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노점상에 ‘주인 사정으로 휴무’ 푯말을 급하게 붙인 세비스는 지팡이를 짚은 실비아를 부축하며 반려 짐승 호텔로 갔다. 호텔주인에게 물으니 덩치 큰 누런 말 하나가 새벽에 잡힐세라 후다닥 도망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혹시 림보에게 보낸 메시지가 아직 남아 있냐고 묻자 주인이 혀를 차며 메시지를 건네주었다.
섬에서 둘에게 보냈던 음성 메시지의 원본은 아래와 같았는데,
[잘 지내니 걱정 마 림보는 고기 말고 싱싱한 것 섭취]
[밥 잘 먹기 림보는 잘 보살필 것 몬스터 감시 중 곧 감]
바다를 건너온 메시지는 노이즈와 함께 완전히 깨져서 오해하기 좋은 내용으로 변조됐다.
[지직, 지직-. 림보는…고기 싱싱한…고기 지직, 림보 섭취 싱싱한 내…고기 니…고기 림보.]
‘뭐야 이게?’
심지어 전파의 혼선이 있었는지 세비스의 메시지도 림보가 한꺼번에 받아 버린 것이다.
[지직-. 림보는 밥…. 림보 감시 잘…. 몬스터 밥, 지직…림보, 지직…먹기 곧 감]
실바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경악하고 있자 함께 음성 메시지를 듣던 주인이 혀를 쯧쯧 찼다.
“아이고, 이걸 들으니 짐승이 왜 도망갔는지 알겠구만.”
“네?”
실비아가 묻자 주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바다에서 음성 메시지를 보낸 거지? 딱 보니 20자 제한을 넘겼구만. 그래. 그러니 다 깨져서 엉망으로 온 게지.”
“그게 무슨 말이죠?”
실비아의 멍한 표정에 주인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20자를 넘겨서 다 깨진 거라고. 바다에서 보내는 음성 메시지말이야. 공백 포함인 까다로운 메시지거든.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그냥 메시지가 깨졌나보다 할 텐데, 짐승이 뭘 아나. 듣자마자 대번에 놀라서 도망치지.”
“아….”
“실비아 님!”
실비아가 넋을 잃고 주저앉으려 하자 세비스가 급하게 부축했다. 주인은 그런 그녀가 안타까웠는지 잠시 혀를 차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가끔 그런 짐승들이 있어. 보는 입장에서야 안타깝지. 그… 외제마니까, 아무래도 갈만한 곳은 뻔하지만 말이야.”
“짐작 가는 곳이 있으세요?”
지팡이에 얼굴을 파묻으며 울먹이는 실비아의 모습은 무척이나 가여웠다. 주인은 ‘여기에 꼭 있단 법은 없어. 그래도 한번 찾아는 봐야지.’라고 중얼거리더니 메모지에 주소를 하나 적어 주었다. 세비스의 부축을 받아 나가는 실비아에게 주인이 뒤늦게 외쳤다.
“얼른 가 봐. 그런 때깔 좋은 외제마들은 금방 새 일자리 찾아가더라고!”
“네! 감사합니다.”
넋이 나간 실비아 대신에 세비스가 씩씩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실비아를 부축하여 밖으로 나온 세비스는 메모지를 살펴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네요? 아무래도 림보는 날쌔니까 금방 갔겠지만요.”
“…어딘데?”
“주소를 보니 제국 수도에 있는 말 농장이네요. 음, 림보가 없으니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겠어요.”
수도라니, 언젠가 한 번은 갈 줄 알았지만, 림보를 찾으러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실비아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달래기 위해 세비스가 노점에서 주스를 사와 건넸다.
“정신 차리세요. 림보는 어떻게든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주인님이 정신 차려야 빨리 림보를 찾죠.”
“응, 고마워. 세비스.”
가로수 나무 밑에 있는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한 실비아는 림보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나가는 말들이 히잉-! 소리를 낼 때마다 혹시나 림보인가 싶어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모습은 안쓰러움을 불러일으켰다. 그 사이에 세비스는 타코야키 노점대에 가림막을 씌우고는 피크닉 가방을 들고 돌아왔다.
