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안녕하세요. 저기, 혹시 아직 입장 가능한가요?”
“폐관 시간이 30분 채 남지 않았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치사하게도 말 농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별도의 입장료가 필요했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일 인당 2천 골드를 지불한 둘은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말 농장 입구에 있는 말똥 과자나 말똥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을 급하게 스쳐 지나간 둘의 눈앞에 나무 우리를 빙 두른 초록빛 동산이 나타났다.
제주도에나 있을 것 같은 푸른 초원이 펼쳐진 낮은 동산이었다. 그곳을 말들이 신나게 오르락내리락하며 놀고 있었다.
관람객들이 먹이를 구매해 말들에게 주거나 체험 값을 지불하고 안에서 승마를 즐기는 게 보였다. 실비아는 먹이를 파는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혹시 여기에 베이지색 외제마 새로 들어오지 않았나요?”
“베이지색요?”
“네, 이가 촘촘하게 나 있고 웃을 때 조금, 음…. 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웃을 때 조금 재수 없는 말, 혹시 못 보셨어요?”
실비아가 머뭇거리자 세비스가 거침없이 림보의 특징을 설명했다. 직원이 쓰읍, 하면서 목장 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하기 곤란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베이지색 말이 어제 들어왔다가 바로 나가긴 했는데. 웃고 있진 않았지만, 때깔을 보니 외제마 같긴 했어요.”
“정말요? 근데 나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직원은 잠시 그들을 힐끗 보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외려 질문을 던졌다.
“근데 그 말이랑 무슨 관계세요?”
“가족인데요.”
“예? 말이세요? 푸흡!”
실비아네가 묵묵부답으로 낯빛을 굳히자 직원이 뻘쭘하게 웃더니 주위를 둘러보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쉽게 말하긴 좀 어려운데….”
역시 눈 감고 코 베어 가는 수도! 이놈이나 저놈이나 돈을 뺏어 가려고 혈안이었다. 세비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허리 가방에서 돈을 꺼내 건네자 그가 충격적인 소릴 해 왔다.
“그 말은 어제 어떤 좋은 분이 데려갔어요. 한눈에 봐도 혈통이 좋은 말인지라 다들 눈독 들이긴 했었죠.”
“누가 데려갔다고요? 세상에! 그게 누군데요.”
“죄송합니다. 그것까진 제가 알려 드릴 수 없네요.”
“뭐라고요?!”
돈을 받아 놓고 아주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화가 난 실비아가 그럴 거면 받은 돈 다시 토해 내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자 당황한 직원이 어물쩍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어서 그래요. 받은 돈의 반은 다시 돌려 드릴게요. 혹시나 잘못되면 제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어서요.”
직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주머니에 넣은 돈 중에 반을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곤란해하는 낯빛을 보니 림보를 데려간 사람이 보통 사람은 아닌 듯했다. 실비아가 ‘으아! 림보, 네가 없으면 난 살 이유가 없어.’ 하면서 나무 말뚝에 이마를 쾅쾅 박자 경악한 직원이 급하게 말렸다. 역시 자해 공갈은 최고의 설득 방법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한 가지 정보를 더 말해 주었다.
“누군지 말씀드릴 순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놀이동산에 한 달에 한 번쯤은 들르신다는 겁니다. 그때 그 웃는 게 재수 없는 말을 데리고 오실 수도 있죠.”
“웃는 게 재수 없는 게 아니라 베이지색 귀여운 말이라고요! 으아아!”
“여기까지. 더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실비아가 재차 공갈 협박을 위해 말뚝에 머리를 박았지만, 직원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세비스가 따졌다.
“그런데 누구 말인 줄 알고 함부로 데려가게 놔둔 거예요? 말의 자유는 보장해 줘야죠.”
“누구 말이냐니요. 그럼 왜 말이 도망간 건가요? 그것도 말의 자유죠.”
기가 막힌 소리였다. 그러나 틀린 말도 아니라서 말문이 막힌 실비아네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말이 너무 심했나 싶어 미안해진 직원이 마지막이라며 한마디 말을 더 해 주었다.
“말은 억지로 끌려간 게 아닙니다. 시종일관 미소 지으면서 즐겁게 그분을 따라갔어요. 안된 일이지만 이제 그 말은 잊어요.”
“아, 말도 안 돼. 좋아서 따라갔을 리가 없어요.”
그녀가 말뚝을 붙잡은 채 꺼이꺼이 우는 소릴 내자 직원이 황급히 말렸다. 그러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을 얹었다.
“잇몸 다 보이도록 활짝 웃으면서 갔습니다.”
절망적인 말이었다. 말이 잇몸이 보이게 활짝 웃으면서 갔다니 그게 말이란 말인가! 더 이상의 추궁은 의미 없다고 판단한 실비아와 세비스는 힘없이 말 농장을 나왔다. 그들이 나오자마자 ‘셔터 내립니다.’라는 소리와 함께 말 농장의 문이 닫혔다.
“즐겁게 따라갔다니. 새로운 좋은 주인을 찾은 걸까. 직원의 태도를 보니 엄청 부자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데려갔나 봐. 나랑은 비교도 안 되는 사람 말이야.”
실비아가 낙담하며 고개를 숙이자 세비스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대로 림보를 찾는 건 포기하실 건가요?”
“…휴, 어떻게 할까.”
“직원의 말이 사실인지도 모르고 혹시 사실이라고 해도 오해는 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실비아가 어두운 얼굴로 침묵하자 그의 설득이 이어졌다.
