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유적지를 구경하는 관광객의 마음이 된 실비아는 못마땅한 눈으로 멀찍이 둥그렇게 앉아있는 부하들을 째려봤다. 그러나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니 무척 공들여서 석문에 새긴 것처럼 글자들이 반듯했다.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루카가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이건 혹시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아닐까?”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둘은 머리를 맞대고 잠시 구절의 의미가 뭘까 토론했다. 앞에 있는 명언들은 모두 다 게으르게 살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는데, 그걸 부정하는 말이 뒤에 딸려 있었다.
‘아니야, 부정하는 말이긴 한데 정확히는 그냥 죽으라고 하는 것 같은데.’
그녀는 게임에 빙의된 지 얼마 안 돼서 꾀병을 부렸다가 업보가 100이 올라갔던 사건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 이 섬에서 만났던 루카 형의 귀신인지 뭔지가 말했던 ‘지옥’. 게임과 나태 지옥은 묘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혹시 이 구절은 게으르게 산 자들에게 그냥 죽어서 나태 지옥으로 오라는 소리가 아닐까?
그러나 당장 루카 앞에서 나태 지옥에 대해서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우선 부하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기 위해 루카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부하들은 이 섬에 갇힌 지 얼마나 된 거죠?”
“음,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거의 1년 가까이 됐지, 다들? 나 참, 오랫동안 이 섬을 방치해 놨더니 이 꼴이 된 줄도 몰랐지. 아무것도 모르고 서른 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여기로 보내는 바람에 사업장에 인력이 부족해.”
도박장에서 봤을 때도 덩치들이 한가득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거기 말고도 벌여 놓은 사업이 많았나 보다. 루카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더니 인장을 꺼냈다. 수수께끼를 풀기에 앞서 창고가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인장을 쥐고 주문을 외우자 스르릉- 소리를 내며 굳건하던 석문이 열렸다.
“루카 님, 그럼 여기 섬에 갇혔던 부하들에게 어떤 보상을 주실 건가요?”
“보상? 아… 맞아. 보상이 필요하겠구나.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보상까진 생각을 못 했네.”
“그렇죠. 그들은 루카 님 명령을 따랐다가 이 섬에 갇혀 버린 거니까.”
루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고 안으로 들어갔고 실비아도 그 뒤를 따랐다. 첫 번째 창고는 두 번째 창고보다 더 넓고 화려했다. 금화가 산처럼 쌓여 있었는데, 자그마치 세 봉우리나 되는 금화 산이 태백산맥처럼 이어져 있었다. 살다 살다 능선처럼 이어진 금화 산더미를 보는 날이 오다니. 한국은행을 견학해도 이런 광경은 보지 못하리라. 휘황찬란한 광경에 실비아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멍하니 벌렸다.
“실비아, 입에 파리 들어가겠어. 이런 거 처음 봐? 뭐, 물론 처음 보겠지. 나름 우리 가문은 엘리셔스 제국 5대 거부 안에 들어간단 말이야. 대륙 전체에 이름이 자자한 우리 할아버지의 사업 성공 스토리부터 말하자면….”
루카는 다 좋은데 자랑할 일만 생기면 말이 많아지는 게 탈이었다. 자랑스러운 할아버지 얘기부터 시작해서 선조들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자랑을 한참 들은 실비아는 열심히 추임새를 넣어 주면서 금화 더미를 여기저기 힐끗댔다.
‘아까 전서구 옷을 줬으니 여기서도 뭐 줬으면 좋겠는데.’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이렇게 실컷 보여 주고 자랑까지 했으면서 아무것도 안 준다면 이번에야말로 플레이어 특유의 도둑질 충동이 생길지도 몰랐다. 초록 눈이 위험하게 반짝이는데, 자랑질을 끊임없이 하던 루카가 금화 더미 위를 등산하듯 올라갔다. 이곳저곳 파 보던 그는 한 가지 상자를 가지고 내려오더니 실비아에게 가볍게 던졌다.
“자! 이거 너 가져.”
“이게 뭔데요?”
“열어 보면 알지.”
다행히 눈치 빠른 루카는 이번에도 실비아에게 보상을 안겨 주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조그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곤 너무 기뻐서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와, 이건!”
실비아는 루카를 끌어안고 얼굴을 마구 비볐다. 반듯한 얼굴 여기저기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뽀뽀를 해 댔더니 루카의 얼굴이 미스트라도 뿌린 양 촉촉해졌다. 조금만 더 하다간 이 자리에서 할 기세인 실비아를 말리며 루카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우와! 정말 고마워요. 이런 걸 줄 줄은!”
“하하, 좋아할 줄 알았어.”
조그만 상자 안에 든 것은 바로 백지 수표. 예상치 못한 어마어마한 선물에 실비아가 이성을 놔 버렸다. 백지 수표를 받다니, 보물섬에 온 보람이 있었다. 오두막집이 사라진 게 대수겠나. 뭍으로 돌아가면 비단옷을 두르고 금관을 쓴 채 떵떵대며 림보와 세비스에게 거들먹거려야지. 그러면 림보와 세비스는 ‘어이구, 주인님 오셨어요.’라면서 어깨 마사지를 열심히 해 줄 터.
백지 수표를 꺼내 조심스럽게 미니 백에 집어넣은 실비아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계속 기쁨을 표출했다.
“기뻐요, 너무 기뻐!”
