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말하는 걸 듣다 보니 루카는 그 정체 모를 물약 때문에 자신의 몸에서 독이 흐르고 있단 건 꿈에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모를 만도 했다. 그 독은 본인에겐 전혀 해를 입히지 않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키스도 실비아와 한 게 처음이니 가까운 이와 체액을 나눌 일이 전무했을 테고 말이다.
그 선물은 루카를 독에서 지켜 주고 암살자에게서 지켜 줬으며, 설마 원래 의도는 아니겠지만 부작용으로 순결을 지키는 역할도 했던 것이다.
‘동생을 지키고 싶은 맘에 한 짓인 것 같긴 한데…. 부작용이 있을 거란 걸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부작용을 알았든 몰랐든 루카의 형은 본의 아니게 실비아를 방해한 셈이 됐다. 속으로 그의 형을 원망하려던 실비아는 루카랑 했던 대화들을 떠올리며 낯빛을 굳혔다.
‘아, 아까 계곡에서 외동이냐고 물었을 때 대답이 없었던 거랑 형이 포션에 관심이 있었다고 마치 과거를 말하듯 아련한 눈빛으로 말한 이유가 설마….’
아무래도 루카의 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뒤늦게 깨달아 버린 사실에 실비아는 루카에게 잠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굳이 그 짐작을 확인하지 않기로 했다. 먼저 꺼내지 않는 사실을 물어보는 건 상처를 후벼 파는 일이 될 수 있으니까. 잘살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불행을 들춰내서 동정을 하는 취미도 없었고 말이다.
그녀가 생각에 빠져 있는데, 루카가 망원경을 계속 들여다보며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여튼 안심해. 아무리 봐도 그냥 일반인은 아닌 거 같길래 사정을 알고 싶었을 뿐이야. 네 얘긴 이제 다 이해했어.”
“네. 늦게 얘기해서 미안해요.”
“아냐. 설명하기도 힘들었을 테고. 그래도 덕분에 나는 우리 가문의 섬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고,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으니 서로 좋잖아.”
실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카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하곤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근데 어떤 신이길래 이렇게 생고생을 하고 있어? 보아하니 계속 돈 버느라 힘들어 보이던데. 신성력을 준 건 아닌 거 같고…. 무슨 능력을 받은 거야?”
“능력을 주긴 줬는데 신성력은 아니구요. 이건…. 그래, 뭐, 신이 내린 고난 같은 거라고나 할까요. 고생하는 것도 다 신탁의 일부죠.”
사실 신탁을 받았다기엔 애매하고, 정확히는 지옥에 안 가려고 열심히 게임을 공략하고 있는 거니 뭐라고 더 설명해야 할지 곤란했다. 무슨 능력이기에 돈 버느라 고생하냐니, 그것도 설명하기 복잡했다. 능력을 주긴 줬지만 조건부로 하나씩 던져 주고 있고, 그건 과하게 사용하면 ‘상태 이상’이라는 부작용에 걸리니 돈을 벌기 위해 사용하기엔 애매했다.
‘그리고 사실 돈 벌기는 이 게임의 메인이 아니니까. 그동안은 공략캐릭터와 던전 위주로 스케줄을 짜는 바람에 능력을 활용해 볼 생각은 안 해봤어. 돈을 벌 용도로 스킬을 과하게 쓰다가 업보가 갑자기 왕창 쌓일까 봐 겁나기도 하고 말이지.’
스킬로 할 수 있는 일은 많겠지만 시도하기 꺼려졌다. 루카에게는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능력이 있는데 활용할 수 없어요.’라고?
사실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능력은 자그마치 ‘동정 미남을 공략해서 스킬을 얻는 것’인데, 입에 담기도 추잡스러운 능력에 대해 말하려 하니 실비아의 입술이 저절로 말라붙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주저하자 루카는 머뭇거리다가 흘리듯이 말했다.
