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너를 만났으니 이제 여기 있을 필요가 없지만….』
“없지만?”
고개를 갸웃하던 블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도 여기 온 후로 내 폴리모프 마법이 풀리질 않아. 그걸 해결하기 전엔 밖으로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아. 왜일까….』
“왜 그런 거지.”
폴리모프가 안 풀린다니, 절망적인 소리였다. 물개랑 대체 뭘 할 것인가. 순간 위험한 영역에까지 생각이 미쳤던 실비아는 소스라치며 머리를 흔들었다. 안 좋은 상상으로 그녀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머리를 굴려 봤지만 뾰족한 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블루와 실비아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디선가 빗자루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쿠아리움이 곧 문을 닫을 것 같아 그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럼 우선은 여기 계속 있는단 거지? 조만간 다시 들러서 그 문제를 같이 고민하자. 그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해!”
아쉽지만 지금 상태에선 말은 걸 수 있어도 공략은 할 수 없었다. 그래도 호감도가 애초부터 50이나 채워져 있다니 아주 굿이었다. 그녀가 작별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리자 블루가 급하게 불러 세웠다.
『꼭 다시 와야 해. 어디 안 가고 여기 있을 테니까!』
“응응. 꼭 다시 올게.”
『꼭 와야 해! 너랑 친해지고 싶어!』
블루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실비아는 말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난 너랑 섹스 하고 싶어! 조만간 공략하고 말겠어!’
그 순간 조련사가 문을 열고 나왔고 ‘파돌아!’ 하면서 블루를 불렀다. 헤엄쳐 조련사에게 다가가던 블루는 사이사이 실비아를 돌아보며 애타게 외쳤다.
『실비아, 다시 와야 해! 기다릴 거야!』
여러 번 같은 말을 반복하는 블루의 모습이 절실해 보였다. 조련사를 힐끗 보니 그는 블루의 말을 아예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파돌아, 왜 아직 여기 있어?’라고 하며 블루의 등허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수상한 사람 보듯이 실비아를 힐끗 봤다.
“물개가 너무 귀여워서 잠시 놀아 줬어요. 죄송합니다!”
허리를 숙여 사과한 실비아는 급하게 계단으로 내려갔다. 세비스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얼른 밖으로 나가야 했다.
삼삼오오 즐겁게 떠드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아쿠아리움 입구. 세비스는 멍한 눈으로 건물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실비아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실비아와 떨어져 지내던 며칠 새에 키가 좀 자랐는데, 소년티가 나는 얼굴을 빼면 성인 남자라고 봐도 무색할 정도였다. 늑대족의 성체는 이보다 훨씬 덩치가 크지만, 인간 기준에서는 그랬다.
그는 크라켄과 함께 오두막집으로 돌아가고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는 동안 제 주인에 대한 마음을 한동안 접기로 결정했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집도 부서지고 실비아와 며칠간 떨어져 지냈기에 냉정하게 상황을 돌아볼 수 있었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서야 안 될 일이었다.
‘그리고…. 주인님이 알게 되면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으니까.’
그녀가 부담스러워한다면 가슴 아플 것 같았다. 또한 던전 공략을 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될 텐데, 그때마다 붉은 머리와 노엘을 만났을 때처럼 질투를 할 순 없지 않겠는가. 지나고 나서 보니 실비아가 그런 제 모습을 보며 곤란해했던 것 같았다. 주인이 쓸데없는 데 신경 쓰게 해 폐를 제대로 끼친 셈이었다.
그의 다짐은 실비아가 혼자서도 던전 공략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돌아오면서 더 단단해졌다. 역시 신이 선택한 사람은 다르단 사실을 세비스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신탁대로 옆에서 돕는 게 그의 일. 그녀를 처음 봤을 때처럼 순수하게 옆에서 도우며 자신의 감정은 한동안 잊고 지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실비아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세비스! 나 왔어.”
“이제 갈까요.”
팸플릿에 적힌 대로라면 놀이공원은 밤 9시까지 운영했다. 1인당 5만 골드로 총 10만 골드의 어마어마한 지출이 있었기에 잠시 좀 놀다 갈까 싶은 충동도 들었지만 할 일이 많았다. 그들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얼른 놀이공원을 나왔다.
놀이공원 근처에는 관광객을 위한 숙소가 많았고 그들은 곧 깔끔한 호텔 하나를 찾아 체크인했다. 잠시 세비스와 실비아를 힐끗 바라본 주인은 아무 말 없이 키를 건네주었다.
‘이제 세비스가 남들 눈에 어른으로 보이나 보네.’
며칠 전과 달리 실비아의 눈에도 그가 자란 게 보이긴 했다. 여전히 얼굴은 소년티를 채 벗지 못했지만 못 본 새에 키가 껑충 자라서 꽤 성숙해졌다. 공략 창은커녕 <동정 레이더>가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아직 성체는 아닐 듯하지만.
‘뭐, 딱히 아니라도 상관없긴 하다.’
‘크라켄 사건’ 이후로 실비아는 세비스에 한해서 변태 같은 생각을 안 하게 됐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소중한 가족 같은 사람을 두고 야릇한 생각을 하는 변태가 있다면 당장 지옥으로 떨어져야 할 것이다.
“504호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키를 받은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예산이 풍족한 덕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괜찮은 숙소를 잡을 수 있어 좋았다. 앞으로 살 집을 급하게 구했다간 후회할 수도 있었기에 한 3일 정도 호텔에서 묵으며 천천히 집을 찾기로 했다.
