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어머머, 웬일이래? 얘가 남의 옷 빨래를 할 인성이 아닌데? 찝찝하다고 구석에 던져 버렸으면 버렸지 말이야.’
첫인상이 무섭다고 했던가. 실비아는 편견 가득한 눈으로 루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생겨서 보기만 해도 흐뭇하고 공략 캐릭터이기 때문에 절실하게 공략하고 싶은 마음이랑은 별개였다. 그 때문에 세 번이나 죽었고 루카랑 있을 때면 온갖 나쁜 일을 당했기 때문에 그녀는 루카를 잘생긴 쓰레기로 분류해 놓고 있었는데….
‘그래도 빨래해 준 건 고맙긴 하네. 사람 다 됐네.’
쓰레기에서 몹쓸 놈 정도로 루카의 평가를 바꾸며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밖을 관찰한 그녀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잘 마른 미역 원피스를 주섬주섬 주워 동굴 구석으로 들어갔다. 몸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다가 버석거리는 감촉에 뭔가 싶어서 보니 팬티에 소금이 말라붙어 있었다.
다행인지 아깝다인지 루카는 실비아의 속옷은 벗기지 않고 그대로 놔둔 것 같았다. 몸을 더듬어 보니 가슴에도 까칠하게 소금이 말라붙어 있는 게, 완전 소금 비키니였다.
그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곳만 남겨 두고 몸을 닦았음을 눈치챈 실비아가 풉-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어차피 벗기면서 다 봤을 거면서. 닦을 거면 제대로 닦지 뭘 이렇게 어정쩡하게 닦아 놨담? 그래, 뭐…. 기절한 사람에게 함부로 엄한 짓을 하지 않은 건 좀 신사답…. 아냐, 그냥 답답한 거지. 흥!’
괜히 혼자서 흥흥대며 미역 원피스를 집어 든 그녀는 한 번 공중에 팡- 하고 털고 원피스의 겨드랑이 쪽 지퍼를 열었다. 미역같이 생긴 주제에 은근히 꼼꼼하게 만들어진 이 원피스는 옆구리 쪽의 지퍼를 열어 탈의할 수 있는 구조였다.
다만 바로 위에 미역이 덧대어져 있어서 지퍼 부분이 잘 안 보였다. 거기다 루카는 여자 옷을 잘 몰랐기에 이 지퍼를 발견하지 못해서 전날 그 생쇼를 한 거였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실비아는 옷을 갈아입은 뒤 동굴 안을 진지하게 살펴봤다. 뒤적거린 흔적이 있는 상자 안에는 보존 식품과 생수병이 있었다.
꼬르륵- 소리를 내며 배가 요동을 쳤다. 어제 점심 이후로 한 끼도 먹지 않고 반나절 동안 기절한 데다, 후유증 때문인지는 몰라도 푹 잔 탓에 거의 24시간 가까이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루카는 어딜 간 거지. 여긴 던전이니 혼자서 돌아다니다가 엇갈리면 곤란해. 전서구를 안 데려와서 연락할 수단도 없으니까.’
실비아는 동굴 입구의 벽에 기대 눈만 밖으로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가며 관찰하니 밖은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바다 위에선 안개로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어 암울한 숲이 있을 거라 상상했는데, 막상 섬엔 온통 푸르른 열대 우림이 펼쳐져 있었다.
‘우기라서 안개가 꼈던 건가…. 아니지, 무슨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어. 게임 세계에서 현실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말이 터보 주행을 하고 티라미수를 먹는데, 안개였든 먹구름이었든 뭔들 문제일까. 여긴 열대 우림에서 갑자기 시베리아 호랑이가 나타나도 이상할 게 없는 세계인데.’
그녀는 머리를 흔들며 잡생각을 물리쳤다. 배고파 죽겠는데, 루카는 어딜 간 걸까?
통조림이라도 먹을까 싶어 상자를 뒤적거리던 와중에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루카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젖어있는 붉은 머리카락을 보아 어디 계곡이라도 가서 몸을 씻고 온 게 분명했다.
