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루카는 시계에서 인장을 꺼내서 입구에서 주문을 외더니 반응 없는 문을 보며 황당해했다.
“이게 왜 이러지? 이러면 문이 열려야 하는데, 반응이 없네.”
“그래요?”
둘이 허둥지둥하는데, 입구 옆의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연기와 함께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나타났다. 전날 절벽에서 망원경으로 봤던 원주민들처럼 야자수로 겨우 중요 부위만 가린 헐벗은 차림이었고 얼굴에도 염료로 붉은 칠을 했지만, 자세히 보니 낯이 익었다. 잠시 눈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짚어 보던 실비아는 바로 놀라서 소리쳤다.
“어…? 문신뚱…. 루카 님 부하잖아요!”
“아, 다행이다. 가이! 살아 있었구나.”
루카가 문신뚱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열한 암흑가의 후계자지만 내심 사라진 부하들을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루카가 말을 건네도 문신뚱…. 아니, 가이는 묵묵부답이었다.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은 무미건조한 문신뚱의 눈…. 역시 예상대로 오염된 기운에 당해 이지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멀뚱히 서 있는 가이를 내버려 두고 실비아가 루카의 옆구리를 치며 속삭였다.
“가이요?”
“응, 저번에 봤던 가일이…. 아, 이렇게 말하면 모르겠구나. 저번에 본 몸집이 통통하고 문신한 내 부하 있지? 걔가 다섯 쌍둥이거든. 쟤는 가이고 가삼, 가사, 가오가 다 내 밑에서 일하고 있어.”
문신뚱땡이가 한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이라는 사실과 그들 각각의 이름까지, 평생 몰라도 될 정보를 한꺼번에 다 들어 버렸다. 쓸모없는 정보를 주입받자 실비아는 귀를 씻고 싶어졌다.
‘걔네 이름 따위 별로 안 알고 싶은데.’
루카는 자신을 경계하는 가이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오염된 기운으로 변한 거 같아. 저렇게 시건방지게 쳐다볼 애가 아닌데….”
“그러게요. 눈빛을 보니 완전 맛이 간 거 같긴 해요.”
실비아는 마을에서 봤던 문신뚱땡이와 멸치를 떠올렸다. 둘은 루카에게 무척이나 저자세였다. 저 사람도 아마 제정신이면 루카 앞에서 저런 건방진 눈빛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실비아는 시건방진 부하의 모습에 혹시 화가 났을까 싶어 힐끗 루카를 바라봤다. 다행히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어려 있을 뿐이었다. 그는 맛이 간 부하를 염려할 뿐, 무턱대고 화를 내는 자비 없는 보스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앞에서 사람 둘이서 저를 놔두고 조그맣게 쑥덕거리는데도 가이는 전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는 뚱한 얼굴로 있더니 둘둘 말려 있던 두루마리를 세로로 펼쳤다. 두루마리가 다 펼쳐지자마자 실비아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필수 퀘스트
- <안개로 싸인 보물섬>의 수수께끼를 모두 풀어라
- 루카의 부하들을 모두 다 정화하라.(0/30)
성공 보상 : 던전 클리어 보물 상자
실패 시 : <무인도에서 50년, 난 그렇게 살아남았다> 엔딩]
———————————————
‘그래, 이거지. 이제야 퀘스트가 뜨네.’
기다리던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창을 훑어 본 실비아는 실패 시 뜨는 엔딩에 잠시 섬찟함을 느꼈다.
‘무인도에서 50년 살다가 죽으란 거야? <엔딩 회귀권>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던전 클리어 보물 상자>의 아이템은 퀘스트를 완수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실비아는 퀘스트 창을 끄고 가이가 들고 있는 두루마리를 바라보았다. 루카는 당황한 목소리로 실비아에게 속삭였다.
“뭐 어쩌라는 거지?”
“수수께끼 같은데요? 저걸 풀라는 것 같네요.”
두루마리의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
[아기사자는 가족을 만나고 싶어 한다.]
———————————————
그때, 가이가 옆에 멘 그물망을 뒤적거리더니 모래시계를 꺼내 바닥에 내려놨다. 모래가 다 내려오기 전에 수수께끼를 풀란 소리였다. 시간제한이 있는 수수께끼라니, 마치 현생의 방탈출 카페 같았다.
‘방탈출 카페라면…. 전에 친구들과 하러 갔다가 너무 어려워서 다신 안 갔던 곳인데.’
실비아는 방탈출 게임에는 소질이 없었다. 친구들이랑 갔다가 기물을 망가트리는 바람에 모니터하고 있던 주인이 스피커로 그거 아니라고 외쳤던 전적도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 봐야지.’
둘은 마음이 급해졌다. 아기사자라니, 당장 눈에 보이는 건 대리석길 양옆에 늘어선 조각상들이었다. 실비아는 루카와 함께 조각상들을 살피다가 암사자와 수사자가 함께 마주 보고 있는 조각상을 발견했다.
“아기사자는 없는데?”
“그러게요. 루카님은 뭐 알고 계신 거 없으세요?”
“글쎄. 딱히 여기 있는 조각상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서….”
둘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는 동안 가이는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손가락들로 입술을 두드리던 실비아는 번뜩 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혹시?
19금 게임이니까 19금 수수께끼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니, 19금 수수께끼일 것이다. 실비아는 확신했다!
“아기사자가 안 보이는 거 보니까, 음. 이 조각상 들어 올릴 수 있나요?”