“당장 출발하죠. 집도 없으니 뭐 문단속할 것도 없고 좋네요.”
“응. 근데 어떻게 가지?”
“마차를 빌려야죠. 크라켄 판 돈이랑 타코야키 장사가 은근 쏠쏠했어요.”
세비스가 배에 찬 허리 가방을 두드리며 씨익 웃었다. 던전에서 실비아가 몬스터들과 고군분투…, 덤으로 루카와도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세비스도 마냥 놀고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돈을 많이 벌었다는 세비스의 말에 실비아도 제가 얻어 온 돈을 말해 주자 그가 깜짝 놀랐다.
“그 돈이면 적당한 벽돌집을 전세로 구할 수 있겠어요.”
“그치? 한시름 덜었다니까.”
“실비아 님, 정말 멋져요. 믿고 있었다니까요.”
세비스의 끝없는 칭찬 세례에 실비아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던전에서 있었던 일들과(루카와의 일은 쏙 뺐다.) 세비스가 타코야키 장사를 하며 느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둘은 마차 승강장에 다다랐다. 마차를 기다리는 동안 실비아는 잊고 있던 존재를 번뜩 떠올렸다.
“맞다! 참둘기. 전서구 참둘기는 어디 갔어? 역시 도망갔니?”
“아, 걔요.”
세비스가 태연한 표정으로 피크닉 가방을 열더니 안에 든 상자를 꺼내 보였다. 이건 타코야키 상자 아닌가? 그러나 가다랑어포 더미를 뒤적여 보니 가다랑어포를 부리에 잔뜩 묻힌 참둘기가 배를 두드리며 누워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먹이로 유인했구나. 도망갔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어휴, 말도 마세요. 참둘기가 잠시 도망가긴 했었어요. 크라켄을 팔고 나니 안 보이길래 포기하고 타코야키 장사를 하고 있었죠. 근데 이것이 제가 한눈파는 새에 몰래 다가와서 가다랑어포를 훔쳐먹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이거 맘껏 줄 테니까 상자 안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죠.”
“잘했어! 맞다. 참둘기 주려고 옷도 가져왔는데.”
그때, 잠자고 있던 참둘기가 둘의 대화 때문에 시끄러웠는지 번쩍 눈을 떴다. 실비아는 금칠이 된 전서구 옷을 꺼내 참둘기 앞에서 흔들며 현혹했다. 루카에게 들었던 연차와 자기 개발비를 참고해 대충 파격적인 조건을 말하자 참둘기의 조그만 눈이 욕망으로 흐릿해졌다. 말귀를 알아먹었나 싶어 전서구 옷을 들이대자 참둘기가 날개를 쫙 펼쳤고 손쉽게 옷을 입힐 수 있었다.
실비아는 흡족한 표정으로 참둘기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참둘기야. 이제 넌 우리 집안 사람이… 우리 집안 새야. 죽어도 우리 집안 귀신이 돼서 나가야 해. 알아들었나 모르겠구나?”
참둘기는 전서구 옷과 가다랑어포를 번갈아 보더니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 집은 예전 같은 처지가 아니란다. 가다랑어포는 물론이고 더 좋은 걸 주도록 할게.”
두리번거린 실비아는 승강장 옆 노점상에서 찐 옥수수를 급하게 구입했다. 그리곤 몇 알 뽑아내 참둘기의 부리 앞에 내밀었다. 참둘기는 촉촉한 옥수수를 환장하며 잘 받아먹었다.
“들새 출신으로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으려나 모르겠구나? 한번 도망 시도를 한 건 너그럽게 넘어가도록 할게. 나만큼 마음 넓은 주인이 어디 있겠니. 넌 복 받은 줄 알아야 해.”
“구구….”
“이 옷은 항상 입도록 하렴.”
