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루카의 말에 주위를 둘러본 실비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꼬마 넝쿨을 쫓아내는 새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몸에 불이 붙은 보스 몬스터와 꼬마 몬스터들이 이리저리 나무에 부딪치는 바람에 여기저기 불이 붙은 것이다.
주변에 향나무가 있는지 양키 캔들처럼 은은한 향이 주위를 맴돌았다. 힐링 되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돌린 찰나 활활 타던 코코넛 나무들이 팝콘처럼 코코넛 칩을 뱉어 냈고, 실비아는 나무 밑에서 입을 벌려 몇 개 받아먹었다. 잠시 불타는 나무가 주는 혜택에 심취해 있던 그녀는 번뜩 정신을 차리며 입을 닦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와…. 이걸 어쩌지? 공격이 먹힌 건 좋았는데 이대로 두면 불이 숲 전체로 옮겨붙겠는데.”
“그러게요…. 이러다 다 타겠네.”
숲이 다 탄다면 루카의 부하들이 숨을 곳이 없지 않을까. 그럼 일망타진할 수도 있을 텐데.
잠시 플레이어 특유의 잔인한 생각을 했던 실비아는 루카의 부하들이 통구이가 되는 걸 떠올리곤 진저리를 쳤다. 아니, 부하들만 통구이가 되는 게 아니라 자신들도 같이 구워지겠지. 이대로 놔두다간 도망칠 곳도 없을 터. 고민하던 실비아는 <손은 눈보다 빠르다> 스킬을 떠올렸다.
‘많이 쓰면 상태 이상이 되겠지만 한두 번 정도는 괜찮지.’
속으로 스킬 명을 외친 실비아는 설명할 틈도 없었기에 무작정 루카를 끌고 레이싱 카처럼 후다닥 넝쿨 식물이 양동이를 들고 오던 방향으로 달려갔다. 가는 길에 땅바닥에 널려 있는 넝쿨과 양동이도 여러 개 주워 가며 실시간으로 엮었다.
“허억, 실비아…. 뭐 하는 거야?”
루카가 폭주족 같은 실비아의 달리기를 따라가기 버거워하며 헉헉댔지만, 우선은 숲이 온통 새까맣게 타기 전에 신속한 진화가 필요했다. 그녀는 루카의 손을 잡고 마치 림보처럼 발이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그들은 곧 폭포에 도착했다.
“시계 안에 있는 천 같은 거 다 꺼내 봐요.”
“후우, 불… 불 끄려고? 알았어.”
다행히 루카는 실비아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 그가 천을 이것저것 불러내자 실비아는 모조리 건네받아 폭포에 담갔다 꺼낸 뒤 끈에다 하나하나 엮었다. 그러곤 여전히 천을 꺼내고 있는 루카에게 천을 적시고 있으라고 말한 후 다시 뛰어갔다. 예전에 봤던 전래 동화 ‘주인 목숨 구한 개’가 물에 적신 몸으로 주인을 구했듯이, 그녀는 젖은 천으로 엮은 끈을 잔뜩 들고 가서 불붙은 나무마다 돌아다니며 진화 작업을 했다.
그렇게 500번 반복했을까. 산불은 그녀의 정성 덕에 가까스로 진화됐다. 여기저기 거스름이 묻어 얼굴이 새까매졌지만, 빠른 판단 덕에 숲이 잿더미가 되는 걸 막았다. 실비아는 뿌듯하게 미소 지으면서도 속으로 구시렁댔다.
‘휴, 업보가 있으면 그 반대 개념은 없는 거냐고. 착한 일을 했으면 보상을 내놔라, 시스템아!’
그녀의 절절한 외침을 시스템이 알아차린 걸까. 빵빠레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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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숲을 지키려 열심히 노력한 실비아에게 숲의 정령이 <꿀단지>를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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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착한 일엔 보상이 있어야 하는 법. <꿀단지>를 얻은 그녀가 환호하며 영혼이 담긴 댄스를 췄다. 급하게 뛰어 계곡에서 돌아온 루카도 영문을 모른 채 같이 환호했다.
“와, 진짜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네 속도는 대단해. 이게 신이 준 기술이야?”
“네? 아, 그럼요!”
루카는 예고 없이 그녀를 끌어안고는 공중에 들고 흔들었다.
“정말 고마워. 네 덕이야. 이대로 내버려 뒀으면 던전 공략이고 뭐고 숲에서 다 죽을 뻔했어.”
“아, 그쵸. 근데 잠깐 이건 좀 내려놓고….”
몬스터들을 모두 해치워 <꿀단지>도 얻었겠다, 남은 건 루카의 부하들뿐일 터. 감격의 포옹을 마친 그들은 빠르게 아까의 부하들을 봤던 첫 번째 창고로 달려갔다. 근처에 다다라 수풀에 숨어서 보니 원주민 차림의 사람들이 단체로 뱅글뱅글 돌면서 춤을 추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음, 수수께끼 자체가 게임이었으니 별다른 메인 게임은 없으려나?’
전투를 할 것도 아니니 이제 마지막 수수께끼만 남았으리라 판단한 실비아는 당장 그들 앞에 몸을 드러냈다. 그들은 둘의 난입을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 춤을 추는 무리 중에 한 명이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와 그들의 앞에 섰다. 루카의 반응을 보니 문신뚱과 똑같이 생긴 다섯 번째 쌍둥이의 마지막 형제 ‘가오’였다. 그 역시 옆구리에 찬 망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이번엔 다행히 모래시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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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만족하는 행동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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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를 본 실비아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행동이라니, 거기다가 시간제한도 없다.