“어? 뭐, 들어 올리려면 들어 올릴 수 있지.”
“음…. 자, 그럼 수사자를….”
실비아는 막상 실행하려고 보니 이게 맞나 싶긴 했지만 떠오르는 건 뭐든 시도해 봐야 했다. 그녀는 루카에게 수사자를 들어서… 암사자 위에 올리도록 했다. 그녀의 요구에 루카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뭐? 암사자 위에 수사자를?”
“예, 혹시 모르죠. 아기를 만들라는 건지도.”
루카의 말에 따르면 보석을 건드리지 않는 한 조각상은 공격하지 않는다고 했다. 루카를 도와 낑낑대며 암사자 위에 수사자를 얹은 실비아는 아무 변화도 없는 조각상을 보고 진땀을 흘렸다. 어쩐지 망부석처럼 서 있던 가이의 얼굴에도 땀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아닌가?”
“…집어넣어야 하나 봐요.”
“아…. 뭐?!”
금빛 눈이 경악으로 떠졌지만 실비아는 냉정한 표정으로 수사자의 아래를 더듬거렸다. 거시기가 조각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수사자 조각상의 뒤꽁무니에 붙어 아래에 손을 집어넣고 더듬거리자 가이와 루카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실비아는 나름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수사자의 다리 사이는 휑했다.
“없네. 거참, 왜 없어?”
“…그거일 리가 없지 않을까?”
“그렇게 보지 마세요. 루카 님이 모르는 뭔가가 있어요.”
‘이 세계가 19금 게임 세계란 건 나만 알고 있으니까, 틀림없어!’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실비아는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발견해 황급히 주워 왔다. 한번 꽂히니 답이 이거밖에 없어 보였다. 그녀는 수사자 조각상의 휑한 아래에 나뭇가지를 맞댄 뒤 암사자 뒤에 붙어 뒤치기하는 자세로 퍽퍽- 하면서 움직였다. 무거운 조각상을 들고 그 짓거릴 하려니 행위를 하는 당사자도 아닌데 실비아의 온몸에 땀이 흥건해졌다.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나머지들의 표정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해졌다.
실비아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수사자 조각상의 뒤치기를 돕다가 다른 이들의 표정을 힐끗 바라보곤 입술을 삐죽거렸다.
‘휴, 지금은 이상하게들 봐라 그래. 수수께끼가 풀리면 나를 다시 보게 될걸.’
“아우, 이게 답인 거 같은데, 이거 왜 수수께끼가 안 풀려?”
“저, 실비아…. 그게 답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게! 답! 이라! 구요! 어우, 구멍이 뚫릴 때까지 해야 하나?”
추잡한 자세지만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면 뭔들 못 하겠는가. 이 시간에도 모래시계의 모래는 조금씩 내려오고 있었다. 루카는 불안한 표정으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저딴 게 답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다른 방안이 없나 싶어 대리석 길을 초조하게 맴돌며 조각상을 살폈다.
“에잇!”
땀범벅이 된 실비아는 나뭇가지를 내팽개치고 대뜸 루카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곤 바지춤을 잡고 버클을 풀려고 시도했다. 미치광이가 된 거 같은 실비아의 모습에 경악한 루카는 흔들리는 가이의 동공을 힐끗대며 실비아를 말렸다.
“뭐, 뭐하는 거야?”
“저게 답이 아니면, 아기를 만들어서 가져다주면 되죠.”
“그게 무슨! 우린 인간이잖아! 아니, 애초에 그런 걸 떠나서…!”
기어이 루카의 버클을 푼 실비아는 광기에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금방이라도 속옷까지 내리고 일을 치를 기세였다. 그녀는 자신을 말리는 루카의 손을 강한 힘으로 떼어내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아기 만들고 나서 사자라고 이름 붙이면 그만 아닌가요?”
“아니야, 실비아, 그거 아닐 거야!”
“맞아!”
일촉즉발의 상황. 바지춤을 부여잡고 말리는 루카와 금방이라도 끌어내리고 일을 치르려는 실비아 사이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해괴망측한 광경에 가이는 잃었던 이지를 다시 되찾을 거 같았다.
크흠, 하는 헛기침 소리에 무심코 돌아본 루카는 가이가 서 있는 입구 옆을 쳐다보았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걸 이제야 발견했다니, 등잔 밑이 어두웠다. 루카는 내려가는 바지를 추켜올리며 실비아를 애타게 불렀다.
“실비아! 잠깐, 저기!”
루카가 가리키는 곳을 본 실비아는 입구에 놓여 있던 아기사자 조각상을 발견했다. 모래시계는 이제 3분의 1가량 남아 있었다. 둘은 후다닥 뛰어가서 아기사자 조각상을 가져온 뒤 수사자와 암사자 조각상 가운데에 내려놨다.
그러자 곧 쿠릉- 하는 소리가 나더니 창고의 석문이 천천히 열렸다.
“와! 이게 답이었군요! 생각보다 간단했네요.”
“휴, 이게 답이라서 정말 다행이야.”
환호성을 지르는 실비아 옆에서 루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문이 열려서 잠시 좋아하던 그녀는 곧 다른 퀘스트 내용인 ‘루카의 부하들을 다 정화하라.’를 떠올리고 가이가 서 있던 자리를 돌아봤다. 근데 방금 전까지 문 옆에 있던 애가 없었다. 뭐야?
“어디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