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루카의 팔짱을 낀 채 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자갈길이 아닌 금속 막대가 가리키는 대로 걷자 신기하게도 풍경이 변하더니 반복되던 자갈길이 사라지고 반대편 섬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금속 막대에 정신을 파는 사이에 역시나 가사는 무사히 도망쳤다. 이젠 신경을 안 쓰기로 한 실비아는 루카의 손을 잡고 금속 막대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둘은 무사히 반대편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건너편 섬과 비슷한 구조의 해변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제 망원경에서 봤던 원주민들, 아마도 루카의 부하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뜬금없이 한 명씩 나타나서 수수께끼를 냈다가 도망쳤다만 반복하면서 막상 쳐들어오니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니. 조금 전에도 나타났다가 사라졌기에 그들이 이 섬으로 들어왔단 걸 이미 알고도 남을 텐데,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지를 잃으면 시스템이 입력한 대로만 움직이는 걸까?’
한 바퀴 빙 둘러보던 실비아는 두 번째 창고가 있는 건너편 섬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섬의 중심부에 볼록하게 솟아 있는 산의 끄트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검지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을 가리키며 루카의 옷자락을 잡았다.
“루카 님, 저기 봐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요.”
“어? 설마 불난 건 아니겠지.”
그는 시계에서 망원경을 꺼내 연기가 피어오르는 산을 관찰했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입술을 초조하게 짓씹었다. 한참을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던 그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실비아에게 망원경을 들여다보게 해 주었다.
“어? 저거 화산 아니에요? 어쩐지 아까 온천이 있더라니.”
망원경으로 건너편 산의 꼭대기를 바라본 그녀가 놀라서 소리쳤다. 산봉우리 움푹 팬 빈 땅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이 난 게 아니라, 산 자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온천을 보고 실비아가 예상한 대로 정말 화산이 생겨난 거였다.
“그래. 내가 마지막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화산이 없었는데 갑자기 생겼어. 오염된 기운 때문에 환경이 변한 걸까.”
둘은 심각한 표정이 됐다. 거기다가 아까 저 섬에 머무를 때만 해도 산을 올라갈 때 유황 냄새 같은 건 맡지 못했는데, 언제 저렇게 맨땅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화산이 활동하기 시작한 걸까. 망원경으로 보니 언제 폭발할지 모를 아슬아슬한 상태로 보였다.
망원경을 접은 루카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실비아, 오염된 던전은 공략하고 나면 변했던 환경이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했지?”
“네, 저번에 보니까 그렇더라구요.”
“저 화산이 던전을 공략하고 나서 사라지면 좋으련만. 화산이 터지면 두 번째 창고는 끝장이야. 첫 번째 창고가 있는 이 섬도 저쪽 섬에서 화산이 터지면 같이 매몰되는 걸 피하기 힘들지.”
실비아는 낯빛이 어두워진 루카의 손을 잡고 다독였다.
“원래 없었던 거라고 했죠? 아까 저 섬에 머무를 때만 해도 유황 냄새가 나지 않았으니까, 던전 공략만 완수하면 저 화산은 없어질 거예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 너랑 같이 이 섬에 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앞으로도 늘 너랑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
루카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영혼 없는 플러팅 멘트를 치는 게 일상이던 루카의 입에서 나온 무척 보기 드문 순도 100프로의 진심이었다. 꼭 중요한 데서 눈치가 사라지는 실비아였지만 대놓고 진지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그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 마음에 답을 할 순 없었다. 그녀는 진지한 루카의 눈빛에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척 순진무구한 미소를 꾸며내며 시선을 돌렸다.
‘휴, 난 참 죄 많은 여자야. 이놈의 19금 게임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문어발을 걸치게 생겼네.’
앞으로도 세 명의 공략 캐릭터를 더 공략해야 하는데, 이 밀려드는 죄책감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점점 현실처럼 느껴지는 감각 때문에 눈앞의 캐릭터들이 단순한 공략 캐릭터로만 보이지가 않았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눈을 흐릿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현실에서라면 커뮤니티 게시판에 박제돼 조리돌림을 당해야 마땅할 희대의 쌍년이겠지만 이 게임을 공략하지 않으면 나태지옥으로 직행하니 독하게 굴어야 했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다시 다짐하는 거지만, 찔려오는 양심을 무시하며 차가운 심장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실컷 따먹으리라. 루카도 시간이 되는 한 최대한 따먹어서 씨앗을 모으고 나머지 세 명의 캐릭터도 아주 제대로 홀려서 다섯 다리를 걸치겠다. 난 차갑고 냉정한 여자다…. 독기가 가득하다…. 내 아랫도리는 공략 캐릭터 모두의 것이다….
마인드 컨트롤을 마친 그녀는 태연하게 싱긋 웃으며 루카를 돌아봤다.
“함께 있으면 되죠.”
“응….”
할 말이 더 있어 보이는 루카를 뒤로하고 그녀는 해변의 안쪽으로 씩씩하게 걸어갔다.
