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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129화 (129/372)

129화

이건 아마도 루카의 공략 창을 봤을 때 맨 마지막에 있었던, 물음표로 감춰져 있던 부분 같았다. 노엘의 경우엔 할 때마다 업보를 줄여 줬었는데 그런 비슷한 효과가 없단 건 좀 아쉬웠다.

‘그래, 뭐. 공략 캐릭터들한테 이것저것 혜택만 있으면, 던전 공략 안 하고 섹스만 하지. 안 그래?’

실비아는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혜택이 없어도 한동안 루카랑 틈만 나면 섹스 파티를 열 생각이었으니 기왕이면 좋은 게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이 메시지는 대체 뭘 뜻하는 걸까?

당장은 제단은커녕 첫 번째 창고 근처로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니 고민해 봤자 답이 안 나올 것 같았다. 실비아는 고민하는 걸 관두고 메시지를 껐다.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는….

‘오! 역시 좋은 게 있었네!’

기록 창에 남아 있는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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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의 씨앗 조각>을 모아 ‘불속성 스킬’을 스킬 업 할 수 있다. <루카의 씨앗 조각>을 모아 <대장간>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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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업은 이미 예상한 바였지만, 씨앗 조각을 모으면 여타 게임 속에 있는 대장간을 만들 수 있단 건 놀라운 혜택이었다. 그럼 아이템을 강화할 수 있단 소리!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니 앞으로 루카한테 자주 껄떡대야겠다고 다짐한 그녀는 인벤토리 내 붉은 씨앗 옆에 있는 레몬색 씨앗을 착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노엘이랑 루카… 의 것.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누군가 양심을 바늘로 마구 찌르는 느낌이었다. 잠시 표정이 안 좋아졌던 실비아는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이런 걸 심지어 다섯 종류나 모아야 한다니…. 지옥에 안 가려면 어쩔 수 없다. 나중에 실컷 따먹은 남주들을 모아 놓고 석고대죄를 하는 수밖에.’

그녀는 냉정하게 마음을 다잡고 인벤토리를 들여다봤다. 노엘의 씨앗은 현재 53개였다.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볼 짬이 없었는데, 어느새 꽤 많이 모은 상태였다.

‘만약 모니터 앞에서 게임을 하는 거였다면 틈만 나면 상태 창과 인벤토리를 봤겠지만, 여기선 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현생의 그녀는 신년마다 매일 다이어리를 쓰겠다고 결심하며 새 일기장을 사서 스티커와 펜으로 앞 장만 요란하게 꾸몄다가 연말엔 먼지가 앉은 다이어리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꾸준히 기록하고 들여다보는 성미가 되지 못했다. 그런 그녀가 게임에 빙의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개과천선할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매일 상태 창을 살펴보며 치열하게 계획을 짜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차츰 잊고 있다가 ‘아, 맞다 까먹을 뻔!’하면서 급하게 시스템을 불러내 살피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씨앗을 모아 스킬 업을 할 수 있단 중요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였다.

인벤토리 첫 번째 칸에 있던 <씨앗 상자>를 오랜만에 꺼내서 열어 보니 처음에 봤을 때랑 달리 다섯 칸 중 한 칸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노엘의 씨앗 조각> 하나를 꺼내 빛나는 칸에 넣어 보니 씨앗이 늪에 빠지는 것처럼 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조그맣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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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 나머지를 채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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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를 마저 넣자 짜란-! 하는 효과음과 함께 세계수를 심을 수 있는 씨앗을 하나 얻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 열 개면 되나 보네. 그럼 나머지 43개는 어떻게 쓰면 될까?’

스킬 업을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스킬 창에 가져다 대면 답이 나올지도 몰랐다. 씨앗을 든 채 상태 창을 켜 스킬 창으로 스크롤을 내린 그녀는 레몬 빛 씨앗을 거기다가 가져다 댔다. 그러자 예상대로 레벨 업 할 수 있는 스킬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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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의 망치> 스킬 업 가능합니다.]

[지금 가진 씨앗으로 획득 가능한 스킬을 확인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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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의 망치>를 오랜만에 클릭해 보니 원래는 한 마리 한 마리 일일이 후려쳐야 했던 스킬인데,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1미터 내에 있는 몬스터들을 한꺼번에 정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 나왔다. 10개만 소모하면 스킬 업을 할 수 있었기에 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 스킬 업을 하기로 했다.

이로써 <정화의 망치>는 사용 범위가 넓어졌다. 남은 씨앗은 33개. 새로 획득할 수 있는 스킬이 뭔가 싶어 스킬 창의 빈 곳에 씨앗을 갖다 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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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의 씨앗을 소모하여 패시브 스킬 <기적을 일으키는 자>를 익힐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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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게 뭘까? 노엘은 신관이니 회복 스킬을 익힐 줄 알았는데 이런 게 뜨네.’

스킬 명을 터치하자 상세설명을 볼 수 있었는데, ‘높은 확률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라는 심플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장 씨앗을 소모해서 스킬 개방을 하려고 했던 실비아는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스킬 개방을 하면 될 것 같았다. 거기다가 30개를 쓰면 씨앗을 거의 다 써 버리게 되는 건데,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르니 아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꾸러미를 뒤적여 새 옷을 챙겨 입었다. 다행히 꾸러미는 게임 아이템이었기에 일반 옷과는 달리 인벤토리에 들어갔다.

