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모래시계와 두루마리를 그물망에 챙긴 가이가 뒤꽁무니가 빠질 정도로 빠르게 뛰어가고 있었다. 그는 잠시 뒤돌아 루카와 실비아를 불안하게 쳐다보더니 마저 후다닥 도망쳐버렸다. 굼뜨게 생겨서 날쌘돌이가 따로 없었다.
“어, 저기! 도망간다! 루카 님, 부하가 저기 가는데요?”
“후, 괜찮아. 하는 짓을 보니 나중에 또 나타날 거 같아. 도망친 애는 나중에 찾고 우선 창고부터 살펴보자.”
실비아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창고의 입구에 들어섰다. 창고로 들어가자 퀴퀴하고 묵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공중을 떠다니는 먼지를 손으로 휘휘 저어 내쫓던 실비아는 번쩍거리는 보물들을 보며 눈을 땡그랗게 떴다. 산처럼 쌓인 금화하며 어디서 본 적 없는 진귀한 보물들이 아무렇거나 사이사이에 널려 빛나고 있었다.
“우와! 엄청나네요.”
“다행히 여길 열어 보진 못한 모양이야.”
보물들을 찬찬히 살피던 루카는 금화더미 위로 올라가더니 금색 상자를 하나 들고 내려왔다. 그리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실비아에게 건넸다.
“자! 선물이야.”
“선물요?”
“아니다. 선물이라고 하기엔 뭣하지, 선물은 나중에 많이 줄게. 이건 창고를 여는 걸 도와준 보답이야.”
잠시 망설이던 실비아는 상자를 건네받아 조심스럽게 열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고, 안을 들여다 본 실비아는 이게 뭔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상자 안에는 아주 조그만 금색 천 쪼가리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천 쪼가리엔 자잘하게 자수도 새겨져 있고 단추도 달려 있었다.
‘옷인가? 주문을 외면 크게 늘어나는 원피스 같은 거? 아냐, 이건 조끼 같은데.’
손가락에다 끼워서 살펴보고 있으려니 루카가 옆에 와 금색 천 쪼가리가 뭔지 알려 줬다.
“어때? 이건 전서구 옷이야.”
“전서구 옷이요?”
“응. 저번에 우연찮게 봤는데, 너희 집 전서구가 헐벗고 돌아다니더라고.”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는 루카의 모습에 실비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가락에 꼬깔콘처럼 낀 전서구 옷을 만지작거렸다. 보통 새들은 다 헐벗고 다니지 않나?
“아…. 새, 새인데? 헐벗는 게 원래 정상… 아니었어요?”
“야생 새도 아니고, 헐벗고 다니면 소속감도 안 생기고 도망가기 딱 좋지. 이걸 입히면 탈출할 확률이 좀 줄어들어.”
“그래요?”
실비아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을 짓자 루카가 말을 더 얹었다.
“그래. 헐벗고 있다가 참새 떼 사이로 숨으면 찾지도 못한다고. 헐벗은 전서구들끼리 모여서 노조라도 만들어 봐. 그럼 얼마나 골치가 아픈지….”
“아! 맞네요. 도망갔을 때 구분하기 좋긴 하겠어요. 노조라, 노조까지 만들 줄은.”
무서운 말이었다. 실비아네 전서구가 노조에 들어간다면 회유와 협박을 당한 일을 만천하에 까발릴지도 몰랐다. 짹짹 소리를 내 봤자 누가 들어주기나 하겠어, 라고 잠시 생각했지만 여긴 게임 세계.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불길한 상상으로 사색이 된 실비아는 거듭 고맙다고 말하며 미니 백에 전서구 옷을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그녀의 속을 모르는 루카는 걱정 말라는 듯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토닥였다.
“아, 이건 내가 너무 간 거고. 모이만 잘 챙겨 주면 그럴 일 없어. 네가 어련히 잘 했으려고.”