“첫 번째 창고는 어디에 있는 거죠? 거기에 루카 님의 부하들이 있으려나?”
“…하아, 글쎄. 우선은 상황이 어떤지 확인을 해 보는 게 먼저일 것 같아.”
루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던전 공략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제 마음을 표현하다니, 뒤늦게 섣부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둘이 피할 곳도 없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제 마음을 밀어붙이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좀 비겁해 보였다.
평소에 쓰레기 짓만 일삼던 루카는 사랑에 있어선 누구보다 젠틀하고 진심 어린 남자가 됐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할 게 아니라 마을로 돌아가서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받아 주겠지? 받아… 주려나? 거절당하면 어쩌지. 아냐, 괜히 땅굴파지 말고 차근차근 다가가자.’
어쩐지 생각할수록 자신감이 줄어들며 안 좋은 상상만 계속 이어졌다. 제 외모만 믿고 어떤 여자든 후릴 수 있다고 생각하던 그로선 생경한 경험이었다. 쓰려 오는 가슴을 잠시 손으로 문지른 그는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실비아의 마음을 얻기로 결심했다.
“루카 님?”
따라오는 기척이 없어 의아하게 생각한 실비아가 돌아보자 루카가 뒤늦게 그녀를 따라왔다. 시계에서 지도를 꺼내서 살펴본 루카는 실비아를 데리고 한참을 걸어갔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고지대로 올라가다 보니 수풀이 나타났다. 수풀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니 둘은 탁 트인 커다란 공터에 다다랐다.
“야호!”
야호야호야호…. 실비아가 야호를 외치자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릴 정도로 큰 운동장 크기의 공터였다. 큰 아름드리나무가 공터 한가운데 있었고 그 앞엔 나무 둥치랑 비슷한 색의 벤치가 있었다. 산중턱으로 바닷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무성한 나뭇잎을 살금살금 흔들고 지나갔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집채만 한 나무를 본 초록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이렇게 큰 나무는 살아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실비아는 설레는 마음으로 나무 밑으로 다가갔다. 옹이구멍을 뒤적여 보면 딱따구리나 다람쥐가 나오지 않을까. 그 앞에 있는 벤치는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즐거울 것 같았다.
‘인스X에 사진 찍어 올리면 좋아요 한 1만 개는 받겠어. 보기만 해도 좋네!’
즐거워진 그녀는 제 덩치의 스무 배는 족히 넘을 거 같은 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상쾌해지는 느낌을 만끽했다. <여행자 꾸러미>에서 꺼낸 새 옷은 품이 넓었기에 작은 몸이 움직이는 대로 너풀너풀 함께 회전했다.
“와! 한 100년은 살았을 거 같아요. 할아버지 나무네요.”
“어렸을 때 여기서 가족들이랑 피크닉을 자주 했었는데. 형이랑 보물찾기도 했었어. 오늘따라 형이 보고 싶네….”
루카는 과거를 추억하듯 아련한 눈빛이 되더니 벤치와 나무 사이로 걸어갔다. 커다란 손이 벤치의 등받이를 부드럽게 쓸었다. 까르르거리며 즐겁게 춤을 추던 그녀는 불쌍해 보이는 그 모습에 눈치를 보며 춤을 멈췄다. 그러고 있는 걸 보니 뭐라도 물어봐야 할 거 같았다.
굳이 아는 척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대놓고 우울한 분위길 풍기는데, 위로를 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 실비아는 아까 안개 속에서 만났던 루카의 형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 루카 님 형은 어떤 분이세요?”
“형? 음…, 듬직한 형이었어.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았거든. 똑똑하고 마법에도 소질이 뛰어났어. 그래서 아버지가 기대를 많이 하셨지.”
“그랬군요.”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의 말이 이어졌다.
“원래는 형이 후계자였는데, 언젠가부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 후계자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어. 그 후에는 세상만사에 관심을 안 가지더니, 어느 날 허망하게 가 버렸지.”
“아….”
“…형은 자신이 죽을 걸 알고 후계자가 되길 포기한 걸까.”
씁쓸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실비아는 신중하게 할 말을 고르다가 그냥 침묵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루카의 등 뒤로 다가가 손을 들어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의 등에 살며시 얼굴을 기댄 채 조심스럽게 허리를 껴안자,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 위로 겹쳐졌다. 평소엔 운동장 같이 넓어 보이던 등이 오늘따라 쓸쓸하고 작게 느껴졌다.
처음에 봤을 땐 얼굴만 예쁜 인간 쓰레기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이런 슬픈 사연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커다란 몸을 더 힘주어 꽉 끌어안았다.
낮에 만났던 루카의 형은 동생이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단 걸 알까. 루카의 꿈속에는 그의 형이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여러 가지 궁금증으로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와 동시에 대체 왜 그가 자신 앞에 나타난 건지 의문이 들었다.
‘왜?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이게 게임이란 걸 알고 있는 걸 보면 특수 NPC인 걸까? 그렇다면 게임 스토리랑 관련이 있단 소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