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오타야, 오타.”
실비아의 눈치를 보며 몇 가지 수상한 계약서를 즉석에서 찢어 버린 루카는 적절한 계약서를 찾아내 손에 들고 팔랑거렸다.
“이거네. 유급 휴가 계획서.”
실비아는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읽어 보았다. 직원의 성명과 휴가 동안 지급할 금액, 휴가 일수가 공란으로 되어 있는 종이였다. 예상이 맞았던 걸까? 루카의 입에서 ‘유급 휴가 계획서’란 말이 나오자마자 부하들이 눈에 띄게 웅성거렸다. 루카가 부하들 앞에서 종이를 팔랑거리며 손을 움직이자 시선들이 빠짐없이 그쪽을 따라가는 게 아닌가.
이로써 부하들은 오염된 기운에 당하긴 했지만, 본능적으로 유급 휴가를 좋아한단 걸 알 수 있었다. 루카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곤 손가락을 까딱했다.
“대표 나와. 유급 휴가를 주도록 하지.”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종이라서 쳐다본 걸까? 오답이었나. 루카와 실비아는 묵묵부답인 부하들을 내버려 두고 다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뭐야, 이게 답이 아닌가 봐.”
“그러게요.”
“아니다. 뭔지 알겠어.”
이제 부하를 비롯한 모두의 몸에선 찜질방에서 같이 버티는 사람들처럼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망할 놈의 균열에서 뿜어져 나오는 끔찍하게 더운 열기는 방어막으로도 막아지지 않았다.
시계에서 깃털 펜을 하나 불러낸 루카는 유급 휴가 계획서의 금액란과 휴가 일수에 파격적인 숫자를 적어 넣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실비아가 ‘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사장 노릇을 오래하던 그가 실비아보다 직장인들의 맘을 더 잘 알았다. 물론 평소엔 알아도 모른 척하겠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굳이 눈치를 숨기지 않았다. 루카가 종이에서 펜을 떼자 그 옆에서 실비아가 손부채를 부치며 잉크를 얼른 말렸다. 부하들 앞에 펜과 종이를 들이민 루카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사인하러 나와.”
루카의 한마디에 부하들이 서로 말없이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쌍둥이 중 하나가 기어 나와 서류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는 루카가 다시 종이를 뺏어 갈까 힐끔 눈치를 보다가 얼른 성명란에 ‘부하 일동’이라고 적고 사인까지 마쳤다. 팔짱을 끼고 그가 하는 꼴을 보던 루카의 한쪽 눈썹이 못마땅한 듯 꿈틀거렸다.
“저것들이! 말이 안 통하는 척하더니.”
“아니에요, 루카 님. 오염된 기운에 당한 건 맞을 거예요.”
현생과 게임 세계를 통틀어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는 모든 직장인들은 사장이 유급 휴가를 준다면 집 나간 정신도 신속하게 돌아올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게 과연 수수께끼의 답이 맞을까?
꿀꺽- 하고 목울대로 침이 넘어가는 와중에 그녀의 눈앞에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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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수수께끼를 푸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지옥의 문이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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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를 확인한 실비아가 바로 균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틈 사이로 빠져나왔던 수증기 같던 열기가 마치 시곗바늘을 뒤로 돌리는 것처럼 안으로 빨려들어 가더니 균열이 천천히 닫혔다. 곧 완전히 봉합된 땅은 갈라진 적 없던 것처럼 판판해졌다.
종이를 다시 루카에게 제출한 부하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벽에 기댄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카가 어깨를 으쓱했다.
“다행이네. 이게 정답이었나 봐.”
“그러게요. 수수께끼라고 하기엔 좀 현실적인 해결 방법인 게 함정이었네요. 하마터면 못 맞힐 뻔했어요.”
실비아는 부하들을 힐끗거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수수께끼 외에 별다른 미니 게임은 따로 없는 것 같았다.
‘그래, 수수께끼 풀고 미니 던전도 두 개나 공략했는데, 따로 게임이 또 있었다면 화날 뻔했어.’
펑- 펑. 균열은 사라졌지만 화산은 아직 저 멀리서 신나게 불꽃 축제를 벌였다. 아무래도 화산은 모든 퀘스트를 완수하고 던전 공략이 끝나야 사라질 듯싶었다.
다행히 루카의 부하들은 마지막 수수께끼를 풀고 나서인지 아니면 ‘유급 휴가 계획서’를 받고 나서인지 몰라도 한 명도 도망가지 않고 순순히 정화를 기다렸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잘된 일이었다. 그녀는 업그레이드된 정화 스킬을 이용하여 한 번에 그들을 정화하기로 했다.
헛기침을 한 실비아는 루카와 부하들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갑자기 정신이 나갔느냐고? 아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한 번씩은 만화를 보면서 마법 소녀처럼 요술봉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치는 걸 꿈꿔 본 경험. 현실에서라면 미치지 않은 이상 멀쩡한 성인이 사람들 앞에서 이딴 짓을 하지 않을 테지만, 여긴 게임 세계, 어떤 유치한 짓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빙의된 김에 한번 마법 소녀 짓을 해 보고 싶은 욕망이 불쑥 들었고 실행하기로 했다.
실비아는 망치를 들고 몇 바퀴 빙글 돌고는 이상한 손짓을 하며 팔을 휘저었다. 한껏 멋진 자세를 취한 그녀는 즉석에서 짬뽕한 구호를 외쳤다.
“사랑과 정의를 위해,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울트라 그레이트 하트 빔!”
“뭐야, 그게.”
