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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152화 (152/372)

152화

그녀는 미니 백에서 백지수표와 펜을 꺼냈다. 루카는 원하는 만큼 맘껏 적으라며 으스댔다. 정말로?

‘좋아, 그러면….’

손을 모아 루카의 눈에 금액이 안 보이게 가린 실비아는 한껏 웅크린 자세로 조심스럽게 금액을 적어넣었다. 1조 골드….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가는 금액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루카의 눈치를 봤다. 아무리 부자라도 이 금액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루카에게 수표를 보여 주기도 전, 실비아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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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엔딩 <아리센트 가문의 숙적> 루트에 진입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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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숙적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등줄기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황급히 숫자에 줄을 박박 그은 실비아는 100억 골드를 써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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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엔딩 <염치가 없어서 도망자가 된 사람> 루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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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박-소리가 나도록 다시 줄을 그은 뒤 1억 골드를 적어넣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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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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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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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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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빡!

수많은 배드엔딩 진입 메시지를 본 끝에 실비아는 500만 골드를 적어넣었다. 다행히 그건 무사히 통과됐다!

‘그래, 인간적으로 1조나 1억 골드는 말이 안 되긴 하지. 500만 골드라니, 이게 왠 횡재야!’

줄을 너무 많이 쳐서 누더기가 된 백지수표를 눈앞에 들고 손을 부들댄 실비아가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받친 채 턱을 괴고 있던 루카는 그녀가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푸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뭘 그렇게 계속 수정하고 있어. 이리 줘 봐.”

“휴우, 여기요.”

백지수표를 살펴본 루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정도면 돼?”

“네!”

“소박하긴. 이 정도는 지금 당장도 줄 수 있지.”

손가락에 수표를 끼운 루카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그러게요. 제가 좀 그래요.’라고 말하며 만면에 인자한 미소만 띠었다. 테이블 밑에 내려간 주먹은 울고 있었지만 말이다.

‘시발, 넌 모르겠지만 그 금액 위론 배드엔딩이 뜬다고.’

루카는 은행에 갈 것도 없이 시계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실비아에게 건넸다. 생각보다 가벼운 주머니에 황급히 열어보니, 은화가 아닌 금화가 5개 들어 있었다. 액수가 커서 금화로 넣어 줬구나! 앉은 채로 방방 뛰며 좋아한 실비아는 건네받은 금화 주머니를 얼른 챙겨 미니 백에 집어넣었다.

이제 집에 갈 채비를 하는데, 루카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요?’라고 묻자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던 입매가 서서히 열리고 소름 돋는 말이 튀어나왔다. ‘스위트룸에서 와인 마시고 갈래?’라니.

‘누굴 죽이려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그득한 실비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루카가 아쉬워하며 잠시 삐진 티를 냈지만 통하지 않았다. 실비아가 테이블에 기대놨던 지팡이를 들고 일어나자 루카도 따라 일어났다.

“집은 안 가르쳐 줄 거야?”

“안 돼요. 왜냐면, 음…. 저한테 소중한 사람은 루카 님에게도 소중한 사람이죠?”

“아니.”

잠시 고민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대번에 아니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역시 더러운 성질은 필요에 의해 잠시 숨었을 뿐, 어디 가진 않았다. 실비아는 아래로 떨어지려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끌어올리곤 그를 설득했다.

“집을 안 가르쳐 주는 건 딴 이유가 없어요. 괜한 걱정이겠지만 루카 님이 제 가족과도 다름없는 세비스랑 싸울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어떻게 알았어? 감이 좋네.”

“둘이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제가 안심하고 집을 알려드릴 수….”

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합-하고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잠깐, 지금 집 없잖아. 뭘 가르쳐준담?’

카페테리아에 앉아서 노닥거릴 게 아니었다. 당장 세비스랑 림보가 잘 지내고 있는지 찾아보는 게 먼저였다. 초조해진 그녀는 미니 백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굴렸다. 홈리스 신세란 걸 인지하고 나니 피로로 한껏 핏줄이 선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어쨌든 둘이 잘 지내야 집을, 크흡. 집을 알려 드릴 수 있어요. 당장은 못 알려 줘요. 그럼 이만! 연락은 전서구로 해요!”

실비아가 급하게 걸음을 내딛자 루카가 벌떡 일어나더니 가느다란 팔을 붙잡았다.

“잠깐, 그 개새끼랑 잘 지낼게! 당장 알려 줘. 몸도 성치 않은 것 같은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성질도 급하셔라. 다음에, 다음에요! 갈 데가 있으니 따라 나오지 말아요. 크흑.”

실비아는 손을 흔들며 루카가 다시 잡을세라 지팡이를 추진력 삼아 급하게 뛰어갔다. 부자인 루카에게 무주택자가 됐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서러움에 눈물을 흩뿌리며 떠나는 실비아의 뒷모습을 루카가 안타깝게 바라봤다.

‘저 몸으로 집까지 어떻게 가겠단 거지. 따라오지 말라니 억지로 잡을 수도 없고….’

* * *

한참을 절뚝이며 뛰던 실비아는 광장 분수대 앞에 도착했다.

‘맞다, 여기서 아이템을 써야… 아니다. 우선 림보랑 세비스부터!’