옆에서 보던 세비스가 전서구 옷을 가리키며 뭐냐고 묻자 실비아가 설명해줬다. 도망도 못 가고, 소속감도 생기고… 여차저차. 그 말을 들은 세비스가 감탄했다.
“딱 좋네요. 이제 도망가도 참둘기를 바로 찾을 수 있겠어요.”
흐뭇하게 웃은 세비스가 참둘기를 쓰다듬었다. 참둘기는 찐 옥수수가 맘에 들었는지 아니면 실비아의 가스라이팅에 세뇌당한 건지 순하게 그녀의 손가락 위로 날아와 앉았다.
‘루카에게 편지를 보내야겠네.’
마을로 돌아오면 백화점에 같이 가자고 약속을 했었으니 그녀가 림보를 찾으러 수도에 간단 걸 알려 줘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간단하게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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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보를 찾으러 수도로 갈 거예요. 언제 찾을 수 있을지 몰라서 백화점 가기는 잠시 미뤄야겠어요. 수도에서 다시 연락할게요.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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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둘기의 발에 편지를 묶어 주고 목적지를 말하자 그것이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아갔다. 확실히 전서구 옷이 효과가 있는지 옷을 입히기 전과 후가 달랐다. 소속감이 생기긴 생긴 모양이었다. 멀어져가는 참둘기를 잠시 바라보던 그녀를 세비스가 불렀다. 마차가 도착했으니 얼른 타란 거였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세비스를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덜컹덜컹. 마차가 시골길을 내달렸다. 금전 사정이 넉넉했기에 세비스와 실비아는 모범 마차를 빌릴 수 있었다. 아쉽게도 바닷가마을에서 외제마는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국산마가 모는 마차를 타고 갈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모범 마차라 그런지 안정감이 남달랐다. 실비아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니 바깥의 풍경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림보였으면 풍경 구경할 겨를도 없이 쌩쌩 달렸을 텐데.’
사라진 림보를 떠올리며 울적해져 있던 실비아는 세비스가 내민 깐 달걀과 탄산수를 마시며 애써 맘을 다독였다.
“마부한테 물어보니 반나절 정도 가면 수도에 도착한다네요. 모범 마차라서 그나마 빨리 가는 거래요.”
“그렇구나. 림보를 탔으면 2시간도 안 걸렸겠어.”
냉장고에 한 달간 넣어 둔 상추처럼 썩어 버린 실비아의 낯빛에 세비스가 다시 한 번 그녀를 격려했다.
“금방 찾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응…. 미안해. 그러고 보니 집도 새로 구하긴 해야 할 텐데. 노숙을 할 수도 없고 말이야.”
“안 그래도 그 얘길 하려고 했었어요. 바닷가마을엔 이제 던전이 씨가 말랐더라구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수도에서 집을 구하는 건 어때요?”
“어? 수도 집값이 장난이 아닐 텐데.”
실비아가 고심하자 세비스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미소 지었다.
“아뇨. 저희는 지금 무주택자라구요. 마을 관리소에서 통지서가 날아왔는데 저희가 황실의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대요! 그래서 수도에서 전셋집도 싸게 얻을 수 있나 봐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실비아의 현재 소지금이 500만 골드를 넘고 세비스도 여러 이유로 소지금이 넉넉했음에도 복지혜택은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급격하게 낯빛이 밝아진 실비아가 세비스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세상에나! 돈이 많이 생겼는데도 아직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어?”
“그럼요. 낙지는 새벽에 몰래 팔았고 타코야키 장사는 세금을 안 떼는 불법, 크흠… 노점. 그리고 실비아 님 돈주머니는 아직 세금신고를 안 했으니까요.”
그건 편법 아닌가?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었던 실비아는 게임 세계에서 뭐가 문제겠냐 싶어 다시 환하게 웃었다. 금화 주머니를 챙긴 뒤 인벤토리에 넣지 않아 세간의 평가가 변하지 않은 덕에 복지혜택이 유지되는 것 같았다.
‘금화 5개뿐이라 인벤토리에 안 넣었었던 건데 의외의 소득! 완전 잘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