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잠깐, 그러고 보니 림보. 림보가 아직 반려 짐승 호텔에 있구나. 룸서비스를 엄청 시켜 먹진 않았겠지.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만 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어.’
림보는 어쩌고 있을는지, 세비스는 무사히 크라켄을 처리했을지 여러 가지 걱정으로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섬에 들어와 있으니 전서구를 사용할 수가 없어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이 섬은 결계가 쳐져 있으니 전서구가 섬을 들어오려고 하는 순간 전기 구이가 돼 버릴지도 몰랐다.
실비아는 현생에 가족이 남아 있지 않았다. 비록 게임 세계지만 세비스와 림보랑 한 달 가까이 함께 살다 보니 친가족처럼 정이 들어 버렸다. 그러니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일. 실비아가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쳐 대자 루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왜 그래?”
“아뇨. 그냥 좀 걱정이 돼서. 섬 바깥이랑 연락할 방도는 혹시 없나요?”
“당연히 있지.”
실비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지레짐작해서 연락할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허무하리만치 쉽게 나오는 루카의 대답에 그동안의 걱정이 무색해졌다.
루카는 시계에서 수정구를 불러냈다. 그는 수정구를 건네주다가 여전히 자신을 향해 땡그랗게 뜬 초록색 눈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아니, 그럼 없는 줄 알았어? 순진한 우리 실비아, 섬에 머무를 동안 바깥이랑 연락을 못 하면 사업은 어떻게 하겠어.”
“아, 아! 그렇네요. 왜 생각을 못 했지.”
“그 대신에 섬이라서 일방향만 돼. 편지처럼 말이야. 그리고 스무 글자 제한이 있어.”
일방향에 글자 제한이 있다니, 조금 아쉬웠지만 현생에서도 바다 위에선 원활하게 연락하기 힘드니 납득할 수 있었다. 터보 주행이 있고 마법이 있는데 어째서 이런 부분에선 현실적인지 잠시 불만이 치밀기도 했지만 있는 게 어디냐며 자신을 다독였다.
루카가 일방향 수정구의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들어 보니 핸드폰으로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수정구를 구석으로 가져간 실비아는 림보가 있는 반려 짐승 호텔에 음성 편지를 한 통, 세비스가 몸을 의탁하고 있을 신전에 한 통, 총 두 통을 보내기로 했다. 노엘 님에게도 한 통 보내고 싶었던 실비아는 주소를 모른단 걸 깨닫고 아쉽지만 두 짐승에게만 보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레이저 반지를 사용하면 노엘 님에게만 통하는 비상 연락망처럼 사용할 수 있다고 했지. …이걸 아무 데나 사용할 순 없으니 우선은 참자. 주소를 알아둘 걸 그랬나. 노엘 님 저택에 바로 편지를 보내긴 뭔가 민망하단 말이야.’
의외의 부분에서 부끄러움이 많은 실비아는 저택 사용인들이 제 음성 편지를 먼저 받아 보게 될 테니 우선 참기로 했다. 그녀는 수정구를 켜 전송할 음성 편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 림보에겐.
[잘 지내니 걱정 마 림보는 고기 말고 싱싱한 것 섭취]
세비스에겐.
[밥 잘 먹기 림보는 잘 보살필 것 몬스터 감시 중 곧 감]
…이라고 녹음해 보냈다. 스무 글자 제한이라서 세비스에게 보내는 편지엔 여러 내용을 짧게 욱여넣을 수밖에 없었다.
‘음성 메시지가 있어서 다행이야. 림보는 글을 모르니 문자 메시지면 못 알아먹지.’
수정구를 통해 음성을 둘에게 보낸 실비아는 한결 안심한 표정으로 루카에게 수정구를 건넸다. 실비아의 편해진 표정을 보고 루카도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그러다가 대뜸 웃던 얼굴이 어색해졌다.
“잠깐, 그러고 보니 누구한테 음성을 보낸 거야?”
“보낼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저번에 봤던 집사 세비스랑 림보.”
“음, 그래. 집사…. 림보? 림보는 또 어떤 남자야?”
질투가 담긴 금빛 눈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집사라면 그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림보라니? 예상치 못한 낯선 이름을 듣자 루카가 고양이가 털을 바짝 세우듯이 경계했다.
“예? 저번에 봤잖아요, 림보.”
“저번에 봤다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루카의 모습에 당황한 실비아는 급하게 변명을 내뱉었다.
‘왜 저래.’
“수말이요, 수말. 자율 주행하는 내 외제마.”
“수말? 하, 그 노리끼리한 외제마 말하는 거구나. 난 또.”
기분 나쁜 티를 내던 루카는 수말이란 소릴 듣고 안도한 듯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실비아는 그 와중에 루카가 말한 림보의 털색을 정정해 주었다.
“노리끼리가 아니라 베이지색인데….”
어물쩍 뒷말을 삼키던 실비아는 뒤늦게 루카가 림보를 남자로 착각해서 질투를 했음을 알아차렸다. ‘어떤 남자냐’고 물었으니 질투한 게 맞을 것이다. 웬만해선 여유로운 표정이던 그가 날을 세우다니, 처음 보는 모습이 무척 귀여웠다.
‘아우, 귀여워라. 깨물어 주고 싶네.’
루카는 제가 한 착각에 뒤늦게 민망해진 듯 머쓱하게 턱을 매만지더니 이제 밑으로 내려가자고 말했다. 흐뭇하게 웃으며 ‘네, 네.’ 하던 실비아는 불현듯 든 생각에 가슴이 선득해졌다.