그는 무표정으로 동굴에 들어서다가 상자를 살피느라 쪼그리고 앉아 있는 실비아를 발견했다. 놀라 급히 들고 있던 것들을 땅바닥에 내려놓은 루카가 그녀의 옆에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마주쳤다.
“실비아, 깨어났구나. 몸은 이제 괜찮아?”
“네?”
실비아는 딴사람이 된 거 같은 루카의 부드러운 눈빛을 보고 턱을 뒤로 물려 이중 턱을 만들었다.
‘웬일? 눈에 독기가 싹 빠졌네. 뭘 잘못 주워 먹었나?’
그녀의 떨떠름한 반응에도 루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럽게 눈웃음을 쳤다. 여전히 실비아가 떨떠름하게 반응하자 쳇- 하면서 삐진 티를 냈지만 말이다.
“뭐야, 반응이 왜 이래.”
“어휴, 이제 좀 제가 알던 사람 같네요. 몸은 괜찮아졌어요. 아픈 곳이 한 군데도 없는걸요.”
실비아는 멀쩡해졌음을 보여 주려고 일어나서 허공에다가 주먹질을 했다. 그러자 루카가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제 공을 뽐냈다.
“그래? 내가 옆에서 극진하게 간호한 덕이지.”
“아, 근데 저, 일어나보니 옷을 홀딱 벗고 있던….”
“크흠! 크흐흠! 배고프지? 빨리 뭐라도 먹자.”
루카는 황급히 그녀의 말을 끊고는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상자들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부산을 떨었다. 평소의 뻔뻔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얼굴이 새빨개져 허둥대는 루카를 보며 실비아는 속으로 키득거렸다. 제비처럼 굴던 평소와 달리 순수한 소년 같은 그의 모습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그냥 기절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그를 민망하게 만든 것 같았다.
‘토마토가 따로 없네. 반응을 보니 좀 놀려 보고 싶긴 하지만…. 불쌍하니 한 번 봐줄게!’
실비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루카를 도와 함께 식사 준비를 했다.
은신지에는 테이블처럼 쓰라고 놔둔 너른 바위가 있었다. 루카는 상자를 끌어와 실비아를 바위 앞에 앉혔다. 그리고 통조림들을 까서 바위 위에 얹고 땅바닥에 내려 두었던 꾸러미를 가져와 안에 든 걸 꺼냈다. 곧 샛노란 바나나와 새콤해 보이는 과일들이 함께 세팅됐다.
통조림 안의 음식들은 먹을 만했다. 전자레인지가 없어서 차갑게 먹어야 하는 건 아쉬웠지만 여기가 편의점도 아니고 이게 어딘가. 바다에서 봤던 괴물고기를 뜯어먹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후식으로 과일까지 배 터지게 먹고 난 뒤 실비아는 제 몸에 대고 킁킁댔다. 배가 부르니 뒤늦게 몸이 더러운 게 신경 쓰였다.
씻을 곳이 없냐고 묻자 루카는 그녀를 데리고 동굴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동굴에 있을 땐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바깥은 완전한 열대 기후였다.
한 십 분 걸었을까, 실비아의 몸이 금세 땀으로 흠뻑 젖었다. 후덥지근한 기후가 사람을 숨 막히게 했다. 실비아가 손부채질을 하며 연신 이마의 땀을 훔치는데, 루카가 말을 걸어왔다.
“섬이 많이 변했더라. 음, 설명하긴 어렵지만 말이야. 오염된…. 아니, 이렇게 말하면 모르겠지. 하여튼 좀 이상해졌어.”
“어떻게 변했는데요?”
루카는 실비아가 오염된 기운에 대해서 잘 모를 거라 생각하고 얼버무렸다. 이를 눈치챈 실비아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흠,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고 있구나. 지금 당장은 설명하기 복잡하니 모른 척해야겠어.’
