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꿈쩍도 안 하네. 이게 꿈인지 이 남자가 몬스터인지는 좀 더 만져 봐야 알 수 있겠는걸.’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번 툭툭 주먹으로 가슴을 쳐 대다가 도중에 은근슬쩍 쌀보리 게임처럼 손바닥을 펼쳐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튀길 반복했다.
그러자 눈앞의 남자가 움찔했다. 그러나 역시 공격할 기미는 없어 보였다. 몬스터가 아닌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았다. 어쩐지 입에서 침이 계속 나왔다.
‘날 속이려고? 어림도 없다!’
그녀는 이제 대놓고 주먹이 두 번이면 손바닥은 여덟 번 정도 펼치며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남자는 그제야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그녀의 손을 막았다.
‘손을 막아? 그럼 또 방법이 있지.’
그녀는 머리로 가슴에다 박치기! …를 시도하면서 은근슬쩍 두툼한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공격인지 사심을 채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대치 상황이 계속되는 와중에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조그만 갈색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더니 고개를 내려 속삭였다.
“뭐 하는 거지?”
“공격…. 누구야 넌!”
양심에 찔린 그녀는 ‘공격….’이라고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한 뒤 뒤늦게 몸을 뒤로 물리며 남자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황당한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날 공격해 봤자 소용없어. 난 몬스터가 아니니까. 머리 위에 아무것도 안 뜨잖아.”
남자의 말이 맞았다. 보통 몬스터라면 머리 위에 이름이 뜨거나 해야 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으니까.
혼란스러워 보이는 실비아를 알아차린 듯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루카의 형이야.”
그의 말에 실비아의 눈이 부릅떠졌다. 형은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 죽은 사람이 나타나다니, 아무래도 이건 꿈이 맞는 듯했다. 이 망할 놈의 게임 시스템이 설마 형제덮밥 같은 걸 바라고 이런 이벤트를 벌인 건 아닌가 심히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세상에! 그건 정말 아니라고! 난 양심이 있는 사람이야. 아무리 꿈속이라도 형제 둘 다를 공략할 순 없어! 형제덮밥 같은 거엔 관심이 없다고! 그건 안 돼! 이… 이런 발매 중지당할 게임 같으니라고! 난 정말 형제를 꼬시는 데 추호도 관심이 없어!’
한참을 앞서 나간 실비아는 속으로 양심선언을 하며 시스템을 마구잡이로 욕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던가, 어찌 됐든 실행하지 않는 한 아무도 그녀의 진심을 알 순 없을 터였다.
‘꿈이 맞는지도 확인이 필요하겠군.’
몬스터가 아니라면 이제 공격할 필요는 없었다. 꿈이라고 생각하니 그녀의 손길이 과감해졌다. 조그만 손은 남자가 기가 막혀 하든지 말든지 마음껏 그의 가슴을 터치했다. 루카보다 더 두툼한 가슴은 잡는 맛이 남달랐다.
이제 남자는 포기한 건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었다,
‘아주 실감나는 감각이야. 꿈치곤 무척 생생해.’
저도 모르게 황홀한 얼굴로 가슴에다가 얼굴을 비비는 순간, 그녀는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맘껏 치대고 있던 가슴에서 심장 박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역시 꿈….”
“꿈도 아닌데.”
“꿈이 아니라고? 그럼 뭐….”
실비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남자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게임은 재밌어?”
“!”
게임은 재밌냐니, 남자는 특수 NPC 시크릿처럼 이 세계가 게임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슴에 정신이 팔려서 몰랐는데, 아까도 머리 위에 아무것도 안 뜨지 않냐며 게임을 아는 티를 내지 않았던가. 실비아는 놀라서 어버버거리며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실비아가 말없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어쩐지 그 미소가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남자 몰래 제 손등을 눈물이 쏙 빠지도록 세게 꼬집었다. 아프기만 하지 전혀 깨지 않는 걸 보니 꿈이 아닌 게 맞았다.
잠깐, 그럼…. 불길한 결론에 다다른 실비아의 낯빛이 파래졌다. 루카의 형이라고 주장하며 심장이 뛰지 않는 남자, 몬스터도 아니고 꿈도 아니다. 그럼 답은 하나뿐이었다.
‘세상에나, 설마 귀신인가?!’
“왜 대답을 못 해. 게임이 재밌냐고 물었잖아.”
눈앞의 남자가 귀신이라고 생각하니 실비아는 온몸의 핏기가 싹 가셔 버리는 기분이었다. 귀신이랑 말을 잘못했다간 잡혀갈지도 모른다. 그녀는 나태지옥 입주 예정인이었기에 게임에 빙의한 이후 귀신을 무척 싫어했다. 오두막집 귀신은 림보, 세비스가 옆에 있었기에 하나도 무섭지 않고 조금 짜증 나는 만만한 존재일 뿐이었지만 눈앞의 귀신은 달랐다. 단둘이 있으니 언제라도 자신을 나태지옥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
얼어붙은 채 가만히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남자의 표정이 점차 차갑게 굳었다. 루카와 똑 닮은 금색 눈이 그녀의 쇄골에 새겨진 붉은 흔적을 눈에 담았다. 그는 입가를 씰룩거리더니, 실비아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곤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재밌어 보이긴 해. 내 동생의 냄새가 너한테 묻어 있거든.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니 아쉽게도 결국 내가 만든 독을 해독했나 본데.”
