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112화 (112/372)

112화

———————————————

[루카를 잡으려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실비아의 선택은?

1. 목에 칼을 들이대며, 좋은 말로 할 때 여기 있으라고 윽박지른다.

2. 조금 과하게 애교를 부려 본다.

3. 옷을 몽땅 벗어 던진 뒤 떠나려는 루카에게 달려들어 안긴다.]

———————————————

선택지를 본 실비아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이게 뭐야. 아, 그래. 뭘 해야 할까 고민할 때마다 선택지가 떠올랐었지. 음, 뭐지…. 한동안은 정상이더니 시스템이 더위를 처먹었나? 선택지가 다시 개판이 났네.’

새우잡이 배에서는 정상적으로 뜨던 선택지가 또 맛탱이가 갔다. 이 몹쓸 시스템은 그녀를 곤란하게 만드는 걸 즐기는 것 같았다. 그래.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 게 어디냐.

노점 게임에 대한 기대를 다시 버린 실비아는 선택지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1번은 범죄자가 따로 없었고 2번은 잘 하지 않는 짓이긴 하지만 그나마 나았다. 3번은…. 콘서트장에 난입한 진상 팬도 아니고, 이건 정말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세 개 중 그나마 정상적인 ‘애교를 부려 본다.’를 선택했다. ‘2번 선택지 선택’을 외치자마자 실비아의 입에서 몹쓸 애교가 튀어나왔다.

“실비아는!”

“뭐?”

루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실비아도 제 입에서 나온 말에 순간 딸꾹질이 나올 뻔했지만 한번 선택하고 나니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의지를 벗어난 몸이 양 검지를 맞부딪치며 이른바 ‘3인칭 애교’를 시전했다.

“실비아는 혼자 있기 무서운데에, 산짐승이 와서 어흥! 하고 물어 가면 오또케….”

“…….”

어흥! 과 함께 양손으로 무언가를 잡아채는 제스처를 취하자 루카가 입을 떡 벌린 채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런 시발. 차라리 콘서트장의 진상 팬이 되는 게 더 나았겠어.’

뇌가 쌍욕을 하든 말든 그녀의 몸은 ‘무셔, 무셔.’하면서 손을 모아 오들오들 떠는 모션까지 한꺼번에 해냈다.

마지막 말을 마친 그녀는 몸이 다시 의지대로 움직이는 걸 확인하곤 참담함에 눈을 꼭 감았다.

‘개발자. 잡히면 정말 가만 안 둬.’

그녀의 몸이 방금 보여준 기술은 사실 엄청난 것이었다. ‘3인칭 애교’, 다른 말로 ‘살인 애교’로도 불리는 이 기술은 웬만한 내공으론 시도도 못 하는, 재야의 고수들만 쓸 수 있다 전해지는 궁극의 애교 스킬로, 잘못 사용할 시 시전자는 물론 그 자리에 있는 자 모두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는 매우 사악한 기술이었다.

둘 사이에 잠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갔다.

못 볼 것을 본 거 같은 루카의 표정에 그녀의 낯이 뜨거워졌다.

‘…어쩔 수 없어. 칼을 들이밀거나 벌거벗고 달려드는 것보단 낫잖아.’

완전히 실패한 것 같은 예감에 실비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데, 그가 별안간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왜… 왜 그래요?”

‘못 볼 꼴을 봐서 눈알이 아린 걸까.’

루카가 말이 없자 실비아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그의 손목을 움켜잡아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고개를 기울여 들여다보니 루카는 소리 없이 큭큭대고 있었다. 실비아를 힐끗 바라본 루카는 그녀의 민망해하는 기색에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해. 네가 이러는 모습은 처음 봐서, 귀여워서 그만.”

“귀여… 워요?”

‘이 끔찍한 애교를 보고 귀엽다니. 말은 함부로 뱉는 게 아니라고. 앞으로 시도 때도 없이 해 주는 수가 있어!’

