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이게 아닌가.”
“혹시 이거 아닐까요?”
실비아는 손가락으로 오케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병사 앞으로 가 미니 백에 들어 있던 동전을 하나 건넸다. 실망스럽게도 아무 반응도 없었다. 이 순간에도 모래시계의 모래는 계속해서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초조하게 손톱을 쥐어뜯던 실비아는 그냥 생각난 대로 해 보기로 했다.
“돈이 아닌가. 아, 그럼 이건?”
눈을 질끈 감은 실비아가 동그랗게 모은 손가락 사이에 검지를 넣었다가 빼는 동작을 몇 번 하자 루카가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19금 게임에 빙의 되어 있으니 아무래도 머리가 그쪽으로만 돌아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이것도 답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 진짜 뭐지.”
“그러게요…. 잠깐.”
실비아는 루카의 팔을 잡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곤 병사들이 취하고 있는 포즈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자세히 보니 첫 번째 병사는 조그만 돌멩이를 손가락으로 들고 있었고 두 번째 병사는 집게손가락 하나를 든 자세였다. 그리고 세 번째 병사는 방금 실비아가 검지를 넣었다 뺐다… 한 병사로,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루카가 손을 맞잡았던 병사로 손바닥을 내밀고 있었는데, 마치 뭘 달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 뭔지 알 거 같아요.”
실비아는 바닥에서 조그만 돌멩이들을 급하게 찾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루카도 뭔가를 깨달았는지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고 함께 돌멩이를 모으는 걸 도왔다. 이삭 줍는 사람들처럼 연거푸 허릴 수그려 가며 돌멩이를 모은 둘은 개수를 헤아린 뒤 얼른 돌덩이들 앞으로 뛰어갔다.
“손바닥한테 가요!”
루카와 실비아는 바닥에서 주운 돌멩이 열 개를 들고 두 손바닥을 모아 펼치고 있는 병사의 앞으로 갔다. 혹시나 답이 아닐 경우엔 다른 수를 찾아야 하니 마음이 급했다. 서둘러 병사의 손바닥 위에 돌멩이를 펼쳐 놓자 잠시 후 돌덩이들이 흔들리더니 스르륵 옆으로 비켜섰다. 수수께끼가 풀리며 길이 생긴 것이다. 실비아는 환호성을 지르며 루카의 두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야호! 풀었어요. 생각보다 간단한 거였네요!”
“그러게. 실비아, 네 덕이야. 수수께끼에 소질이 있는데?”
“수수께끼는 절실한 자만이 풀 수 있다구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 해요.”
실비아가 뿌듯해하며 어깨를 으쓱하자 루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하던 루카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말을 꺼냈다.
“…그래. 시간제한이 있으니 뭐든 하는 거. 그래, 뭐, 나쁘지 않아. 그렇지만… 아까처럼 내 부하들 앞에서 아기를 만드는 건 좀 자제하는 게 어떨까. 난 우리 둘이 함께 있다는 게 중요하지, 딴사람들 앞에서 하고 싶지 않아. 아기 만들기는 성스러운 일이니까 좋은 장소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해야….”
루카가 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했지만, 실비아는 정신이 딴 곳에 팔려 있어서 깊이 새겨듣지 않았다. 정화를 해야 하는데, 루카의 부하 가삼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 걔 어디 갔지?”
그녀는 루카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두리번거리며 가삼이를 찾았다. 역시나 아까의 가이처럼 루카와 대화를 나누는 새에 가삼은 몰래 도망쳐 버렸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실비아는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루카 님 부하가 또 도망쳤네요. 이거 다음에 또 만나면 망치로 대가리, 아니 머리부터 깨고 시작해야 하나.”
“머리를 깬다니, 그런 꼴이 됐어도 나한텐 소중한 부하들이야.”
“오해하지 마세요. 정화를 하려면 머리를 깨야 해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루카에게 그녀는 어떤 방식으로 정화를 하는 건지 대략적으로 알려 주었다. 시간이 없으니 뚫린 길을 걸어가면서 설명해 주자 그가 뒤늦게 납득을 했다.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하던 둘은 힐끗힐끗 앞을 보며 걷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까 전에는 분명히 코앞에 섬이 보이는 것 같았는데, 한참을 걸었는데도 아직 저 멀리에 섬이 있었던 것이다. 섬이 움직이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은 앞을 주시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역시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건너편 섬은 가까워지는 거 같더니 어느 순간 다시 멀어지길 반복했다. 신기루도 아닌데, 마치 섬이 그들을 피해 도망치는 것 같았다.
“이상하네요. 섬이 계속 멀어지는 거 같아요. 저만 그렇게 보이는 거 아니죠?”
“그러게. 왜 저런 거지?”
‘이거 뭐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실비아는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다시 앞을 바라보니 앞뒤가 똑같은 전화번호… 같았다. 반으로 접은 데칼코마니처럼 말이다.
“왔던 길이랑 가야 할 길의 풍경이 똑같네요.”
“응? 정말 그러네. 아, 뭘 어쩌자는 거지. 혹시 지나친 거 없나 길을 제대로 살펴봐야겠어.”
