 읽어 앞의 말이 그가 추가한 거란 걸 아는 실비아는 꿀밤을 세게 날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눈이 시뻘게진 실비아가 주먹을 쥐고 부들거리자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세비스가 잠시 연기에서 벗어나서 그런 그녀를 진정시켰다.
“실비아 님! 고작 이 정도 말에 화가 나시면 어떡해요. 실제 상황에선 훨씬 재수 없는 면접관도 많을걸요?”
“그래, 네 말이 맞아. 휴, 연기 잘하네. 진짜 화가 날 뻔했어.”
“이거 안 되겠네. 언제 봤다고 반말이지? 당장 탈락시켜.”
세비스가 마치 누가 옆에 있는 양 고개를 돌리고 명령하자 실비아의 화가 폭발했다.
“으아!”
새집에 이사 온 첫날, 늦은 밤까지 실제를 방불케 하는 세비스의 면접관 연기는 계속됐고 실비아는 그 덕에 분노를 조절하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열정적인 모의 면접이 성공리에 끝나고 어느새 잘 시간. 침대가 하나밖에 없었기에 세비스는 바닥에 이부자리를 펴고 자기로 했고 실비아 혼자 넓은 침대를 차지했다. 미안해하는 실비아에게 세비스는 내일 침대를 하나 더 사면 된다며 걱정 말라고 했다. 둘은 그렇게 게임 세계에서 처음으로 같은 집에 있으면서 다른 공간에서 잠이 들었다.
동이 터 오는 아침. 퀸 사이즈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던 실비아는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깼다. 쿵쿵거리는 소리의 출처는 천장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거실로 나온 그녀는 세비스가 파자마 차림으로 고개를 치켜든 채 돌아다니는 걸 발견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리지.”
“음, 아마도 윗집에서 출근 준비를 하나 봐.”
“윗집요? 윗집 발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린다고요?”
세비스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실비아는 현생에서도 층간 소음을 경험해 본 적이 있어 익숙하지만 세비스는 아닌 듯했다. 늑대 왕국에 아파트가 있진 않을 테니 아마도 늘 단독 주택에서 살았으리라. 그는 충격받은 얼굴로 관자놀이를 주무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설마 매일 이러는 건 아니겠죠?”
“매일일걸. 이런 다층 건물에선 층간 소음이야 일상이야. 예상은 했다만 그래도 좀 심하긴 해.”
“이걸 어쩐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세비스가 주방으로 가더니 요란스럽게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잠이 다 깨 버렸기에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하고 나왔다. 씻고 나와 보니 거실에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녀는 코를 킁킁대며 세비스에게 다가갔다.
“이건 무슨 요리야? 엄청 달콤한 냄새가 나네.”
“핫케이크요. 어제 가구 보러 갈 때 장도 같이 봤거든요.”
세비스가 접시에 있던 핫케이크를 잘라 포크로 집어 실비아의 입에 넣어 주었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그녀는 혀가 녹아들 것만 같았다.
“음, 맛있다.”
“잠시만요.”
세비스는 방에 들어가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러더니 식탁에 올려 둔 핫케이크 접시를 들곤 밖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어디 가는 거야?”
“층간 소음을 평화롭게 해결해 보려고요.”
“아!”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린 세비스가 씩씩한 발걸음으로 나가자 실비아가 얼른 뒤따라갔다. 이사 기념 떡을 돌리듯이 핫케이크를 주면서 조용히 해 달라고 양해를 구하려는 듯했다.
비상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간 세비스는 실비아네 집 바로 위 호수 앞에 섰다. 그들은 선뜻 노크를 하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쾌하고 요란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안에서 대체 뭘 하는 걸까?”
“출근 준비를 하는 것치곤 상당히 시끄럽네요.”
둘이서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허이, 허이!’,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 마저 쉬고 원 투 쓰리 포.’ 같은 수상한 구호를 외치는 게 들렸다. 잠시 음악이 꺼진 사이에 세비스가 노크를 했다.
똑똑- 노크를 해도 묵묵부답이기에 쾅쾅-거리며 두드리니 안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땀에 흠뻑 젖은 에어로빅 차림의 할아버지가 나왔다.
“누구세요?”
“아! 안녕하세요. 아랫집에 이사 온 사람인데요. 인사를 좀 드리려고요.”
싹싹하게 인사하는 세비스를 멀뚱히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거, 아랫집에 이사 온 신혼부부라는데?”
“그래? 냉큼 들어오라고 해!”
“들어들 와!”
‘신혼부부라고 한 적 없는데!’
<안쓰러운 새댁>의 버프인지 할아버지는 실비아와 세비스를 당연히 신혼부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세비스에게 입 모양으로 어쩌냐고 물었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실비아는 당황했지만, 해명은 일단 나중에 하기로 하고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