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실비아는 당장이라도 다시 루카와 뒹굴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애써 단단하게 일어선 그의 것을 외면했다. 위험을 목전에 두고 떡을 치다가 개죽음을 당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던전에선 항상 조심해도 모자랄 게 없는 법. 그녀는 손을 뒤로 뻗어 계속 칭얼거리는 루카의 팔을 꼬집었다.
“아야!”
“정신 차려요. 방금 수상한 소릴 들었다니깐요!”
“실비아….”
루카는 세게 꼬집히고도 잠시 팔을 문지를 뿐,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녀를 다시 껴안았다. 처음 맛본 쾌감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 버린 듯했다. 실비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태를 보니 앞이 완전히 가라앉기 전에는 턱밑에 칼이 들어와도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았다. 마치 암사마귀에게 잡아먹힐 것을 알고도 교미를 멈추지 못하는 수컷 사마귀와 다를 것이 없다고나 할까.
맛이 간 루카 대신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성욕에 뇌가 절여져 버린 그는 내버려 두고 실비아는 바위 뒤에 숨어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그녀가 미역 원피스를 단단히 챙겨입고 나오자 루카가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절망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실비아는 루카가 입을 뾰로통하게 내민 걸 무시하고 주변을 살폈다. 눈을 데로록 굴리던 그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어! 또 들렸어요!”
“몰라….”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갈색 털 뭉치가 나무 위에서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갈색 털로 온몸이 덮인 귀여운 아기 원숭이였다. 원숭이는 털이 보송보송하니 관리가 잘 된 게 어미한테 사랑을 많이 받은 것처럼 보였다.
“우끼끼!”
“어? 원숭이네. 루카 님, 원숭이가 있어요!”
“뭐야, 원숭이 새끼였어? 하…. 저 망할 놈의 원숭이가….”
“와! 귀여워.”
루카가 흉흉한 낯빛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그러나 실비아는 그런 루카를 신경 쓰지 않고 원숭이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조그만 원숭이는 나무 사이를 약삭빠르게 타고 넘더니 바위에 착지했다.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위에 앉아 실비아랑 루카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쳐다봤다.
폴짝폴짝 바위 위에서 재롱을 피우던 그것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았다. 그 귀여운 모습에 실비아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귀엽네요. 근데 아직 아기 같은데, 엄마 원숭이는 어딨는 걸까요.”
“내 알 바야? 장 보러 갔나 보지. 쳇.”
루카는 한창 좋을 때 난입한 짐승이 꼴 보기 싫은 듯 원래 성질이 나오고 있었다. 그의 틱틱대는 말투에 실비아는 말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하다 말아서 짜증 나나 보네. 어우, 귀여워! 그럴수록 더 놀리고 싶은걸.’
성질내는 루카의 모습에 실비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활짝 웃자 똑똑한 원숭이는 함께 좋아하며 박수를 치고 춤을 췄다. 그 모습을 루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이제 가라 좀. 어른들 노는 데 애들은 끼는 거 아냐.”
“루카 님, 그만 해요. 원숭이는 똑똑해서 자길 싫어하는 사람은 금방 알아챈다구요.”
“몰라. 좀 가라, 원숭아.”
그녀의 말에도 루카는 원숭이를 성가셔했다. 루카의 홀대를 받고도 아기 원숭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루카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그러자 루카는 실비아가 말리는데도 아기 원숭이를 달랑 들더니 구석에 치워 버리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놈 이거, 왜 이렇게 눈치가 없…. 아야!”
“끼이익!”
순식간이었다. 루카의 손에 들려있던 원숭이가 표정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리더니 그의 손을 깨물고 있는 대로 할퀴었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도망가 버렸다. 실비아는 웃고 있다가 깜짝 놀라 루카의 곁으로 다가갔다.
“루카 님! 괜찮아요?”
“윽…. 손을 제대로 물고 갔네.”
“어떡해요. 한번 봐요.”
원숭이는 속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지 그의 왼손에 커다란 상처를 내고 갔다. 루카의 손을 살펴보니 손바닥의 반 이상을 차지한 상처 부위에 피가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조그만 원숭이라고 방심한 게 문제였다. 설마 갑자기 화를 내며 물어 버릴 줄이야.
급한 대로 상처 부위를 계곡물에 담가서 씻은 뒤 둘은 얼른 은신지로 돌아왔다. 다행히 보급 상자들 사이에 구급상자가 있었기에 안에 든 알코올로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발라 붕대로 칭칭 감았다. 응급처치가 끝났지만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망설이던 실비아는 인벤토리에서 체력 포션을 꺼내 루카에게 건넸다.
“이걸 드세요.”
“이게 뭔데?”
“저도 가끔 먹는 거니까 우선 드셔 보세요. 몸에 좋아요.”
실비아의 말에 루카는 미심쩍은 눈빛을 거두고 포션을 들이켰다. 그러나 체력 포션은 체력 회복은 해 줘도 긁힌 상처는 완벽하게 낫게 해 주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체력 포션을 썼는데도 왜 안 낫는 걸까요.”
“…아, 이거 체력 포션이었어? 생긴 게 달라서 몰라봤네. 신성력이랑은 달라서, 체력 포션으론 상처가 완벽히 낫지 않아. 다행히 별로 아프진 않으니까 섬부터 돌아보자. 날이 저물기 전에 빨리 살펴봐야겠어.”
구급상자에 있던 진통약을 삼킨 루카는 만류하는 실비아를 데리고 은신지에서 나왔다. 붕대로 칭칭 감긴 왼손을 실비아가 걱정스레 바라봤다.