그런 게 뭐가 있을까? 사람의 뇌는 한번 고정 관념이 생기면 쉽게 벗어나질 못하는 법. 19금 게임에 빙의한 그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전 답이 ‘6969’였던 자물쇠 수수께끼를 떠올리며 또 변태 같은 생각만 했다. 곧 머리를 굴리던 실비아가 ‘설마!’ 하면서 입을 가리곤 경악했다.
‘설마? 모두가… 만족할 만한 행동을 하라니, 설마 19금 게임이니까, 말이야…. 다인X? X인플? 다X플은 아니겠지!’
아무리 실비아가 변태라지만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거기다가 19금 게임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노 프모로 모든 시장에서 버림받는 위험한 행동이니 권장할 리가 없을 텐데. 심지어 그냥 다인X도 싫은데 저 겸상하기도 싫은 문신뚱을 포함한 덩어리들과 다X플이라니….
“다인? 설마…. 어림도 없지!”
혼잣말하던 그녀가 ‘그건 안 돼.’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양손을 교차시켜 제 몸을 가린 채 ‘언감생심 누굴 넘보느냐!’라는 표정으로 원주민들을 째려보았다. 몸을 모로 돌린 채 천천히 위아래로 훑으며 꼬나보기까지. 앞서가도 너무 앞서가서 혼자 30세기쯤 갔다. 그들은 잠시 벙쪄 있다가 실비아보다 훨씬 격하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기분 탓이겠지만 어쩐지 그녀의 생각을 알아챈 것 같았다.
‘이건 아닌가. 그럼 혹시 좀 위험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일까? 관전하는 데 취미가 있다든지 말이야!’
그렇다면 부하들 앞에서 루카와 해야 할지도 몰랐다. 실비아가 루카의 허리를 끌어당기곤 진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순진하게도 자신에게 다가온 위험을 알아채지 못한 채 ‘실비아, 왜 그렇게 쳐다봐?’라고 할 뿐이었다.
실비아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바지춤을 부여잡곤 부하들을 향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취향 존중을 하겠단 마음을 한껏 담아 따봉을 날리며 눈도 찡긋거렸다. 눈을 가늘게 뜨며 실비아를 바라보던 부하들은 그녀가 몸을 돌려 엉덩이를 내민 채 손을 뒤로 뻗어 루카의 바지춤을 끄르려 하자 뒤늦게 웅성댔다. 간간이 길길이 날뛰는 자도 있었다. 잠시 ‘저 미친 여자 끌어내!’란 환청이 들려온 것 같기도 했다.
‘이것도 아닌가 보네!’
나뭇가지며 이상한 이세계에서 흘러온 깡통까지 실비아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루카의 바지춤에서 손을 뗀 그녀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무척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부하들에게 ‘무슨 생각 한 거야? 그런 생각 한 너희들이 이상한 거야’라는 듯 떽! 하는 시늉을 하며 시치미를 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이, 그래. 당연히 아니지. 이 19금 게임은 시시하기 짝이 없으니까 이런 위험한 루트가 있을 리가 없어.’
그건 그렇고, 모래시계가 없단 건 뭘 뜻하는 걸까? 단순한 수수께끼가 아니라 정말로 모두가 만족할 만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 같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얘네들…. 분명히 이지를 잃었을 텐데 생각보다 말귀를 잘 알아먹네.’
오염된 기운에 당한 것치곤 루카의 부하들은 여전히 눈치가 빨랐다. 그녀가 별말을 하지 않았어도 속뜻을 알아채고 화를 내거나 민감하게 굴었으니까 말이다. 수수께끼를 낼 때도 그랬었다.
‘말은 못 하는 거 같은데. 혹시? 눈치만 남아 있는 걸까.’
실비아는 <잊혀진 신전>에서 봤던 사막여우들을 떠올렸다. 이족 보행을 하는 그들은 유창하게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지 않았던가. 근데 얘네들은 원래 인간이었으면서 사막여우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멍청이, 해삼, 말미잘!”
확인차 들으란 듯이 쌍욕을 해 보자 부하들이 웅성댔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아무 대꾸도 없는 게, 오염된 기운 때문에 말은 알아들어도 대답을 하지 못하는 상태 같았다.
그때 루카가 다가와 실비아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모래시계도 없으니까 천천히 풀어도 될 것 같아. 그리고 가만히 관찰해 보니 쟤들은 우릴 공격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데?”
“그러네요.”
“첫 번째 창고를 우선 확인해 보자. 우리가 창고 쪽으로 가면 얘네들이 따라오거나 무슨 행동을 취하겠지.”
고개를 끄덕인 실비아는 원주민 차림의 부하들을 내버려 두고 첫 번째 창고의 입구로 향했다. 양옆에 조각상들이 있는 넓은 계단을 오른 둘은 두꺼운 석문 앞에 도착했다. 뒤를 돌아보니 기가 막히게도 부하들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쫓아내는 것도 아니고, 공격하지도 않고,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이상하네요.”
“그러게, 그냥 천천히 수수께끼만 생각하면 되겠다.”
고대 피라미드 같은 건축물 앞에 선 루카는 무심코 입구를 둘러보다가 뭔가를 발견한 듯 흠칫했다.
“뭐야, 이건. 이런 글귀는 예전에 왔을 때 못 보던 건데?”
“뭔데요?”
루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석문의 구석에 새겨진 구절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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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죽어서도 실컷 잘 수 있다고? 그럼 당장 죽어서 실컷 자자.]
[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고? 그럼 먹지 말고 굶어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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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 같은 구절들에 실비아의 눈빛이 썩은 동태 눈깔이 됐다. 이런 쓸모없는 소리를 왜 첫 번째 창고 석문에다가 적어 놓은 거지. 이거, 어떻게 보면 문화재 훼손 아냐? 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피라미드를 말이야. 저기 뒤에 있는 놈들이 새겨 놓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