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실비아의 본체 사주엔 망신살이 들어 있어서 현생에서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랬다. 그건 게임 세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기 온 후로 망신살 안 뻗치는 날이 없어!’
혀를 쯧, 하고 찬 실비아는 마지막 단락 ‘타고나야 한다.’를 흐린 눈으로 넘기고 적성 검사 기출 문제를 빠르게 훑었다. 현생에서 프리랜서라고 해도 친구들이 보는 기출 문제집을 옆에서 가끔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과는 유형이 달라 보였다.
‘게임 속이니 현실의 기업 적성 검사랑 똑같은 게 이상하긴 하지.’
이건 뭐 어떻게 한다 치고, 면접 스터디를 어디서 당장 구한담? 지끈거리는 머리를 주무르던 실비아가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구할 수 없다면 만들면 된다. 세비스에게 모의 면접관 역할을 하라고 하면 될 것이다. 해결책을 생각해 낸 실비아는 다시 공부에 몰두했다. 머리에서 김이 펄펄 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던 실비아는 잠시 휴식을 취하며 눈을 감았고 그렇게 깜빡 졸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단잠을 자던 실비아는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번쩍 눈을 떴다.
“실비아 님! 공부하고 계셨나 봐요?”
“…어? 세비스!”
입가에 흐르는 침을 훔치며 벌떡 일어나 보니 어느새 창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숙소 밖으로 나온 둘은 치킨집으로 들어갔다. 고소한 프라이드치킨을 뜯으며 둘은 오늘의 성과를 각자 보고했다.
“…그래서 다음 주 수요일부터 황실 타코야키 요리사가 되기로 했어요. 행사 때를 제외하고 평소엔 하루 3시간만 구우면 된다네요. 월급도 세고 휴가도 황실 행사 때만 피하면 원할 때 쓸 수 있대요. 이런 파격적인 조건은 쉽게 구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타코야키를 황실 사람들이 엄청 좋아하나 봐?”
“글쎄요. 없는 수요도 만들어 내는 게 진정한 장사꾼 아닐까요.”
노련해 보이는 세비스의 말에 실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괄목상대라고, 실비아는 자신이 보물섬에 간 사이에 세비스도 많이 성장한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살림만 할 때도 보통내기는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지금 보니 이 일 아니었으면 진작에 거상이 됐을 애였다.
‘옛날 말로 어딜 가도 처자식은 안 굶기겠어. 결혼하면 아주 든든한 늑대 가장이 되겠네.’
세비스가 정상적으로 늑대 왕국에서 살았다면 그는 일등 신랑감이었을 거다. 그녀는 세비스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잠시 떨어져 있던 사이 세비스는 전체적으로 더 성숙해졌는데, 전에는 귀엽기만 했다면 지금은 얼핏 보면 어른 남자로 보일 정도였다. 이목구비도 한층 날카로워지고 어깨도 옆으로 넓어졌다. 다 자란 건가? 실비아는 궁금증을 바로 해소하기로 했다.
“너, 혹시 성체가 된 거야?”
“네? 아뇨. 성체가 되면 이것보다 훨씬 체격이 커지는걸요.”
지금의 세비스는 길거릴 지나가면 웬만한 체격의 어른 남자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이보다 훨씬 커진다니, 다 자라면 노엘과 루카만 하거나 그보다 더 커질지도 모른단 소리였다. 세비스와 절대 싸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실비아는 다시 그의 취업을 축하했다.
“그래? 하여튼 잘됐다, 세비스! 인간 세계에서 첫 취직이네. 출근 날 축하 파티라도 열어야 할까 봐. 나도 다음 주에 엘리셔스 월드 인턴 모집에 지원하기로 했어.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오! 거기 입장료가 비싼 걸 보니 돈도 많이 줄 것 같아요. 합격하실 거예요. 실비아 님이 떨어지면 누가 붙겠어요!”