“그, 그렇죠.”
실비아는 찔끔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루카는 그녀의 이상한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
“참고로 우리 집 전서구는 50마리가 넘어. 사업을 하려다 보니 연락할 곳이 워낙 많아서 수정구론 한계가 있거든. 저번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전서구들 출산 휴가는 물론이고 연차까지 살뜰히 챙겨 주고 있어. 자기 개발비도 일 년에 한두 번 지급하지. 그랬더니 가끔 시키지도 않은 초과 근무도 해 주더라니까. 그리고….”
루카의 자기 자랑이 이어졌다. 듣다 보니 실비아가 전서구로 취직하고 싶어질 정도로 훌륭한 근무 환경이었다. 피라미드 사업을 하는 나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그보다 자신이 더 나빴다. 부끄러워진 실비아는 말라비틀어진 옥수수 주머니를 입에 물고 힘없이 날아가던 참둘기를 떠올리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앞으론 잘해 줘야겠어. 이것이 도망을 안 갔어야 잘 해 주든가 말든가 할 텐데. 세비스가 잘 감금해 놨길 바랄 수밖에….’
전서구 자랑을 마친 루카는 창고를 자세히 둘러봤다. 그동안 실비아는 참둘기를 떠올리며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창고 확인이 다 끝나고 둘은 얼른 밖으로 나왔다. 루카의 시계가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어서 한시가 급했다. 오후 3시가 지나면 만조가 돼서 건너편 섬으로 건너가지 못할 테니 또 하루를 기다려야 했다. 창고를 나오자마자 몸을 털고 재빨리 뛰어가려는 실비아를 루카가 불러 세웠다.
“실비아! 시간이 촉박하니 이걸 입고 가자.”
“이게 뭔가요?”
루카는 기다란 폭죽처럼 생긴 물건을 들고 있었다. 그가 물건의 옆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옆구리에서 무언가 부풀어 오르더니 조끼가 되었다.
“이건 좌표만 찍으면 바로 원하는 곳까지 점프해서 갈 수 있는 조끼야. 탈출할 때 쓰기 딱 좋지. 가끔 사소한 탈이 나긴 하지만….”
뒷말을 흐린 루카는 그녀의 몸에 손수 폭죽 달린 조끼를 입혀 주며 버튼을 눌러 좌표를 세팅했다. 점프라니, 어떻게 점프한단 거지? 폭죽 같이 생긴 건 뒤에 왜 달려 있는 거야. 실비아가 불안에 떨며 제 뒤에서 옷을 입혀 주는 루카를 거듭 뒤돌아보자 루카가 안심하라는 듯 토닥였다.
“괜찮아. 무슨 걱정 하는지 알겠는데,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내려올 때 공중을 한 번 딛고 낙법을 써. 그럼 아무 문제없지.”
“공중딛기요? 정말 아무 문제없는 거 맞나요?”
“어어. 에이, 우리 실비아. 많이 불안하구나.”
‘당연히 불안하지. 이거 잘못하면 즉사하는 거 아냐?’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루카는 탈 것도 없는 지금, 바닷물이 다시 차오르기 전에 바닷가에 도착하려면 이 조끼를 입고 가는 게 가장 빠르다고 했다. 그녀와 똑같은 조끼를 착용한 루카는 조그만 불씨를 손가락에서 불러낸 뒤 실비아가 등 뒤에 메고 있는 폭죽에 불을 붙였다.
슈웅- 소리와 함께 하늘로 올라갔던 실비아는 아찔한 느낌에 눈을 감으려다가 번뜩 눈을 홉뜨고 정신을 차렸다. 살다 살다 드래곤 등에도 올라타더니 이젠 폭죽 조끼로 하늘로 날아오르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조그만 몸뚱이는 순식간에 로켓처럼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바닷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낙하했다.