분수대를 보니 <행운의 동전>이 생각났지만 당장은 세비스와 림보를 만나는 게 더 급했다. 그녀는 바삐 지팡이를 짚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막상 림보를 맡겨 둔 ‘반려 짐승 호텔’로 가 보니 이미 체크아웃했다는 답만 들을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추가 청구된 비용까지 한꺼번에 다 내고 나갔다는 것이다. 세비스가 데려간 걸까. 그에게 신전에 몸을 의탁하라고 했으니 신전으로 가면 둘을 볼 수 있을까?

“아이고….”

신전을 향해 빠르게 뛰던 실비아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섹스를 과하게 해서 천벌이라도 받는 건지 상태 이상 때문에 더 이상 뛸 기력이 없었다. 지팡이를 친구삼아 터덜터덜 걸어가던 그녀의 코끝으로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흘러들어 왔다.

‘이거 무슨 냄새지? 뭔가 엄청 익숙한 냄샌데…. 아! 타코야키!’

반가운 마음에 돌아보니 못 보던 노점상이 하나 생겨 있었다. 털보 상인이 두건을 쓴 채 열심히 타코야키를 굴리는 게 보였다.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간 그녀는 미니 백에서 주섬주섬 동전을 꺼내 지팡이를 짚으며 구부정한 자세로 노점상으로 다가갔다. 상인은 한창 타코야키 만들기 삼매경이었는데, 그녀가 앞에 서자 지팡이만 힐끗 보곤 다시 고개를 숙였다.

실비아는 잔뜩 쉰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맛있겠다.”

“할머니 몇 개 드릴까? 할머니같이 이 안 좋은 분에게 딱이거든, 이게! 엄청 부드럽… 실비아 님!”

“세비스?!”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털보 상인이 실비아의 얼굴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그는 꼬챙이를 집어 던지곤 제 턱수염을 급하게 쥐어뜯으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털보가 아니라 수염을 붙이고 있던 세비스였다! 며칠 만에 봐서 그런지 세비스의 얼굴이 한층 성숙해져 이제 타코야키 청년사업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목소리도 살짝 걸걸했는데, 이제야 변성기가 온 건가 싶었다.

“실비아 님, 무사하셨군요. 조금 안 무사하신 거 같긴 한데…. 어디 다치신 거예요? 붕대랑 지팡이는 뭐에요? 목소리는 또 왜….”

실비아는 손사래를 치며 벌에 쏘여서 붕대를 하였고, 지팡이랑 목소리는 운동을 너무 했더니 근육통이 와서 그렇다고 변명했다. 섹스도 운동은 운동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난 괜찮아. 그러는 너야말로 목소리가 왜 그래? 타코야키 장수는 웬 말이고.”

“아, 그게….”

쑥스러워하던 세비스가 목에 달린 조그만 기계를 뗐다. 그러자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어이 된 연유인가 물어보니 세비스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세발낙지 크라켄과 함께 오두막집으로 돌아온 후 실비아가 익히 아는 것처럼 오두막집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다고 한다. 세비스는 절망하지 않고 오두막집 잔해에서 식칼을 찾아냈다. 그리고 크라켄이 죽기 전에 신속하게 몸을 해체해서 수산시장에 내다 팔았지만 한꺼번에 시장에 풀린 엄청난 양의 낙지 때문에 수요와 공급에 불균형이…. 자유시장 경제의 붕괴위기가…. 궁극적으로 잉여자원을 해결하기 위한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며 제국전쟁의 서막이….

그런 연유로 시장에 공급을 과하게 늘리다간 대륙 간 전쟁이 발발할 수 있었다. 평화를 위해 급하게 타코야키 기계를 구한 그는 어린 외모로 얕보이지 않기 위해 수염을 달고 목소리 변조 기계를 구입해 털보 타코야키 장수로 화려하게 마을 노점상계에 데뷔. 수완이 워낙 좋았던 세비스의 타코야키 노점은 며칠 만에 마을 맛집으로 자리매김했고 어제는 제국일보 기자가 취재하고 갔다고 한다.

심지어 제국 기사단으로부터 황실 전용 타코야키 요리사가 되는 건 어떠냐고 제의도 받았지만, 한사코 거절하며 실비아만 기다렸다는 그의 말에 실비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구나. 고생했어.”

눈썹을 추욱 늘어트린 세비스가 실비아의 거친 손을 어루만졌다. 고생을 하긴 했는데 그게 참 즐거운 고생이었기에 그녀는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근데 림보는 어디 간 거야? 반려 짐승 호텔에 가 보니 안 보이더라.”

실비아의 말에 세비스가 곤란한 듯 낯빛을 굳혔다.

“하아, 놀라지 마세요. 그게…. 호텔 카운터 직원에게 물으니 야밤에 짐 싸 들고 나갔다고 하더라구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실비아의 낯빛이 하얘졌다.

“어? 무슨 소리야. 가만히 기다리라고 했는데!”

“저, 그게…. 실비아 님이 보낸 메시지를 보고 오해한 것 같더라구요. 저야 그 메시지가 깨져 있단 걸 알아차렸지만 짐승인 림보는….”

세비스가 말끝을 흐리자 실비아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오해라니? 오해할 게 있나? 우선은 메시지를 다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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