루카는 실비아가 기절한 사이에 관찰한 섬의 풍경을 말해 주었다. 이곳은 원래 가문 소유의 섬이었기에 편의에 맞게 섬 여기저기가 개발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와 보니 기본 구조만 비슷할 뿐 많은 게 변해 있어서 당황했다고 말했다. 은신지로 만들어 둔 이 동굴만 예전과 같은 모습이라고도 했다.
그는 품속에 넣어 놨던 지도를 꺼내어 실비아에게 보여주었다.
“여기랑 여기가 원래 우리 집안의 창고가 있었던 곳이야. 은신지랑 지도의 이 장소들은 모두 우리 집안의 피가 흐르는 사람과 함께 들어가야만 열리는 구조거든. 동굴처럼 이 창고들도 멀쩡해야 할 텐데….”
지도와 현재 던전의 구조가 비슷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몸을 씻고 난 뒤 둘은 함께 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실비아는 루카의 안내를 받으며 어지러운 숲속을 지났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을 넘고 넘으니 시원한 물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시야를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치우면서 가보니 숨겨져 있던 조그만 폭포가 나타났다.
“와!”
폭포 아래엔 마치 선녀와 나무꾼 동화에 나올 것 같은 맑고 깨끗한 계곡이 있었다. 실비아가 감탄하자 그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어릴 땐 가족들이 이 섬에서 매년 휴가를 보냈었거든. 섬이 많이 변했길래 계곡도 없어졌나 했더니, 여긴 그대로더라.”
“가족들만 올 수 있는 섬에서 휴양이라니. 정말 부러워요! 그러고 보니 루카 님은 외동이세요?”
실비아의 순수한 물음에 루카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폭포를 구경하다가 뒤늦게 그의 표정을 살핀 실비아는 자신이 뭔가 말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어, 뭔가 하면 안 될 질문을 한 거 같아. 입이 방정이네….’
실비아가 눈치를 봤지만 루카는 상념에 잠긴 듯 바닥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의 물소리와 멀리서 지저귀는 새소리만 빼면 사위는 고요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카가 앞머리를 넘기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 잠시 딴생각을 했어. 자리 비켜줄 테니 씻고 있어.”
“날도 더운데 같이 씻는 건 어때요?”
“하하, 농담 잘하네. 난 근처에 있을게.”
실비아는 한없이 진지했건만 루카는 그녀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고 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봤던 호감도가 92였지. 조금만 더 올리면 공략 성공인데!’
몸을 씻다가 썸씽이 발생하는 건 19금 게임의 고전 레퍼토리 중 하나. 꼭 뭔 일이 나지는 않더라도 호감도가 오를 만한 상황이 생기지 않던가. 같이 씻는 게 오버라면 다른 변명이라도 만들어서 그를 곁에 둬야 했다. 그녀가 급하게 루카를 불러 세웠다.
“저기, 잠깐만요! 루카 님!”
“응? 왜 그래.”
루카가 사심 한 톨 없어 보이는 무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곤 어떻게 수작질을 할지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가 입을 뻐끔거리며 주저하자 루카가 다시 몸을 돌리곤 손을 흔들었다.
“빨리 씻고 와. 섬을 둘러보기로 했잖아.”
그렇게 말하며 루카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실비아가 황급히 말했다.
“씻을 동안 옆에 있어 주면 안 될까요?”
“응? 그건 좀…. 그렇지 않겠어? 근처에 있을게.”
실비아의 말에 다시 몸을 돌린 루카가 곤란한 눈빛을 보냈다. 그 나름대로는 축제 때 봤던 그녀의 겁먹은 모습을 떠올리고 배려하고자 섣부르게 다가가지 않는 거였다. 그러나 그 속을 모르는 실비아의 입장에선 건전해도 너무 건전한 이 상황에 불만이 치밀었다.
‘너무 딱딱하게 말했나? 어떻게 할 방법 없나, 이거.’
그녀가 고민을 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