‘너무 오랫동안 바위 뒤에 있었네. 루카가 이상하게 생각할라.’

그녀는 손으로 빗을 만들어 머리를 빗으며 바위 뒤에서 나왔다.

루카는 한참을 기다리다가 지쳤는지 팔을 벤 자세로 하늘을 보며 잠들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렸다. 루카의 머리맡에 조심스레 앉은 실비아는 덜 마른 머리카락에 손을 집어넣어 살랑살랑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 손길에 붉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햇빛이 반사돼 오묘하게 빛나는 금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눈을 감탄하면서 보던 실비아는 충동적으로 붉은 속눈썹에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혀를 살짝 내밀어 핥았다.

‘드디어 핥아 보는군.’

이물감에 눈을 깜빡거리던 루카는 실비아의 얼굴을 당겨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음…. 내가 잠들었었나?”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잘 자던걸요.”

“이렇게 하루 종일 있고 싶어.”

나른한 고양이처럼 몸을 쭉 뻗어 기지개를 한 루카는 그녀의 뺨에 머리를 비비며 가늘게 눈을 떴다. 당장이라도 따끈한 바위 위에서 한판 뒹굴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지만, 오늘은 정말로 섬을 둘러봐야 했다. 실비아가 ‘어우, 참! 이제 정말 가야 해요.’라고 말하며 어깨를 툭- 치고 일어나자, 루카가 실망한 표정으로 솟아오른 제 아래를 바라보더니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 * *

“우선 이 섬에 있는 두 번째 창고를 먼저 가 보기로 했었죠?”

“그렇지.”

루카가 가지고 있는 지도가 그대로라면 두 번째 창고는 섬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후덥지근한 열대 기후에 몇 분 걷지도 않았는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야자수 잎을 꺾어 사이좋게 서로 부채질을 해 주며 걸어가던 둘은 곧 멀리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생물들을 발견했다.

급하게 나무 뒤에 숨어서 살펴보니, 짐승도 아닌 것이 저게 뭔고? 자세히 보니 사람 몸집만 한 야자수처럼 생긴 몬스터였다. 필드에 진입한 건지, 몬스터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눈앞에 던전 명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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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우림 그 구석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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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수 괴물은 뚱뚱한 몸집으로 뒤뚱거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완전 느림보라 공략이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그것보다 어디서 많이 본 친근한 생김새에 실비아가 또 게임 욕을 했다.

‘이놈의 게임, 가지가지 하는구나. 어디서 베껴 온 몬스터를 필드에다 가져다 놨네. 그래, 뭐 한두 번이니.’

몬스터의 머리를 자세히 바라보자 그녀의 눈앞에 몬스터 명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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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넛 라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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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저 막 지은 것 같은 이름은?’

아무래도 개발자가 이름을 지을 때 과로로 넋이 나간 나머지 시원한 코코넛 라떼가 먹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황당해하던 그녀는 이전에 공략했던 몬스터들의 보상을 떠올리곤 기대하기 시작했다. 던전의 몬스터들은 가끔 먹을 것을 포상으로 주곤 했는데, 저 야자수 괴물을 물리치면 시원한 코코넛 라떼가 나올지도 몰랐다.

‘날도 더운데 잘됐네! 잠깐, 그러고 보니 <잊혀진 신전>에선 퀘스트도 같이 떠오르더니, 이번엔 안 떠오르나? 보상을 더블로 받으면 좋겠는데….’

기대하는 얼굴로 잠시 기다려 봤지만 아무 퀘스트 메시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실망한 실비아는 곧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노점 게임을 욕했다.

‘그렇지. 법칙도 없고 뭣도 없고. 아주 개판 났네, 개판 났어. 설마? 이 섬을 떠나기 전엔 퀘스트가 떠오르겠지? 아니면 안 떠오르거나! 이건 항의할 고객 센터도 없는 막돼먹은 노점 겜이니까.’

기대할 걸 기대했어야 했다. 퀘스트에 대한 미련을 단념한 실비아가 인벤토리에서 망치를 꺼내자 루카도 손 위에 커다란 불덩어리를 불러냈다.

루카를 힐끗 쳐다본 실비아는 완벽한 역삼각형의 아름다운 상체를 드러낸 채 손에 이글거리는 불꽃을 든 루카의 모습이 불의 정령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불꽃 슛을 날리는 피구왕 통X의 성인 버전 같거나. 어쨌든 멋있어 보였다. 상앗빛의 피부와 붉은 머리, 그리고 손에 든 불꽃이 소름 끼치도록 어울렸다.

전날 절벽에서 얘기를 나눴던 덕에 몬스터를 앞에 두고 자신이 몬스터를 무찌를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거나 ‘후후, 저는 알고 보면 영웅입니다.’ 이딴 오글거리는 소릴 안 해도 돼서 좋았다. 손에 든 망치를 몬스터에게 조준한 실비아는 속으로 스킬 명을 외쳤다.

‘<부메랑 망치>! 이놈의 스킬 명은 입 밖에 내기가 너무 민망하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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