“우리 집보다 깔끔하구나. 이것보다 더 큰 집을 얻을 수 있겠지?”
간단하게 샤워를 한 실비아가 상쾌한 표정으로 잠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무너진 오두막집과 달리 트윈 룸인 숙소는 테이블까지 완비된 조그만 테라스가 딸려 있었다.
그녀보다 먼저 샤워를 했던 세비스는 언제 나갔다 왔는지 숙소 밑 상점에서 간단한 음식을 사 가지고 와 테라스에 있는 테이블에 펼쳤다.
“실비아 님, 저녁 먹으면서 얘기하죠.”
“그래. 맛있겠다.”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니 수도의 밤 풍경이 근사하게 펼쳐졌다. 멀리 시선을 던지니 밝은 불빛이 깜빡이는 다리가 강을 가로지르고 그 다리 밑으로 알록달록한 전등을 단 유람선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길가에 가로등도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마차들마다 전등을 달고 다녔다. 그래서 밤인데도 불구하고 도시 전체가 밝게 반짝였다. 엘리셔스의 수도는 현대랑 달리 자동차가 아닌 마차들이 다니지만 의외의 신식 문물도 꽤 갖추고 있었다. 마치 산업 혁명 시대의 영국 같았다. 실비아는 현생에서 영국을 가 본 적은 없지만, 그냥 이미지가 그랬다.
식사하면서 둘은 여러 가지를 의논했다. 집도 집이지만 앞으로 뭘 할 것인지 제대로 정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내일 아침부터 함께 집을 알아보고 그 후에는 각자 흩어지기로 했다. 세비스는 주변 지리를 살피며 던전 정보를 얻고, 실비아는 아르바이트를 알아보며 섬에서 얻은 구슬을 팔고 돌아오는 게 내일의 계획이었다.
“림보는 당장 찾을 수 없으니 우선 수도에서 자리 잡는 것부터 해 봐요.”
“그래.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집이랑 일자리부터 구하고 림보를 찾아보도록 하자.”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세비스의 말이 이어졌다.
“집을 구한 뒤에는 저도 간단한 아르바이트를 찾아봐야겠어요. 아니면 황실 타코야키 요리사 제의를 다시 한번 고민해 보고요.”
“아, 맞다. 타코야키 기술이 있었지. 황실 전속 요리사? 거기 취직하면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직업이 되는 거 아냐?”
실비아보다 먼저 식사를 마친 세비스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댄 채 턱을 괴었다.
“글쎄요. 당장 제의가 들어왔을 땐 생각이 없어서 바로 거절했는데, 수도에 왔으니 조건이나 한번 들어 보려고요. 시간이 짧으면 받아 주겠다고 한번 제시를 해 볼까 싶어요.”
“그래. 그거 아니라도 넌 어디서든 환영받을 거야.”
세비스는 요리를 잘하고 성격도 야무지니 어느 곳에서나 쌍수 들고 환영할 터였다. 거기다가 폐쇄적이었던 바닷가 마을과 달리 이곳은 머리에 귀가 달린 수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녔기에 종족 차별도 없는 듯했다. 세비스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수인 얘길 하면서 진작에 수도를 왔어야 했다며 신세계라고 좋아했다.
실비아도 곧 식사를 마쳤다. 간편 식품이었기에 설거지를 안 해도 되는 거 하난 좋았다. 둘은 각자의 침대에 누워 한참을 떠들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쳐 곯아떨어졌다.
* * *
다음 날 아침. 둘은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부동산업자를 찾아갔다. 세비스도 실비아도 살짝 긴장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세비스는 인간 세계에 내려와 찾은 첫 번째 집이 폐가라 부동산 경험이 전무했고 실비아는 현생에서 부동산 사기를 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비아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20대 초반 때 원룸을 대충 살펴보고 공인 중개사의 입바른 소리에 홀려 계약했었다. 막상 입주하니 부엌에 환풍기가 없었고 고쳐 달라는 건 하나도 안 고쳐 놨으며 어련히 놔둘 줄 알았던 가구는 계약서에 안 적어 놨다고 다 빼 갔다. 심지어 집에 들어오자마자 멀쩡한 줄 알았던 벽에는 곰팡이가 슬고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 거기다 위에선 쿵쿵거리지, 옆에선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지, 밤마다 바퀴가 자장가를 속삭이며 함께 잠드는…. 그런 사회 초년생의 슬픈 경험이 있었다.
“어떤 집을 원하십니까?”
부동산업자는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신사였는데 이조차 바닷가 마을의 친근한 상인들과는 외양부터가 달라서 긴장됐다. 실비아와 세비스는 서로의 팔짱을 낀 채 부러 고개를 뻣뻣하게 들곤 얕보이지 않으려 몸을 부풀렸다.
“일단은 방이 두 개였으면 좋겠고요. 너무 변두리는 아니었으면 하네요.”
“아, 거기다가 마구간도 있었으면 좋겠고요. 반려 말이 한 마리 있는데 잠시 어디 맡겨 놨거든요. 외제마요!”
세비스가 부러 외제마를 강조하자 업자의 낯빛이 밝아졌다.
“호오, 외제마를 가지고 계세요? 마구간 있는 집이면 여기에 많죠. 예산은 어느 정도 가지고 계세요?”
업자가 지시봉으로 벽에 걸린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실비아는 예산을 묻는 업자의 말에 솔직하게 말하려다가 옆구릴 치는 세비스 때문에 멈칫했다.
‘아, 맞아. 괜히 솔직하게 말했다간 눈탱이 맞기 십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