“만약 억지로 끌려간 건데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 직원이 거짓말한 거면요? 아니면 처음엔 좋아서 따라갔지만, 막상 림보가 거기서 고생하고 있으면 어떡해요.”
“그건 그렇네. 그럼 어떻게 찾지?”
“우선은 날이 어두워졌으니 하루 머물 숙소를 잡도록 해요. 내일 일은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봐요.”
실비아가 많이 지쳐 보였기에 세비스는 더 이상 머리가 복잡해지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놀이공원 출구로 터덜터덜 향해 가던 둘은 하얀색 커다란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건물의 입구엔 만면에 웃음을 띤 관람객들이 들떠서 입장 줄을 선 게 보였다. 입구에는 ‘아쿠아리움, 본 적 없는 희한한 해양 생물들!’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세비스는 우울해하는 실비아를 끌고 그 입장 줄에 억지로 섰다. 좋은 구경을 하면 그녀의 기분이 나아질 거란 판단에서였다. 그들은 입구에서 돌고래 모양 쿠키를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비아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건물 벽 사면이 모두 수족관이었다.
실비아는 현생에선 한 번도 아쿠아리움을 가 본 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에는 소풍을 가도 바다에서 노느라 아쿠아리움 구경을 놓쳤었고, 어른이 되고 나서는 딱히 갈 생각이 없어 방문을 하지 않았었다. 게임 세계에 와서야 아쿠아리움을 보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엄마! 이거 너무 신기해.”
“얘는 가오리란다. 무쳐 먹으면 술안주로 최고지.”
“으앙! 그런 말 하지 마.”
이상하고 재밌게 생긴 생물들이 헤엄을 치는 수족관을 구경하고, 앞에 선 가족들의 화목한 대화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니 실비아의 기분이 차츰 나아졌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오른 걸 보며 세비스의 기분도 좋아졌다.
첫 번째 방을 지난 관람객들은 소형 마이크를 턱에 건 직원의 해설을 들으며 다음 방으로 나아갔다. 물기가 있는 파란 계단을 밟고 올라가니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보는 장소가 나왔는데 돌고래 쇼를 하는 곳 같았다.
“여기서 10분만 대기하고 계시면 진귀한 쇼를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모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재밌겠다.”
“그쵸? 저기요! 오징어 하나만 주세요.”
세비스는 관람객들 사이사이를 지나며 주전부리를 팔던 상인에게 구운 오징어를 샀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찢어 실비아의 입에 넣어 주었다. 가만히 입을 빌려 받아먹던 실비아는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고 꿀꺽 삼킨 뒤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제 기분 좋아졌어. 비위 맞추는 거 그만해. 민망하네.”
“기분 좋아졌어요? 그럼 됐어요.”
얼굴을 살짝 붉힌 실비아를 바라보며 세비스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잠시 뒤 경쾌한 음악 소리와 함께 쇼가 시작됐다. ‘엉엉!’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무대 뒤편의 조그만 문이 열리며 물개들이 튀어나왔다. 근데 놀랍게도 그중 한 물개의 몸이 새파랬다. 놀란 건 실비아네만이 아닌지 관람객들이 웅성거렸다.
“어머, 저게 뭐야? 파란 물개네.”
“그러게. 저런 앤 처음 본다. 엄청 예뻐.”
눈이 휘둥그레진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쇼에 집중하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고무장화와 고무 앞치마를 입은 조련사가 소형 마이크를 낀 채 물개들을 소개했다.
“저희 아쿠아리움의 귀염둥이들입니다. 참 귀엽죠? 인사!”
그러자 물개들이 조련사의 말을 알아들은 듯 ‘엉엉!’거리며 고개를 꾸벅거렸다. 옹기종기 모여서 인사하는 모습이 귀엽기 짝이 없었다. 파란 물개는 어쩐지 좀 시큰둥한 얼굴로 대충 꾸벅거렸다.
‘내가 좀 많이 피곤한가? 물개가 시큰둥한 얼굴이라니. 말도 안 되지!’
조련사는 자랑스럽게 물개들을 쳐다보더니 소개를 이어 갔다.
“그리고 모두 궁금해하시는 저희 아쿠아리움의 새 식구! 오늘 갑자기 들어왔어요. 파돌이를 소개합니다!”
파란 물개는 조련사를 힐끗 보더니 모로 고개를 기울여 대충 끄덕였다. 그래도 관람객들은 좋아 죽었다. 실비아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이 쇼가 끝나면 빨리 잠부터 자야겠어. 물개가 좀 이상하게 보여.’
똑똑한 물개들은 여러 가지 재미난 쇼를 보여 주었다. 관람객들은 깔깔거리며 즐겁게 쇼를 감상했다. 그러나 실비아는 점점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파란 물개와 계속 눈이 마주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분 탓이려나 싶어 딴 곳을 일부러 보고 있으면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심지어 대놓고 같이 째려봐 주니 앙큼하게 윙크까지 해 오는 게 아닌가!
“으, 세비스. 이거 끝나면 얼른 집에… 아니 숙소에 가자. 자꾸 허깨비가 보여.”
“무리도 아니죠. 낮부터 지팡이를 짚고 계셨잖아요. 림보 찾는다고 쉴 틈도 없었고. 이 쇼 끝나고 바로 나가요.”
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조련사와 물개 일동이 관람객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였다. 어느새 물개 쇼가 끝난 것이다. 바글바글한 관람객들의 행렬 끝에 서 있던 실비아는 ‘엉엉!’ 하고 크게 우는 소리를 듣고 무심결에 무대를 바라봤다. 파란 물개가 실비아를 정확히 바라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