세비스가 자신을 추켜세우자 기분이 좋아진 실비아는 점원을 불렀다. 좋은 날 음주가 빠질 수 없었다. 세비스는 술을 싫어했기에 맥주 한 잔과 레모네이드를 하나 시켰다. 술독으로 죽어서 웬만하면 술을 자제하는 편인 실비아지만 치킨 앞에서 맥주를 참긴 무리였다.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고 ‘캬아!’ 하며 기분 좋게 얼굴을 찡그린 실비아는 세비스가 건네준 닭 다리를 받아 신나게 뜯었다.
“이거지, 이거야. 아 참! 던전은 알아봤어?”
“네. 주변이 다 시가지인지라 던전이 있을까 싶었는데, 기운을 가만히 느껴 보니 있긴 있더라고요. 음, 일단 찾아낸 건 여기서 20분 거리에 폐교랑 굴다리 밑에 있는 던전이에요.”
의외의 장소에 실비아의 닭 다리 뜯기가 잠시 멈췄다가 재개됐다. 해안 던전을 생각하면 도시 안에 던전이 있단 게 생소했지만, 메인 던전들이 있었던 장소들을 떠올리면 안 될 것도 없었다.
‘어차피 오염된 기운에 당하면 다 던전화가 되는 거니까, 뭐.’
던전은 인턴십 지원 결과가 나오면 가 보기로 하고 그들은 우선 가장 급한 것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실비아가 림보를 찾기 위해 전단지라도 뿌려 볼까 제안했지만 세비스가 고개를 저었다.
“한꺼번에 다 할 수 없어요. 우선은 집 구하기랑 인턴십에만 집중하죠.”
“그래. 욕심 같아선 다 하고 싶지만 몸뚱이는 한 개니까.”
그것도 그렇고 전단지를 뿌린다고 림보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직원 말대로라면 림보는 높은 신분의 사람을 저 좋다고 따라간 거니까 말이다.
“휴, 림보를 만나서 오해를 풀고 싶긴 한데 또 좋아서 따라갔다니 찾는 게 맞나 싶고…. 슬퍼지네.”
“산 사람은 살아야죠.”
“림보가 죽은 건 아니잖아.”
림보를 떠올리니 실비아는 입안이 썼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거품만 남은 맥주잔과 뼈만 남은 치킨 바구니를 테이블에 두고 배를 두드리며 일어났다. 그 뒤를 세비스가 안쓰럽게 바라보며 따라갔다.
* * *
아침 일찍, 제국민 센터에 도착한 실비아네는 이른 시간부터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보며 입을 벌렸다. 그들은 어떤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제대로 물어보기 위해 순번표를 뽑아 순서를 기다렸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센터 직원이 그들을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일단 어떤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자 직원이 두꺼운 안내 책자를 하나 건넸다. 머리를 맞대며 책자를 읽은 둘은 깜짝 놀랐다. 황실 복지 혜택이 완전 파격적이었다.
하루에 지정된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무료 같은 자잘한 혜택부터 황궁 앞뜰에서 나눠 주는 무료 빵과 서커스 무료 입장권까지. 의식주는 물론이고 놀 거리까지 다양한 복지를 누릴 수 있었다. 가볍게 휘파람을 분 세비스가 실비아의 귓가에 조그맣게 속닥거렸다.
“진작에 오두막집을 부술 걸 그랬나 봐요.”
“그러게. 복지 혜택만 잘 챙겨도 굶어 죽진 않겠네.”
복지 혜택들은 차차 누리기로 하고 우선은 집이 먼저였다. 이것저것 집 구하기에 대해 자문을 구한 결과 혜택을 최대한 보려면 외곽의 주택보다는 중심지의 아파트에서 사는 게 맞단 결론에 다다랐다. 엄밀히는 그냥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높은 층수의 건물이었는데, 실비아는 직원이 설명하는 건물이 현생의 아파트와 같다고 느꼈기에 이 건물을 아파트라 부르기로 했다.
