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잠시 웃던 그녀는 순간 루카와 아직 공략하지 않은 드래곤남을 떠올리고 입술을 말아 물며 고민했다. 수도로 옮기면 둘을 못 보지 않나? 노엘 님은 수도에 한 달간 머무르고 있다고 했으니 림보를 찾고 나서 연락해 보면 될 테지만 나머지 둘은 바닷가 마을에 있을 텐데.
“실비아 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응? 아…. 바닷가 마을에 나름 정이 들었었는데, 이대로 떠나기 아쉬워서. 신전에도 신세를 오래 져서 가끔 가 봐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그녀의 걱정에 세비스가 잠시 마부석에 있는 조그만 창문을 열어 마부에게 뭐라 뭐라 묻더니 실비아를 안심시켰다.
“외제 마를 타면 수도에서 바닷가 마을까지 1시간도 안 걸린다는데요? 가고 싶으시면 림보를 타고 가시면 되죠.”
“와! 그것참 다행이네. …에효, 림보를 찾아야 그게 다 가능한 일이지.”
“꼭 찾을 테니 걱정 마세요. 우선은 새집 구할 생각이나 하자고요. 수도라니! ‘말과 사람은 모두 엘리셔스 수도로 보낸다’란 말이 있죠. 너무 신나요!”
개발자가 속담도 이상하게 바꿔서 게임 세계에 주입 시켜 놓았나 보다. 어색하게 웃은 그녀는 좋은 생각만 하기로 했다. 수도, 수도에 전셋집을! 비록 전세긴 하지만 마을 구석의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 아닌 번화가에서 집을 얻어 살다니 꿈만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실비아는 근육통도 잊고 잠시 의자에 앉아 방방 뛰다가 꼬리뼈가 아려 와 관두었다. 하지만 즐거운 생각을 했더니 몸의 통증도 차츰 가시는 기분이었다. 눈이 반짝반짝해진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세비스와 함께 미래의 청사진을 그렸다.
* * *
“도착했습니다.”
끼익- 하고 마차가 서는 소리와 함께 실비아는 잠에서 깨어났다. 신나게 떠들다가 지쳐 잠든 사이에 수도에 도착한 것이다. 입가에 흐르는 침을 누가 볼세라 얼른 훔친 그녀는 먼저 내린 세비스가 내미는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안에서 한숨 자서 그런지 상태 이상 <영광의 상처> 버프가 사라져 몸이 가뿐해졌고 목소리도 다시 돌아왔다. 지팡이를 마부에게 기부한 그녀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제자리에서 껑충 뛰었다.
“우와!”
몸이 다시 멀쩡해져 기분이 좋아진 실비아는 고개를 들었다가 보이는 광경에 탄성을 내뱉었다. 게임 세계에서 처음 보는 휘황찬란한 광경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역시 수도는 수도였다. 상앗빛 혹은 검은색으로 빛나는 대리석 건물들이 쫙 늘어서 있었다. 간간이 금색으로 빛나는 건물들도 보였는데 바닷가 마을에 익숙해져 있던 그녀의 눈엔 생경한 풍경이었다.
길 건너편에는 정원이 딸린 대저택이 보였는데 입구부터 위엄 있는 조각상이 세워졌고, 가드들이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정원에서는 무슨 파티가 벌어지는 건지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든파티를 즐기며 주변을 왔다 갔다 하였고 그 사이로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입을 떡 벌리고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올려다본 건물들은 하나같이 층수가 장난이 아니었는데, 대충 어림잡아 10층은 되어 보이는 건물도 있었다. 물론 현생의 빌딩들처럼 고층 건물은 없었지만, 단층 위주의 바닷가 마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시선을 내리자 바닷가 마을의 비포장도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정돈된 포장도로가 쫙 깔려 있었다. 주로 흙길이었던 바닷가 마을과는 다르게 수도는 보행자 도로와 마차가 다니는 도로를 확실히 구분 지었다. 게임을 시작하고 바닷가 마을이나 한적한 지방만 돌아다녔던 그녀에겐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온 기분이었다.
빠앙-! 정신을 놓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한 발짝 앞으로 나갔다가 세비스가 급하게 잡아챈 덕분에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경적을 울린 마부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그녀에게 역정을 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녀! 멀쩡한 아가씨가 말이야.”
“죄송합니다!”
실비아가 허리를 꾸벅 숙이자 마부가 구시렁대며 마차를 다시 몰았다. 마차는 바닷가 마을에서 본 적 없는 고급스러움을 자랑하였는데, 몸체에는 기품 있는 문양이 조각되었고 앞머리에는 인어 조각상을 달고 있었다. 거기다가 말들의 때깔이 어찌나 좋은지, 림보만큼은 아니라도 최소한 그와 비견될 만한 고급 말로 보였다.
“확실히 수도는 수도네. 바닷가 마을이랑은 비슷한 구석이 하나도 없어!”
“와, 진짜 화려하네요. 저도 인간 세계는 바닷가 마을 말곤 여기가 처음인데 아예 두 곳이 다른 세상 같아요.”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방금 전 마차에 치일 뻔한 걸 떠올리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이제 보물섬 공략도 성공적으로 끝났겠다, 세이브를 해야겠다.’
계속 노 세이브 상태로 게임을 하다가 위험에 처하면 큰일이었다. 그녀는 시스템을 켜 게임을 세이브 했다. 이제 게임은 39일 차. 수도에서 새로운 시작이라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때, 세비스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손가락질했다.
“저것 봐요!”
“어디 어디.”
돌아보니 기사가 말을 탄 채 손을 번쩍 든 벽화가 다층 건물을 장식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것 외에도 온갖 진귀한 구경거리가 가득했다. 실비아와 세비스는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수도 구경을 했다.