“네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
쪽쪽- 소리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녀는 마치 주인을 일주일 만에 본 강아지처럼 빙글빙글 돌며 루카를 놔주질 않고 연신 치댔다. 백지 수표를 받고 안 좋아할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넘쳐나는 감동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폴짝폴짝 뛰며 한참을 좋아하던 그녀는 쿵-! 하고 지축을 울리는 굉음에 멈칫했다.
펑- 퍼펑. 마치 거대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에 실비아와 루카는 너 나 할 것 없이 빠르게 창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곤 소리의 정체를 깨닫고 바로 아연실색했다. 창고에 들어가기 전만 해도 화창하고 맑았던 하늘이 온통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하늘에서 화산재가 휘날렸다. 코로 들어오는 매캐한 유황 냄새까지. 멀리 내다보자 건너편 섬의 산봉우리에서 붉은 마그마가 솟구쳐 오르는 게 보였다. 부하들도 깜짝 놀랐는지 모두 계단을 올라와 석문 앞으로 피신해 왔다. 마지막 수수께끼에서 모래시계가 없어 다행이라고 좋아했건만, 화산 폭발 때문에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가 없게 됐다.
다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루카가 시계에서 물건 하나를 불러냈다. 그가 주문을 외자 물건에서 투명한 막이 튀어나오더니 비닐하우스처럼 모두를 감쌌다. 루카는 혀를 쯧, 차더니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어막이야. 하지만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한 10분 정도가 한계일까.”
다행히 돈이 넘쳐나는 루카가 10분이지만 그들을 구했다. 방어막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뜨거운 화산재를 맞고 숯불 구이가 될 뻔했다.
“원래 이 섬엔 화산이 없었다고 했죠?”
“응. 없었어. 하아, 큰일이네. 이대로라면 다 죽게 생겼어.”
루카가 반듯한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 던전 때처럼 마지막 수수께끼를 풀고 루카 님의 부하들을 정화하면 저 화산은 없어질지도 몰라요.”
“그럼 얼른 수수께끼를 풀자.”
둘은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하게 의견을 나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창고를 살필 게 아니라 수수께끼부터 해결했어야 했지만, 이미 지나간 거 어쩌겠는가. 그때 부하 한 명이 소리치며 손가락질을 했다.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아까보다 확연히 많은 양의 화산재가 이쪽 섬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와, 장난 아니네. 금방 이 섬까지 화산재로 다 덮이겠는데.”
바닷가에서 예상했던 것처럼 건너편 섬 화산 폭발의 여파가 이쪽 섬에도 영향을 줬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긴 하지만 화산재가 이렇게 휘날린다면 이쪽 섬도 무사하긴 힘들었다.
‘마지막 수수께끼는 어떻게 풀면 되는 걸까. 루카의 부하들이 만족할 만한 행동이라….’
이번엔 여태까지의 수수께끼들처럼 조각상이라거나 돌, 자물쇠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말 그대로 어떤 행동을 하면 끝나는 수수께끼일지도. 잠시 생각에 잠겼던 실비아는 아까 전 백지 수표를 받자마자 좋아서 춤을 췄던 자신을 떠올렸다.
‘너무 좋아서 순간 머리가 하얘졌지…. 아!’
순간 깨달음을 얻은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루카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소곤소곤 귓속말했다.
“지금 당장 부하들에게 보상을 주겠다고 해요. 보물섬에서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요!”
“이 상황에서?”
정신없는 상황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게 꺼림칙했던 루카는 실비아의 말에 잠시 망설였다. 그사이에도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달아 창고 앞 철제로 된 조각상이 뜨거운 화산재를 버티지 못하고 구부러졌다. 그 순간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콰쾅! 하고 울리더니 첫 번째 창고 앞 너른 공터 위로 커다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부하들이 오들오들 떨면서 비명을 질렀다. 이지를 잃은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공포심을 느낀 것이다.
“으아악!”
“저게 뭐야?!”
루카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깜짝 놀라 실비아를 뒤로 숨기며 당황했다.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니 땅이 갈라지면서 그 아래 지글지글 끓는 용암의 강이 나타났다. 균열은 아가리를 벌려 희생자를 집어삼키는 짐승처럼 날름날름 붉은 혀를 내밀었다. 화산도 큰일인데 땅이 갈라져서 마그마가 솟아오르다니,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리고 더 큰일은 따로 있었다. 실비아는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고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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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문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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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웬 지옥?!’
저 균열이 지옥의 문이었다니, 수수께끼를 얼른 풀어야 했다. 화산 폭발로 인한 열기와 코앞까지 다가온 지옥에 대한 끔찍함 때문에 실비아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저를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루카를 급하게 불렀다.
“루카 님, 아까 한 말대로 해 봐요. 밑져 봐야 본전이니까. 아니 본전은 아니네. 하여튼 말해 봐요. 아니지, 저번에 저한테 줬던 계약서처럼 서면으로 보상할 방법은 없어요?”
말로 하는 것보다 계약서로 지급하는 게 확실할 터였다. 균열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루카는 급하게 시계 속에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역시나 ‘종속 노예 계약서’를 태연하게 내밀었던 사람답게 이름과 몇 군데가 공란인 백지 계약서를 가지고 있었다. 루카는 서류 뭉치를 이것저것 급하게 넘기며 적절한 계약서가 있나 탐색했다.
“노예 계약서, 이것도 아니고. 9.9 대 0.1 수익 분배 계약서, 이것들도 아냐. 오장육부 담보… 이건 왜 여기 있지. 찢어 버려야겠다. 음….”
“오장육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