“…….”
‘루카 형 맞네, 맞아! 그럼… 정말 귀신!’
실비아는 여전히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팔짱을 끼고 그녀를 고깝게 바라봤다.
“짜증 나려고 하네. 입이 붙었어? 왜 말이 없어.”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부드러워 보였던 루카의 형은 슬슬 성질이 나오고 있었다. 물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건들거리는 자세를 보니 예사 존재는 아니었다. 역시 귀신…. 그녀는 애써 공포심을 억누르고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재, 재미없는데요. 저는 사정이 있어서 게임에 빙의 된 거니까요. …그건 그렇고, 그쪽은 역시 루카 님의 형… 인 거죠? 그… 귀신? 아, 아니에요. 제가 말실수를….”
게임 자체는 고생스러웠지만 공략이 재밌는 건 사실이었다. 가끔 이곳에 빙의 된 목적을 잊을 만큼 꿀잼이었지만, 귀신을 눈앞에 두자 그 기억은 사라락 사라지고 순식간에 재미가 없어졌다.
그것도 그렇고, 귀신에게 귀신이냐고 묻는 건 분명 실례일 테지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나왔다. KTX 타고 가면서 봐도 귀신처럼 보이니 어쩔 수 없었다.
달달달 떨리는 손으로 그를 가리키며 가까스로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조가비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남자의 굳은 얼굴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무섭게 바라보던 그는 잠시 후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은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귀신이라니. 듣는 귀신 기분 나쁘게. 난 그런 저차원적인 존재가 아냐. 그렇지만. 음, 정체를 밝히면 네가 놀라 까무러칠 거 같으니 비밀로 할게.”
‘듣는 귀신 기분 나쁘다니, 역시 귀신 맞잖아! 귀신보다 더 놀라운 거면 대체 뭔데.’
그녀는 속으로 질색을 했지만 겉으론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얼굴이 표백제에 담가 놓은 빨래처럼 하얘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반응을 보이자 흡족하게 미소 지은 남자는 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을 들어 손가락으로 배배 꼬면서 야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흐음, 그건 그렇고 게임이 재미없다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게임이 재미없다면….”
“재미없다면요?”
침을 꿀꺽 삼킨 그녀가 저도 모르게 되묻자 남자가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이상한 제안을 했다.
“진짜 세상으로 가지 않을래?”
“진짜…? 진짜라뇨…. 진짜 세상에서 난 이미 죽었는데….”
제 육신은 이미 화장터에서 활활 타올라서 사라졌다고 했는데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그녀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흐리자 남자가 손가락을 딱 부딪치더니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저러나 생각한 순간 남자의 입에서 나온 기함할 말에 초록색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진짜 세상은 거기가 아니지. 네가 원래 가야 할 곳, 나태지옥 말이야.”
“…으앗!”
남자의 미친 제안에 소스라치게 놀란 실비아는 순간 용기를 내, 손사래를 쳐 제 머릴 잡고 있던 차가운 손을 떼어 냈다. 역시 귀신이 맞았다.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남자가 떡하니 가리고 있어 막혀 있는 앞을 피해 옆걸음을 쳐 도망가려고 시도했다.
남자는 잠시 아쉬운 듯 빈손을 바라보더니 실비아의 가는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싫어?”
“말이라고 해! 윽!”
실비아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손을 흔들어 뿌리치곤,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을 쳐 달아났다. 혹시나 루카의 형 귀신이 뒤따라올까 싶어 겁이 났지만, 다행히 따라오는 기색은 없었다.
수영해 달아나는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왜? 어째서 가짜가 진짜보다 좋단 걸까.”
그는 이해하지 못하겠단 표정을 하더니 피식하고 웃었다. 남자의 몸이 점차 희미하게 흐려지더니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정신없이 헤엄쳐 도망가던 실비아는 자맥질해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어느새 사위를 채우고 있던 자욱한 안개가 사라지고 원래의 계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카는 물가의 너른 바위에 앉아 말끔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실비아가 허둥지둥하며 물 밖으로 나오자 그가 밝게 미소 지으며 바디 타월을 들어 그녀를 껴안았다.
그는 실비아가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연신 입을 맞추며 몸을 닦아 주었다. 그리곤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눈웃음을 쳤다.
“뭐야, 잠시 혼자서 놀았다고 무서웠어?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네.”
“아….”
실비아는 조그맣게 탄식을 내뱉으며 그의 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러자 루카는 ‘은근히 겁이 많다니까, 귀여워.’라고 조그맣게 속삭이더니 그녀를 부드럽게 껴안고 조그만 머리통에 얼굴을 묻었다.
상황을 보니 루카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태연한 태도를 보아하니 안개가 자욱했던 것도 루카의 형을 만난 것도 그녀 혼자서 본 환상 같았다.
‘형을 봤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