둘의 순진한 모습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귀엽다는 듯 미소 지으며 바라봤다. 딱 시골 쥐가 서울에 상경한 꼴이었다. 한참 구경을 마친 둘은 진정하고 우선 눈앞에 보이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 음료를 마시며 계획을 짰다.
“근데 말 농장은 어딜까요? 마부가 말 농장까진 못 들어간다고 해서 가장 가까운 곳에 내려다 달라고 하긴 했는데.”
“그래? 근데 이런 화려한 수도 바로 옆에 말 농장이 있다니. 그럴 수가 있나?”
그녀의 현실 세계 상식으론 말 농장 같은 것은 변두리에 자리하고 있지 서울 한복판에 있을 수가 없었다. 마부가 사기를 친 게 아닌가 충분히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마차 번호 기억하고 있지? 이거 안 되겠어. 마차 회사에 연락해서 따져야겠네.”
실비아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씩씩댔다. 세비스가 그런 그녀를 말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뇨. 잠시만요. 카페 직원한테 한번 물어보고 올게요.”
카운터로 간 세비스는 직원이랑 대화를 하더니 ‘예? 정말요?’ 하고 크게 놀라는 소리를 냈다. 뭘 듣고 저렇게 놀란 걸까?
금방 자리로 돌아온 세비스가 직원에게 들은 말을 전해 주었다.
“말 농장이 이 근처라는데요? 세 블록만 가면 된다네요.”
“뭐어?! 여긴 무슨 도시 계획이란 게 없는 거야? 말 농장이 수도 한복판에 있는 게 말이 되나?”
“가 보면 알겠죠.”
둘은 얼른 직원이 말한 말 농장으로 가 보기로 했다. 마차를 타느라 상당히 시간을 허비한지라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말 농장 닫기 전에 빨리 가 보죠. 저녁 시간 되면 닫는대요.”
“그래. 얼른 가자.”
그들은 부지런히 걸었다. 그러나 주변 풍경이 전혀 한적해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화려해지는 게 아닌가. 시골에서 온 촌놈들이라고 카페 직원이 장난을 친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든 순간, 세비스가 우뚝 멈췄다.
“…설마 저긴가?”
“응?”
세비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실비아의 입이 떡 벌어졌다. 길 건너편에는 엄청나게 넓은 부지가 하나 있었고 그 뒤에 마치 마법의 성 같은 높고 뾰족한 첨탑이 여러 개 솟은 대형 건물이 위치해 있었다. 그 입구에선 인형 탈을 쓴 사람들이 어른들의 손을 잡고 온 아이에게 풍선과 머리띠를 하나씩 안겨 주는 게 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었다.
‘설마 놀이동산? 게임 세계에 놀이동산이 있다고?’
길을 건너간 둘은 부지 앞에 있는 색칠 된 푯말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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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셔스 월드!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이 가득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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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했더니 진짜 놀이동산인가 봐.”
“놀이동산요? 아, 인간 세계에 갔다 온 삼촌 말론 놀이동산이란 곳에서는 일부러 떨어지거나 공포에 질리는 걸 인간들이 즐긴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여긴가 보네요.”
번화가에 어떻게 말 농장이 있나 싶었더니 놀이동산 안에 있는 듯했다. 잠실 롯X월드를 생각하면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었다.
그들은 부지를 가로질러 놀이동산의 입구로 향했다. 시선을 내려 보니 부지 바닥에 구름 사이를 지나는 무지개와 커다란 익살스러운 캐릭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입구로 다가간 둘은 매표소에서 표를 두 개 구입했다. 생각보다 가격이 비쌌다. 아니 좀 많이 비쌌는데, 한 명당 5만 골드였다.
‘뭐가 이렇게 비싸? 이곳 사람들은 물가 개념이 바닷가 마을이랑 좀 다른가? 몇 번만 들락날락해도 금방 알거지 되겠다.’
다시 입장객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하나같이 옷차림들이 고급스러웠다. 보석 달린 조끼에 진주로 장식된 블라우스를 입은 사람들을 보며 그녀가 혀를 내둘렀다. 수도 사람들이 다 부자거나 이 놀이동산엔 부자인 사람들만 들어오거나 둘 중 하나였다.
“가격이 장난 아니네요. 돈이 없었으면 림보도 못 찾을 뻔했어요.”
“그러게. 우선 급하니까 빨리 들어가자.”
입구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둘을 놀이동산의 직원이 잠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를 무시한 그들은 곧 풍선과 머리띠를 받아 입장했다.
‘왜 저따위로 쳐다봐.’
잠시 입을 삐죽인 실비아는 놀이동산 안에 비치된 팸플릿을 뽑아 시설 안내도를 찾았다. 바쁘게 굴러가던 초록색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부는 사기를 친 게 아니었다. 놀이동산 시설 중에 정말 말 농장이 존재했다.
“이거 봐. 말 농장이 있어. 여기 림보가 있으려나. 폐관 시간이 오후 6시니 당장 가 봐야겠다.”
지금은 오후 5시니 말 농장이 곧 문 닫을 시간이었다. 실비아네는 서둘러 말 농장으로 향했다. 바쁘게 지나가고 있으려니 ‘꺄아아!’ 비명을 지르며 놀이기구를 즐기는 사람들의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으하하하하!’ 하면서 음산하게 웃는 귀신의 집 효과음과 놀이기구가 돌아갈 때 트는 요란한 음악 소리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후다닥 뛰어간 그들은 폐관 시간 전에 말 농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실비아는 말 농장 입구에 서 있는, 얼룩덜룩한 유니폼을 걸친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