말이 있어서 마구간이 필요하다고 하자 직원은 말을 키울 수 있는 곳 위주로 소개시켜 주었다. 알려 준 건물은 마구간은 없지만, 오두막집 안에서 림보를 길렀던 것처럼 거실에서 말을 키우는 제국민이 가끔 있어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진작 물어볼걸. 어차피 실비아와 세비스는 도심지에서 일을 할 것이기에 외곽에서 집을 구하면 곤란했다. 첫날에는 범위를 넓히는 바람에 괜히 헛고생을 했다. 둘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혜택증을 발급받고 전셋집을 계약했다.
방 두 개에 거실과 주방이 가림막으로 나눠진 집이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욕실이 두 개나 있단 거였다. 전세금은 300만 골드로 예산보다 밑이었다. 부동산업자의 말론 수도 중심지의 집은 원래 이 가격에 구할 수 없지만, 복지 혜택을 받아 싸게 계약하는 거라고 했다.
‘어쩐지 오두막집이 부서지고 나니 일이 술술 풀리네. 터가 안 좋았나.’
잠시 집터 탓을 한 실비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 오두막집에 사는 동안 림보도 생기고 노엘이랑 루카도 공략했으니 좋은 게 좋은 거였다. 고작 한 달 정도지만 많은 추억을 만들었던 오두막집을 마지막에 못 살펴보고 온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시간 날 때 한번 들르지, 뭐. 이제 새로운 시작이야!’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새 보금자리에서 더 열심히 게임을 공략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삿짐센터는 안 부르셔도 되나요?”
“네! 괜찮아요. 짐이 없거든요.”
짐이 없는 그들은 계약한 당일 입주를 했다. 이삿짐센터가 필요 없단 말에 부동산업자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 눌렀다. 그는 피크닉 가방 하나 덜렁 든 실비아네를 안쓰럽게 봤는지 저렴한 가격에 세간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어디서 왔냐는 그의 말에 촉촉한 눈빛을 한 세비스가 ‘오두막집이 부서지는 바람에 먹고살 길을 찾아 수도로 올라왔어요. 죽으란 법 있나요. 어떻게든 살아지겠죠.’라고 한숨 쉬며 말한 것도 한몫했다.
가구를 집으로 옮기는 것도 도와준 부동산업자는 마지막으로 ‘힘내서 살아. 나 젊을 때 보는 것 같네.’라고 말한 후 파이팅 자세를 취하며 뒷걸음질 쳐 나갔다.
“센터 직원도 그렇고 부동산업자도 그렇고 수도 사람들 중에 맘씨 좋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네요.”
“그러게. 마음이 훈훈해졌어.”
가슴에 양손을 고이 모은 실비아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잠깐, 그러고 보니 아까 전세 계약할 때 메시지 효과음이 들렸던 것 같은데.’
기록 창을 켠 그녀는 세간의 평가가 바뀐 걸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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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는 수도에서 살게 되었다. 세간의 평가가 <측은한 우리 마을 떠돌이>에서 <안쓰러운 새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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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로 이사 오는 바람에 세간의 평가가 바뀐 것이다. 그녀는 무심코 메시지를 읽다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새댁이란 평가가 붙다니,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너무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세간의 평가는 실비아가 마주친 사람들의 머릿속 생각을 취합해서 키워드를 생성하는 게 틀림없었다. 얼핏 보기에 성인 남자로 보이는 세비스와 함께 집을 구하러 다니는 그녀를 보고 모두 새댁이라고 생각한 걸 터였다.
‘그래도 그렇지, 새댁이라니. 이러면 곤란한데.’
남주들을 아직 세 명이나 더 공략해야 하는데, 세간의 평가가 이딴 식이면 오해를 살지도 몰랐다. 그녀는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안쓰러운 새댁>을 터치해 상세 설명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