“힘들면 말해. 우리 집에서 나랑 같이 있으면 되지. 그 검은 머리 집사는 딴 데 가라고 하고.”
“고맙지만 그건 힘들 것 같아요. 제 스스로 해내야 뭐든 의미가 있는 법이니까요.”
대답을 듣고 루카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멋쟁이처럼 말하긴 했지만 실비아가 그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루카에게 신세를 지나치게 졌다간 다른 캐릭터를 공략하기 힘들어질지도 몰라서였다. 거기다가 루카랑은 얽힐 때마다 업보가 오르니, 그가 주는 대로 생각 없이 받아먹었다간 업보가 한꺼번에 잔뜩 쌓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면 루카가 옷을 사주기로 했었지. 그것도 상황 봐가면서 얻어 입어야겠어. 노엘 님도 없는데 괜히 업보가 쌓이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그래도 미뤄 놨던 복잡한 얘기를 하고 나니 후련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루카가 망원경을 넘겨주었다. 그녀가 절벽에 있는 너른 바위 위에 올라가 망원경을 들여다보자 루카가 뒤에 서서 도와주었다.
“자, 이쪽을 보면 조그만 섬이 하나 더 있지?”
“그렇네요.”
“지금은 섬 사이가 바닷물로 차 있어서 건너갈 수 없지만, 아까는 썰물 시간이라서 저 섬으로 건너갈 수 있었어. 너랑 같이 갈 생각에 건너가 보진 않았지만 말이야.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썰물 시간이니 내일 아침에 저길 가 보자. 저 섬에 첫 번째 창고가 있거든.”
루카는 실비아가 들고 있는 망원경을 이리저리로 옮겨 주면서 섬 내부를 설명해 주었다. 망원경으로 보니 섬이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알 수 있어 좋았다.
그때, 실비아가 망원경을 보다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건너편 조그만 섬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 사람이 있는데?”
“나도 아까 봤어.”
“근데 왜 저렇게 헐벗고 있지? 원주민 같네요.”
그들은 상체는 헐벗은 채 하체 위에 야자수 잎사귀만 걸친 차림이었다. 그리고 기다란 나뭇가지들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말 그대로 원주민 같다고밖엔 표현할 수 없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아마존이나 아프리카 원주민 같은 모습에 실비아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망원경에 포착된 원주민들은 바닷가를 어슬렁거리다가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충 사람인 건 알아볼 수 있었지만 거리가 멀어 얼굴까지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
“어, 안으로 들어가 버렸네! 여기에 원주민도 살아요?”
“아니. 여긴 원래 무인도야. 이 섬에 들어온 건 아마도 우리 부하들뿐일 텐데. 아니면 내가 부하들한테 준 간이 인장을 뺏어서 누군가가 이 섬으로 무단침입한 걸 수도 있고…. 직접 만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저 원주민들이 여기로 오진 않을까요?”
“올 수도 있겠지. 상황 봐서 싸워야 하면 싸우게 될 테고. 최악의 경우엔 제1 창고에 있는 귀환 게이트로 집으로 가거나, 아니면 여기. 저쪽 섬에 정박해 있는 배를 훔쳐 달아나야겠지.”
루카가 손을 들어 망원경의 위치를 옮겨주자 저쪽 섬 구석에 정박해 있는 몇 척의 배들이 보였다. 그건 그렇고 귀환 게이트라니. 터보 주행이 있는 걸 보고 이놈의 게임 세계엔 비밀상점으로 가는 통로 말고는 그 흔해 빠진 게이트 하나 없나 했더니 멀쩡하게 게이트가 존재하고 있었다.
“게이트가 있어요?”
“응. 결계가 있는 데 게이트가 없겠어? 말했잖아. 우리 집안은 뼈대 있는 마법사 가문이라고.”