“쉬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냐. 원숭이를 우습게 본 건 내 잘못이고…. 그래도 손가락은 쓸 수 있어. 조금 쓰라릴 뿐 상처가 심각하진 않고, 또 섬은 오늘 꼭 살펴봐야 해.”
루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곤 그녀를 데리고 언덕을 올라갔다. 한참을 무성한 나무들을 해치고 나아가자 바닷바람이 세차게 부는 절벽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절벽에서 보니 섬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러나 탁 트인 절벽이 아니라 나무로 가려져 있어서 잘 모르는 사람은 발을 헛디디기 쉬워 보였다. 루카는 안주머니에서 망원경을 꺼내 한 손에 쥐곤 섬 이곳저곳을 살폈다.
“섬이 어떻게 변한 건지 확실하지 않아서 밤이 되면 은신지에서 머무르는 게 좋을 것 같아. 거기 입구는 우리 집안 사람만 열 수 있게 되어있으니까 안전할 거야. 그러고 보니 실비아.”
“네.”
루카가 망원경을 눈에서 떼더니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체력 포션은 왜 들고 있는 거야? 일반인들은 던전을 공략할 일이 없을 텐데.”
“아…. 그건, 어쩌다 보니 얻었어요.”
실비아가 우물쭈물 답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면 이 세계를 더 자세히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세비스와 노엘은 신탁을 받은 자들인지라 설명하기가 쉬웠는데. 루카한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됐다.
게임 세계를 잘 모르니 이게 상식선인지 아니면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알 수가 없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제대로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상념에 빠져 있던 실비아는 루카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이걸 어쩌다 얻었다고? 이상한 일이네. 황실의 전투 인력들은 보통 신관의 신성력으로 치유를 받으니까…. 체력 포션을 사용하는 건 주로 용병들이라고 알고 있거든. 아니면….”
“아니면요?”
“암살자거나.”
암살자라니. 실비아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째서 대화의 흐름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일까. 마주 보는 눈빛이 아주 서늘했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서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을 뿐인데 단단히 오해를 샀다. 이러다가 몬스터가 아니라 루카에게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실비아가 급하게 손을 들었다.
“잠깐! 이상한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
“솔직하게 다 말할게요. 어떻게 된 거냐면…”
실비아는 던전을 공략해야 하는 제 처지를 임기응변으로 열심히 설명했다. 술독으로 죽어 게임에 빙의됐다고 할 순 없으니 오염된 던전을 정화하라는 신탁을 받았으며 원래 타대륙 사람이라서 이곳 사정에 밝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최근에 섬으로 가라는 신탁을 또 받았는데, 그게 루카의 섬인 것 같아서 적극적으로 돕게 됐다고 말이다. 말하다 보니 딱히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남신이 준 임무도 신탁이라면 신탁이니까.
“신탁? 아, 그럼 신전에서 알바 한 게 그 이유였나…?”
“음, 그게….”
대충 말하다 보니 어떻게 아귀가 들어맞는 것 같았는데, 루카의 표정을 보니 아직 설명이 더 필요해 보였다. 땀을 뻘뻘 흘리던 실비아는 인벤토리에서 급하게 망치를 불러내 보여주며 계속 변명을 이어갔다.
“처음부터 안 밝힌 건 미안해요. 근데 봐요. 이걸로 결계를 깼잖아요. 신의 힘이 아니면, 시커먼 결계를 제가 어떻게 깼겠….”
“괜찮아.”
“네?”
실비아는 고개를 들어 루카와 눈을 마주쳤다. 변명하느라 몰랐는데 어느새 그의 표정이 나긋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는 망원경을 다시 들고 일어나 건너편 섬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실비아. 애초부터 너를 암살자라고 의심한 적은 없어. 대체 어떤 암살자가 타깃 하나 잡자고 새우잡이 배에서 고생하면서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를 섬까지 따라오려고 하겠어.”
“아, 알아주시니 다행이네요.”
그의 평온한 목소리에 실비아는 망치를 다시 집어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기민하게 생각했어도 심각한 상황이 아니란 걸 알아챘으련만, 이렇게 매사에 진지하게 반응하게 된 건 정신 나간 게임 시스템의 데드엔딩들 덕이 컸다.
‘<암살자로 의심받아 루카에게 끔살> 엔딩 같은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네가 날 몰라서 그렇지. 나 정도 마법사면 그냥은 안 죽어. 거기다가….”
“거기다가?”
“우리 형이 나한테 준 선물이 있거든. 세상만사에 흥미를 안 보이던 형이 유일하게 관심 있었던 게 포션인데, 형이 만든 포션을 마신 후로는 웬만한 독엔 끄떡없더라.”
“아아….”
‘이 얘긴 설마….’
실비아가 귀를 쫑긋하며 흥미를 보이자 루카가 말을 이어 갔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은 내게 상처를 입히자마자 금방 죽었어. 음, 왜인진 모르겠지만…. 형이 아마도 그 포션에다가 축복이라도 걸어놓은 거 아닐까? 네가 날 암살하려고 했다면 난 안 죽고 네가 죽었겠지.”
“아, 저런…. 그렇군요.”
실비아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나. 말하는 걸 들어보니 아무래도 체내에 든 독 얘기인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쌍욕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손으로 입을 막은 덕에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그녀는 루카를 암살하려고 한 적은 없지만 어떻게 해 보려고 한 적은 수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자신을 죽게 만든 체내의 독이 시스템이 아닌 루카의 형이 제작한 거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