실비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묻자 루카가 부드럽게 눈꼬릴 휘며 그윽한 눈길로 바라봤다. 실비아가 무슨 행동을 하든 자신의 눈엔 다 사랑스럽게 보이는데 그녀는 아직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루카는 잡힌 손목을 빼곤 심통이 났는지 부풀어 있는 그녀의 양 뺨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그래. 그렇게 무서웠어?”

“아뇨, 딱히….”

자신이 한 애교를 다시 떠올리자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그녀가 해탈한 티벳 여우 같은 표정을 짓자 루카의 눈웃음이 더 짙어졌다. 그가 고개를 내려 실비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같이 있어 줄까?”

마치 유혹하는 듯한 루카의 목소리에 실비아의 입에 군침이 확 돌았다. 그녀는 입가에 흐르려는 침을 꿀떡 삼키곤 심호흡을 한 후 대답했다.

“…네. 그럼 좋죠.”

촉촉한 입술이 그녀의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감촉에 실비아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촉촉하단 건 타액이 묻어… 있단 건데, 왜 아무 메시지도 안 뜨지?’

이번엔 <십중팔구 만독불침> 스킬이 통했던 걸까?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는데 루카가 낮은 목소리로 웃더니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좋아, 이렇게 무서워하는데, 옆에 있어 줘야지.”

‘뭐야, 이번에도 아무 반응이 없는데?’

기절한 사이에 무언가 변한 듯했다. 실비아는 당장 시스템을 불러오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허공을 보며 멍하니 서 있으면 루카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우선 참기로 했다. 물속에서 몸을 씻으며 차분히 확인해 보면 되지 않을까.

루카는 그녀의 생각을 꿈에도 모른 채 자신이 한 행동에 자신이 부끄러워하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난 이렇게 등 돌리고 있을게. 아무리 그래도 숙녀가 씻는 모습을 볼 순 없으니까.”

그녀의 눈물겨운 노력 덕에 루카는 멀리 사라지지 않고 바위에 앉아 등을 돌리고 있기로 했다. 실비아가 미역 원피스의 지퍼를 내리자 그 소리를 들은 루카가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야, 옷에 지퍼가 달려 있었나….”

“네?”

“응? 아니, 아무것도 아냐.”

루카가 뒤돌아 앉은 채 어깨를 으쓱이자 실비아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그의 너른 등짝을 아쉽게 바라봤다.

‘저 운동장 같은 등짝에 손톱으로 제대로 길을 내고 싶다! 격렬하게 나라는 흔적을 남기고 싶구나…. 같이 씻으면 좋겠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란 속담이 있지.’

“으으, 역시 곧 몸살이 나려는 징조인가. 또 춥네.”

루카가 오들오들 떠는 걸 흐뭇하게 뒤에서 바라본 실비아는 마저 옷을 벗었다. 그리곤 맑은 계곡물에 혹 정체 모를 생물이 살고 있진 않나 확인하기 위해 조약돌을 몇 개 던졌다. 괴물고기를 본 후로 불안증이 생겨 버렸다.

퐁당퐁당 물속으로 들어간 조약돌은 얕은 파장을 일으킨 뒤 곧 잠잠해졌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햇볕을 받아 따끈해진 바위에 탈의한 옷을 올려두고 물에 손을 담가 온도를 쟀다.

‘이 정도면 심장이 놀라진 않겠군.’

게임에 빙의한 지 36일차, 본래 안전 불감증이 다소 있었던 실비아는 반복적인 위험에 노출된 덕에 조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게임이 훌륭히 정신개조를 해냈다.

그녀가 천천히 계곡 안으로 들어가자 찰랑이는 소리가 났다. 날씨가 더운지라 약간 서늘하게 느껴지는 온도가 반가웠다. 얕은 가장자리에서 헤엄을 쳐가며 소금이 말라붙은 몸을 꼼꼼히 손으로 문질러 씻었다.