루카가 제 앞머리를 넘기며 훗- 하고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귀환 게이트>는 엘리셔스 제국을 넘어 대륙 전역에서 이름을 날렸던 루카의 선조가 만든 것이라고 했다. 루카는 지금 제국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게이트들은 대부분 선조가 만든 것이라며 집안 자랑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게이트는 돈을 들이부어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데, 자기네는 마법사 가문이라 가능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실비아가 망원경에서 눈을 떼자 루카가 헛기침을 하면서 일부러 들으라는 듯 몇 마디 더 했다.
“흠, 크흠! 이런 잘난 집안의 후계자인 나랑 누가 결혼할지! 그 여잔 정말 복 받은 여자인 거지. 돈 많고 뼈대 있는 가문 출신에, 거기다가 이렇게 잘생긴 얼굴까지 가졌으니!”
그러나 실비아는 생각에 빠져 그의 말을 깊이 새겨듣지 않았다.
‘다행이다. 안 그래도 <귀환 스크롤>을 써 버려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던전 공략이 끝나면 게이트나 배로 돌아가면 되겠구나.’
“그렇겠네요.”
그녀는 제대로 못 들었지만 대충 대답하며 루카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생각보다 심드렁한 반응에 루카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녀가 던전 공략을 앞두고 긴장한 나머지 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제대로 들었다면 당연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에게 안겼을 테니. 그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면 분위기를 타고 아까 하다 만 걸 다시 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움에 루카가 혀를 찼다. 실비아는 차분한 얼굴로 망원경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구조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했죠?”
“응.”
“그래도 변한 게 있을 수 있으니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함께 섬을 둘러봐야겠어요.”
하루를 허투루 보낼 순 없었다. <잊혀진 신전>과 같이 이곳에도 분명히 처치하면 레벨 업이 가능한 몬스터들이 있을 테니 내일 첫 번째 창고로 가기 전에 가능한 한 레벨 업을 해야 했다.
‘루카랑은 밤에… 하면 되는 거고. 우선은 몬스터를 찾는 게 급선무야.’
실비아는 변태는 맞지만 우선해야 할 일이 뭔지 아는 변태였기에 굳이 밝은 대낮부터 루카에게 찝쩍대지 않기로 했다. 호감도가 다 올라간 것도 확인했고 아까 반응을 보아하니 밤에 찝쩍대면 허락해 줄 것 같았다.
그와 반면에 루카는 아닌 척하고 있지만 속으론 아까부터 못다 한 스킨십을 하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아예 몰랐으면 몰랐지, 조금 하다가 말아 버리니 머릿속이 온통 야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계곡에서만 해도 적극적이던 실비아의 담백해진 모습에 그의 속이 썩어 문드러졌다.
‘내 키스가 생각보다 별로였나? 아님 내가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 부담스러워진 건가. 설마. 입에서 냄새가 났다거나…. 아닌데.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루카는 손바닥에 입김을 불어보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무작정 들이대면 야한 것만 밝히는 남자로 보일 테니 그는 애써 허벅지를 찔러가며 욕망을 자제하기로 했다.
둘은 지도에 나와 있는 대로 두 번째 창고로 가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창고는 건너편 섬에 있지만 두 번째 창고는 지도상으론 이 섬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가던 길에 실비아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야자수 이파리를 여러 개 주워 루카에게 건네고 자신도 가졌다. 영문을 모르는 루카에게 <잊혀진 신전>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자 그는 떨떠름해 하면서도 얌전히 이파리를 건네받았다.
“원주민처럼 분장하라 이거지? 그래. 경험자의 말을 따라야겠지. 일반 던전은 가봤어도 오염된 던전은 들어 보기만 했지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몰라.”
잠시 벌거벗고 이파리로 가슴과 가랑이만 가릴까 생각하던 실비아는 ‘변태는 맞지만 추잡스러운 변태는 되지 말자.’고 다짐한 뒤 이파리를 엮어서 원피스 위에 걸쳤다. 원피스의 내구력이 뛰어나서 전투에 도움이 될 테니 벗기 싫기도 했다.
반면에 루카는 아무렇지 않게 훌렁 상의를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