‘림보는 오해일 뿐이었지만 만약 노엘과 루카가 마주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노엘도 노엘인데 낚싯대로 낚았던 드래곤을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무척 두려워졌다. 그녀를 성층권으로 올려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할 데드엔딩을 맞게 했던 드래곤 새끼… 아니, 드래곤남.
그 남자 때문에 죽었던 기억을 떠올리자 잠시 기분이 나빠졌던 그녀는 다시 눈을 데로록 굴리며 생각에 빠졌다. 그때 봤던 기억으론 나한테 무척 호의적이었다고. 직진남 키워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 금방 공략할 수 있을 텐데, 김칫국을 한 양동이 들이켠 그녀는 불길한 상상을 이어 갔다.
‘분명히 걔는, 적어도 걔는 금방 공략하겠지. 그럼 조만간 공략한 캐릭터가 3명이 되는 건데, 셋이서 부딪히면 큰일이 일어날 거야. 이 일을 어쩐담. 좁아터진 마을에서 어떻게 마주치지 않게 동선을 짜냐고!’
노엘이나 루카도 그렇고 드래곤도 다 강한 족속들인데, 이루 말로 표현 못 할 참사가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어 몹시 두려워졌다. 마주치지 않게 시스템이 도와줄 것이란 기대는 눈곱만치도 들지 않았다. 이 망할 놈의 시스템은 그녀를 곤란하게 하는 데 누구보다 진심이니까.
무서운 상상에 두려워진 실비아는 괜히 오돌오돌 떨면서 조심스럽게 루카의 도움을 받아 전망대를 내려왔다.
사다리를 타고 조심스레 나무 밑으로 내려온 둘은 서둘러 공터를 벗어났다. 욕망에 눈이 어두워져 시간을 지체했으니 가능하면 오늘 안에 승부를 봐야 했다. 실비아도 급했지만 아마 루카도 급하긴 매한가지일 터였다.
“웬만하면 오늘 안에 공략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서 일정들이 다 꼬였어. 부하들도 빨리 원래대로 돌려놔야 하고 말이야.”
“그러게요. 오늘 공략을 마치고 싶네요.”
“전투를 해야 하나?”
수풀을 헤치며 나아가던 실비아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전투가 아닐 거예요. 아무리 이지를 잃었다곤 하지만 원래 사람인 부하들을 공격하는 건 되도록 피하는 게 좋겠죠. 그리고 전에 공략해 본 경험으론 아마도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게임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려던 실비아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 시합을 하게 될 거 같아요. 확신할 순 없지만요.”
“시합이라니. 그런 걸 한다고?”
“수수께끼만으로 끝날 수도 있고요. 가 보면 알게 되겠죠.”
대충 게임의 흐름을 보니 몬스터가 나타나는 던전들을 공략하고 나면 상위 몬스터들과는 미니 게임으로 시합을 하는 구조로 보였다. 그렇지만 수수께끼가 미니 게임일 수도 있고 다른 게임이 하나 더 있을지도 몰랐다. 확답할 수 없어 대충 얼버무린 실비아는 지도를 가진 루카를 따라 첫 번째 창고로 빠르게 뛰어갔다.
“후우, 일단 근처까지 온 거 같은데 이제 천천히 주변을 살피면서 가자.”
“허억, 아이고. 그래요. 천천히 가요.”
급한 마음에 미친 듯이 뛰었더니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잠시 제자리에 서서 숨을 돌린 둘은 걸음을 늦추면서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망대에서 봤을 때 이지를 잃은 루카의 부하들 말고도 발 달린 넝쿨 식물이 있었다. 걔네들이 매복했다가 덮칠지도 모르니 조심히 움직여야 했다.
사사삭. 그때 수풀을 건드리는 수상한 소리가 그들의 귀에 들어왔다.
“어?”
“수풀 안에 누가 있나 봐요.”
실비아는 인벤토리에서 망치를 불러냈다. 그녀는 불을 불러내기 위해 주문을 왼 루카와 함께 등을 맞대고 잠시 대기했다. 곧 예상한 대로 넝쿨 식물들이 튀어나왔고 눈앞에 몬스터의 이름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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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찍 휘두르는 넝쿨 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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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게. 웬 채찍이람, 찝찝하네.’
실비아는 찝찝한 표정으로 눈앞의 몬스터를 바라봤다. 라면 면발을 뭉친 것처럼 생긴 그것들은 자세히 보니 손에 하나씩 지들 몸에서 빼낸 넝쿨 한 가닥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채찍을 촥촥- 소리가 나게 땅에다가 내려치며 실비아네를 위협했다. 저 채찍에 맞으면 상당히 아플 것 같았다.
“조심해야겠어요.”
몬스터들은 채찍만 가진 게 아니라 일전의 <코코넛 라떼>들보다 속도도 빨랐다. 상대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몬스터들 같았지만, 어차피 근접전을 하는 게 아니니 크게 문제는 없었다. 실비아는 <부메랑 망치>와 함께 새로 익힌 기술인 <불 망치>를 섞어 쓰며 몬스터를 물리치려고 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얘네들은 넝쿨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알았다. 불붙은 넝쿨이 마치 촉수처럼 멀리 뻗어 나와 실비아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악!”
“괜찮아?”
실비아가 비명을 지르자 루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봤다. 불이 붙은 넝쿨이 팔을 후려치는 바람에 솜털이 타 버려 오징어 굽는 냄새가 났다.
‘세상에나, 촉수처럼 뻗어 나오다니. 무척이나 불길한 몬스터네. 19금 게임의 정석 루트를 안 타려면 조심해서 공격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