둘은 바닥을 유심히 살피면서 걸었다. 루카의 손목시계를 보니 이제 2시 30분이었다. 30분만 더 있으면 다시 밀물 시간이라 그 전에 건너편 섬으로 가든가, 아니면 다시 돌아가든가 해야 했다. 시간 안에 해결책을 못 찾으면 돌아가지도 못하고 바닷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때 자갈길 가운데가 움칠움칠하더니 바닥이 진동했다. 그러다가 불룩, 뭔가가 솟아오를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설마 망둥어 같은 몬스터라도 나올까 싶었던 실비아는 망치를 꺼내 앞에서 대기했는데, 곧 속에서 뭔가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듯 솟아오르는 머릴 내려치려던 실비아는 가까스로 참았다.
“가사야!”
다섯 쌍둥이 중 넷째인 가사였다. 루카가 반갑게 네 번째 문신뚱땡이를 불렀다. 그녀는 속으로 별 쓸데없는 등장 퍼포먼스를 한다고 생각했으나 딱히 티 내진 않았다. 이쯤에 와서 생각한 건데, 개발자가 엑스트라들 따위에게 캐릭터 디자인을 해 주기 싫어서 얼굴을 통일한 것 같았다. 심지어 이름도 가나다라에서 제일 먼저 오는 ‘가’를 돌림자로 써서 뒤에 ‘일이삼사오’만 붙인 게 아니던가.
‘그래, 뭐. 나라도 귀찮아서 그러긴 하겠다.’
땅에서 두더지처럼 솟아오른 가사는 역시나 옆구리에 있던 망에서 두루마리를 꺼내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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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현재의 거울일지니, 이를 알게 되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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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거창한 말이었다. 저건 대체 뭘 말하는 걸까. 가사도 역시 가이, 가삼처럼 모래시계를 옆에 내려놨다. 그리고 망을 뒤적거리더니 실비아에게 자물쇠가 있는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다. 자물쇠는 돌려서 여는 방식으로 비밀번호 네 자리를 맞혀야 했다.
“저게 대체 뭔 뜻일까요? 짐작도 안 되네.”
“아, 뭐지?”
“과거는 현재의 거울? 뭔 말이지. 아오.”
초조해진 실비아는 우선 ‘1234’나 ‘1111’ 같은 평범한 번호로 도전했으나 자물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초조해져서 아무 번호나 눌러봐도 여전히 꿈쩍 않는 건 매한가지. 이러다가 수수께끼를 못 풀면 게임 오버가 되는 건 아닌가 싶어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루카도 수수께끼를 못 풀면 오염된 던전 안에 영영 갇힐까 불안해했다.
생각하는 사이에도 모래는 이미 반이나 내려왔다. 실비아는 초조하게 손톱을 쥐어뜯으며 서성거렸고 루카는 계속 떠오르는 숫자를 돌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라니, 거울을 보듯이 같은 숫자를 입력하라는 소리 같긴 한데.”
“아! 그렇네요.”
그런 숫자가 뭐가 있을까? 실비아는 다시 자갈길의 앞뒤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데칼코마니….
당장 떠오르는 숫자가 있었다.
“8888! 8888을 넣어 봐요.”
“아! 그게 답이겠네. …아닌 거 같은데?”
“허어, 이게 아니면 뭐지?”
앞과 뒤가 똑같다. 뒤집어도 똑같다. 뒤집어도 똑같은 수…. 앞선 두 번의 수수께끼에선 19금 게임답지 않은 건전한 답이 나왔지 않았던가. 방심하게 해 놓고 페이크를 쳐서 이번엔 정말로 19금 게임다운 수수께끼를 냈을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바로 떠오르는 번호가 있었다. 결론을 내린 실비아는 자신이 생각한 숫자대로 자물쇠를 돌렸다.
‘6969, 옆으로 돌리면 똑같은 숫자가 되지. 거지 같지만 왠지 이게 답인 것 같아.’
설마 했는데 다행히 이번엔 19금 게임이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덜컹-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리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평소에 변태 같은 생각만 하고 산 덕을 톡톡히 봤다.
이 수수께끼는 ‘6969’ 같은 괴상망측한 번호가 답인 주제에 문구가 너무 거창하고 명언 같은 게 함정이었다. 앞의 두 수수께끼의 답이 너무 정상적이었던지라 그 추세에 집착했다면 맞히지 못했을 터였다. 허접하게 잔머릴 굴린 시스템을 비웃으며 그녀가 뿌듯해하고 있는데, 루카가 옆에서 함께 즐거워하며 수수께끼의 답을 궁금해했다.
“우와! 맞혔네. 실비아, 답이 뭐였어?”
“그건…. 음, 6969가 답이었어요.”
“6969? 아, 그게 답이었다고? …아아, 그것도 옆으로 뒤집으면 같은 수가 되긴 하네. 어떻게 그렇게 바로 안 거야? 똑똑하다!”
순진무구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루카는 ‘69’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실비아는 이 변태 같은 숫자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싶어 잠시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이 세계에선 섹스할 때 69를 안 하나. 아니지, 그런 용어가 없는 거겠지. 뭐라고 해야 하지.’
입을 달싹거리며 설명하려던 그녀는 곧 고개를 가로젓곤 뜻 모를 미소를 흘렸다.
“후후, 나중에 제대로 알려 줄게요. 지금은 몰라도 돼요.”
“응?”
루카는 끝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키득거린 실비아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상자 안을 다시 바라보았다. 안에는 기역 모양의 금속 막대가 들어 있었는데, 마치 현생의 수맥 탐지기처럼 보였다. 그걸 양손에 들자 금속 막대가 사선으로 꺾였다.
“설마 이 방향으로 가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