루카가 옆에 서서 뭐 하냐고 했지만, 실비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거, 딴 데 가서 못 한다고!
그리고 망치를 흔들며 속으로 정화 스킬을 말하자 샤라랑- 하면서 반짝이는 가루가 휘날리더니 부하들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그들은 썩은 동태 눈깔로 실비아를 떨떠름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흠칫하고 몸을 떨더니 눈빛이 맑아졌다.
“어, 어? 내가 왜 여기 있지. 옷은 이게 뭐야.”
“대장! 대장 꼴이 왜 그래요?”
“이 여잔 누구….”
정신을 차린 부하들이 얼떨떨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루카는 순간 반가워하며 활짝 웃었으나 그건 찰나의 순간이었고 다시 거만한 표정이 되었다. 건들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간 루카는 간단하게 상황 설명을 한 뒤 이것저것 명령했다. 처음 봤을 땐 뭐 저런 양아치가 있나 싶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특유의 재수 없는 표정은 만만한 사장이 되지 않기 위한 그만의 이미지 메이킹인 것 같았다.
잘 해결된 것 같아 좋아하고 있는데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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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 퀘스트 모두 성공! <안개로 싸인 보물섬>의 던전 공략을 완료하셨습니다. <던전 클리어 보물 상자>를 보상으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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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실비아는 순간 신나서 만세를 하며 환호성을 질렀다가 이상하게 쳐다보는 주위 시선을 느끼곤 급하게 입을 막았다. 새우잡이 배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온갖 몬스터를 물리치고 이상한 수수께끼를 푼 끝에 드디어 두 번째 던전의 공략을 성공했다!
‘잠깐, 던전 공략이 완료된 거면 화산은?’
시선을 돌린 실비아의 눈에 땅에 떨어졌던 화산재가 하늘로 역순으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균열이 닫힐 때와 비슷하게 누군가 대형 진공청소기를 쓴 것처럼 화산재들이 모조리 흘러왔던 방향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희한한 광경에 모두들 넋을 놓고 반대로 흘러가는 화산재를 바라보았다.
시커먼 화산재들은 건너편 산봉우리로 모조리 다 빨려들어 가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다행스럽게도 방어막도 그에 맞춰 쓰임을 다하고 사라졌다. 곧 시커멓던 하늘이 쨍하게 맑아졌다. 그리고 <잊혀진 신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변 풍경이 흐릿해지더니 열대 우림이 사라지고 개발된 섬이 나타났다.
원래의 섬은 아리센트 가문이 전용 창고로 만들기 위해 이곳저곳을 개발해 놨기에 마치 계획도시의 급조한 관광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창고로 쓰이는 건축물 말고는 주변이 휑했다.
실비아가 원래대로 돌아간 주변 환경을 찬찬히 눈에 담는 사이에 루카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열심히 창고를 드나들며 이것저것 날랐다. 어찌 보면 심한 일을 당한 셈인데, 기억이 없어서 그런지 파격적인 유급 휴가를 받아서 그런지 다들 상황에 금세 적응했다.
창고 입구에 서서 부하들을 지켜보는 루카의 곁으로 실비아가 다가갔다.
“그래도 수수께끼 말고 다른 시합은 없어서 다행이에요. 다른 던전에선 몬스터와 시합을 했었거든요. 여기선 예상보단 쉽게 끝났네요.”
실비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루카가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꽉 껴안았다. 그러곤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고마워. 네가 배를 구해 준 덕이야. 그거 아니었으면 지금도 이 섬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야.”
“아니에요. 어차피 해야 될 일이라서.”
실비아는 살짝 민망해졌다. 게임을 공략한 것뿐인데 루카에게 고맙단 소리를 듣다니. 한참을 껴안던 루카는 아쉬운 듯 몸을 떼었다.
“이 섬에서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허비했어. 창고에서 꺼내야 할 것만 우선 꺼내고 내일 당장 돌아가자.”
“그래요. 저도 함께 도와야….”
실비아가 그들을 돕겠다고 말을 하자마자 루카가 침묵했다. 뭔 말을 들은 건지 얼굴이 새하얘진 부하들까지 그녀의 도움을 극구 거절했다. 부하들을 지휘하기 위해 뒤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가던 루카가 실비아에게 쉬고 있으라고 말했다.
쉬고 있어도 되나? 그녀가 뻘쭘하게 창고 앞에 서서 머뭇거리자 부하들이 곁으로 다가왔다. 잠시 화산에 한눈을 판 사이에 루카가 실비아를 어떻게 소개한 건지, 부하들은 ‘형수님’거리면서 그녀에게 그늘에서 쉬라 말을 건넸다. 심지어 다른 한 명은 창고에서 꺼내 온 커다란 부채로 실비아의 땀을 식혀 주었다. 그사이 실비아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악력기를 쥐었다 폈다 하며 동시에 문제집까지 읽었다. 던전 공략이 끝나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러던 중 실비아는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맞다! 잠시 잊고 있었어. 좀 찝찝한 메시지가 몇 개 떠올랐었지.’
기록 창을 켠 실비아는 지나간 메시지들을 훑었다. 루카랑 첫 번째 창고에서 네 번…. 이거는 지금 상황에선 의도가 뭔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그리고 균열이 생겼을 때 왜 ‘지옥의 문이 열립니다.’라는 메시지가 뜬 걸까. 메시지들과 함께 석문에서 봤던 그냥 게으르게 살다가 죽자고 권유하는 듯한 구절들은 누가 새긴 거고.
‘균열로 빨려들어 가면 게임이고 뭐고 바로 지옥행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