어지러운 와중에 밑을 바라보니 자갈 마당이 보였다. 저기에 몸이 갈리면 바로 즉사일 것 같았다. 침을 한 번 꼴딱 삼킨 그녀는 루카가 알려 준대로 침착하게 공중 딛기를 한 번 하고 낙법을 해, 무사히 바닥에 착지… 하긴 했으나 고통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그녀가 뒹굴자 자갈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끄아아악!”
“크흑!”
곧 뒤따라 낙법을 하며 바닥에 착지한 루카도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뒤늦게 울면서 항의하는 실비아에게 안 아프단 소리는 한 적 없다고 하지 않았냐는 루카의 변명이 돌아왔다. 어찌 됐든 약간의 고통을 감수한 덕에 둘은 순식간에 바닷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룩 기룩-. 갈매기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햇빛이 가장 강할 시간인 정오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곧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고개를 들어 멀리 내다보자 섬과 섬 사이 살짝 솟은 지대의 물이 다 빠져나가 넓은 자갈길이 보였다. 자갈길 사이사이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바닷물이 여기저기 고여 조그만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썰물과 밀물에 오랜 세월 쓸려 반들반들해진 자갈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실비아는 이마에 손을 대며 건너편 섬을 내다보았다.
“그냥 걸어가면 되는 걸까요?”
“응. 빨리 가자.”
“오후 3시가 지나서 바닷물이 차면 이쪽으로 다시 못 돌아올 텐데.”
루카는 그녀의 손을 깍지 껴잡곤 자갈길로 이끌며 말했다.
“건너편에는 이쪽 섬에 있던 은신지랑 비슷한 곳이 하나 더 있으니 걱정 마. 근데 그게 문제가 아냐. 아까 도망쳐 버렸던 가이를 보니 원주민들이 다 내 부하인 것 같은데. 어떻게 되돌려 놓지?”
“그건 저번에 말한 대로 저한테 다 맡기세요. 던전의 오염된 기운을 다 정화하면 원래대로 돌아갈 테니까.”
대화를 나누며 사이좋게 길을 건너가던 둘은 자갈길 중간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바위들을 발견했다. 바위는 얼핏 보면 눈 코 입 달린 사람처럼 보였는데, 마치 조각가가 투박하게 깎은 작품 같기도 했다. 그런 바위가 여러 개 쭉 늘어선 채 그들을 막고 있었다.
“사람 같이 생긴 바위들이네요. 저 바위 중 하나가 수수께끼를 낸다거나 하진 않겠죠?”
“설마….”
그때 가운데 바위가 흔들렸다. 설마 움직이는 건가 싶어 긴장을 하는데 바위가 흔들흔들거리더니 검은 인영이 점프하듯 튀어 올랐다. 폴짝 뛰어내린 사람을 살펴보니 원주민 차림을 한 문신뚱땡이였다. 루카는 반가운 얼굴로 소리쳤다.
“가삼아!”
다섯 쌍둥이 중 하나인 가삼이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다 똑같은 사람 같은데 루카는 어떻게 구분을 하는 건지 신기했다. 제 형제 가이처럼 말없이 두루마리를 펼친 가삼은 동시에 모래시계를 뒤집어 자신의 손 위에 올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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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이 원하는 것을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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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두루마리를 읽은 실비아는 일렬로 늘어선 바위들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이제 와서 보니 바위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조각상과는 달리 뭉툭하게 깎여 있어서 어림짐작만 할 뿐이었지만 누군가는 창을 들고 있고 누군가는 방패를 든 모습이기도 했다.
“병사들이 원하는 거라니, 대체 뭘까요?”
“글쎄. 시간이 없으니 조금 전처럼 뭐라도 해 보자.”
침묵하는 가삼을 앞에 둔 채 실비아와 루카는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며 머리를 쥐어짜 냈다. 이게 아닌가 저게 아닌가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루카는 괜히 손바닥을 펼치고 있는 병사 앞에 가서 손을 마주 잡는 포즈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