함께 들고 온 속옷을 빠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갈아입을 속옷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작게 투덜거렸다.

‘무슨 정신이었지. 왜 속옷을 하나만 챙겨 온 거야? …맞다! 그보다, 시스템을 확인해야지!’

물이 너무 반가워 할 일을 잠시 잊었던 그녀는 번뜩 다시 떠오른 생각에 루카가 있는 바위 쪽을 힐끗댔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시스템을 불러왔다.

우선은 정말 오랜만에 상태 창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축제기간 동안 <프리 허그 이용권>을 썼을 때 말고는 레벨 업 할 일이 없었기에 상태 창을 켜 볼 일이 없었다.

———————————————

[실비아]

레벨 37

망치 전사

가진 돈 : 7만G(림보 것 : 5만 골드)

체력 : 230 힘 : 170 지력 : 85 민첩 : 150

화술 : 300(+50)

업보 : 20

신앙심 : 500(+100)

.

.

피로도 : 30

세간의 평가 : <측은한 우리 마을 떠돌이>

전투 스킬 : <뚝배기 깨기>, <1+1>, <정화의 망치>,<*손은 눈보다 빠르다>

생활 스킬 : <헛소리를 진지하게>,<*손은 눈보다 빠르다>

패시브 스킬 : new!<만독불침>

[분배하지 않은 포인트가 15 있습니다.]

———————————————

우선 상태 창을 켜자마자 보이는 7만 골드에 그녀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갔다. 역시 정의로운 일에는 포상이 따르는 법. 그런 것치곤 오두막집을 잃긴 했지만….

올라가던 입꼬리가 다시 내려가려고 해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생각을 이어갔다.

레벨이 37. 현재 레벨이 37이면 <안개로 싸인 보물섬>의 공략을 끝내고 나면 45는 넘지 않을까? 이 섬의 공략 포인트는 뭘까?

그러고 보니 씻는 것도 씻는 건데, 이 던전에 대해 빨리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공략을 완료하고 돌아가서 집을 다시 구해야 하니까 말이다.

상태 창을 살피던 그녀의 눈이 <손은 눈보다 빠르다> 스킬 앞에서 멈췄다. 이제 스킬을 남용하면 피로도가 팍팍 쌓인단 걸 깨달았으니 신중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음, 체력도 이제 슬슬 올려야 해. 체력이 올라가는 아이템이 나오면 좋겠는데. 40레벨이 되면 또 <레벨 업 보상 상자>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녀는 며칠 전 자신을 죽게 만들었던, 눈 밑에 섹시한 점 두 개가 있는 맛있는… 아니, 멋있는 남자를 떠올렸다. 말이 안 통해서 통성명을 못 했기에 이름도 아직 몰랐다. 그러나 건강하게 그을린 울끈불끈한 몸과 신비로운 심해를 닮은 감색 눈동자를 떠올리자 일방적 친밀감이 마구 쌓였다.

‘말은 안 통했지만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어. 그 남잔 날 좋아한다구. 그러고 보니 지력이 낮아서 말이 안 통한다는 메시지가 떴었지. 그렇다고 해서 레벨 업 포인트를 지력에 다 쓰긴 좀 그런데 말이야. 지력을 올릴 다른 방법이 없을까….’

지금 생각한다고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를 리가 없다. 그녀는 저번 던전에서 포인트를 세이브 해 둔 덕에 한 번에 민첩을 많이 올릴 수 있었던 경험을 떠올렸다. 언제 또 그런 비슷한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 우선은 남아있는 15 포인트를 아껴 두기로 했다. 다른 건 다 똑같나?

“어어?”

아무 생각 없이 스킬 창을 보던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그녀가 갑자기 크게 소리치자 깜짝 놀란 루카가 몸을 일으켜 그녀를 뒤돌아봤다.

“실비아! 왜? 무슨 일 있…, 으앗! 난, 난 못 봤어. 아무것도 못 본 거야!”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