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실비아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노엘이 옷을 사준다고 했을 땐 신세 지고 싶지 않아서 여러 번 사양했지만 루카는 달랐다. 여러 번 자신을 죽인 값을 받아야 했다.
‘좋아. 그날 백화점 문 닫아야 할걸? 내가 죄다 사 버려서 팔 물건이 없을 테니까. 후후, 백화점 물건을 싸그리 다 털다 못해 그 앞에 있는 노점 튀김가게에서 골든벨까지 울려 줄 테다.’
그녀가 순수하게 아이처럼 좋아하는 미소를 짓자 루카가 피식 웃더니 커다란 손으로 갈색 머리를 부드럽게 헝클어트렸다.
루카의 재산을 축낼 생각에 흐뭇해진 실비아는 입을 귀에다 걸곤 그와 함께 방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나타난 붉은 머리 남자를 보고 놀란 선원들에게는 솔직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소환 스크롤>로 이 분을 불렀으며 이 근처에 볼일이 있다고 말이다.
그녀가 사정을 설명한 후 돌아갈 때도 배가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이자 가만히 옆에 서 있던 루카가 끼어들었다.
“실비아, 돌아갈 때는 배가 필요 없어. 우리 섬에 아마도 부하들이 타고 온 배가 많을 거야.”
정말 그럴까? 루카의 말을 들은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반문했다.
“만약에 없으면… 요? 그럼 그땐 어쩌죠?”
“어….”
루카도 확신을 못 하는 듯했다.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덕팔이 입을 열었다.
“걱정 마세요. 실비아 님이 아니었으면 저희는 아직도 새우잡이 배 선장에게 고통 받고 있었을 겁니다. 볼일 다 끝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 감사해요, 덕팔 아저씨.”
실비아가 두 손을 모으고 감동한 눈으로 바라보자 덕팔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한편, 옆에서 지켜보던 루카는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실비아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배를 구하다 못해 선원들을 다 제 편으로 만들어 버리다니. 정말 너란 여자, 볼수록 가지고 싶다.’
루카는 소유욕이 가득 찬 눈길로 실비아를 그윽하게 바라봤다. 그 눈빛을 실비아는 눈치채지 못하고 덕팔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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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구한 실비아의 용맹한 모습에 루카의 심장이 거칠게 뛴다. 호감도가 10 올라서 92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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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호감도가 올랐다! 그런데 이 고생을 했는데도 겨우 10이 오르다니, 풀로 채워져도 모자랄 판국에! 아니다…. 어차피 사방이 막힌 섬으로 곧 들어가게 되니까, 그땐 도망갈 곳도 없으니 너도 별수없을 테지! 루카, 넌 내 거야.’
“바닷바람이 좀 춥네.”
실비아가 메시지를 바라보며 속으로 음흉한 생각을 했다. 그러자 루카의 몸이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건지,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그가 바다 쪽으로 향한 채 몸을 떠는 걸 보며 실비아는 속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실비아가 루카를 상대로 차마 말로 표현 못 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섬의 결계 부근까지 왔다. 루카는 선원들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고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다행히 결계 바로 밖에 정박용으로 쓰이는 조그만 섬이 하나 있었기에 선원들은 거기서 대기하고 있기로 했다.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네! 고마워요, 모두들.”
실비아와 루카는 배에 있던 구명 배에 올라탔다. 그녀가 손을 흔들며 선원들에게 인사하자 루카가 힘차게 노를 저었다.
한 10분을 갔을까. 곧 정박용 섬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이상하다. 이쯤이 보물섬일 텐데.’
실비아가 선원에게 빌려 온 나침반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한참을 잘 나가던 배가 어느 부분에 닿자 도돌이표를 돌듯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사방은 여전히 텅 빈 바다뿐이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실비아가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하고 있자, 루카가 품 안에서 인장을 꺼내 손에 들고 주문을 외었다. 그러자 둘의 앞에 검은 돔 형태의 막이 나타났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을 정도로 두꺼운 검은색 막이 벽처럼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흐음…. 이상하네. 결계는 원래 하얀색이었는데? 인장으로도 통과할 수 없다니,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아.”
루카가 인장을 들여다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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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로 싸인 보물섬> 던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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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하겠어!’
그녀가 속으로 입장하겠다고 외치자 띠링- 하는 효과음과 함께 또다시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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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정화 스킬로 오염된 결계를 부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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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지 하네. 그냥 통과시켜주면 될 걸 꼭….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루카의 눈치를 보다가 인벤토리에서 망치를 불러냈다. <정화의 망치> 스킬을 쓸 때가 온 것이다. 갑자기 없던 무기를 꺼내면 이상해 보이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가 없었다.
검은 막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확인해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루카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망치를 든 실비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구명 배가 출렁일 정도로 크게 동요하며 뒤로 물러났다.
“실비아! 그건 뭐야?”
“예? 망치죠?”
실비아가 어벙한 얼굴로 대답하자 그가 손을 들어 앞을 막았다.
“서운한 게 있으면 주먹보단 말로 해결하는 게 어떨까?”
“뭘….”
망치만 들었을 뿐인데 이상한 오해를 한 듯하다. 아무래도 루카는 평소에 죄 진 게 많아서 뭐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루카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할 일이 태산인데 신경 끄자. 그가 당장 오해를 하든 말든 실비아는 무심한 표정으로 할 일을 했다.
‘<정화의 망치>!’
깡 깡! 속으로 스킬 명을 말하며 망치로 막을 두드리자 정화 스킬이 발동됐다는 메시지와 함께 마치 유리처럼 검은 결계의 일부가 와장창 부서졌다. 몇 번을 깡깡거리며 깨부수자 그들의 앞에 배가 통과하기 충분할 정도로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루카는 결계를 망치로 치는 실비아를 보며 처음엔 놀라서 말리려고 했다. 그러나 결계가 유리처럼 깨지는 모습을 보곤 침묵하더니 뒤늦게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와…! 정말 대단해, 실비아. 너한테 섬 얘길 한 게 이번 년 가장 잘한 일이 될 것 같아.”
“뭘요. 별거 아니에요.”
“아냐.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배를 못 구했을 거야. 거기다가 결계가 이상해진 건 전혀 예상 못 한 일이야. 배를 구해 여기까지 왔더라도 섬으로 못 들어갈 뻔했어.”
“하하, 뭐, 그건 맞죠. 이제 들어가 볼까요?”
실비아는 거듭 이어지는 루카의 칭찬에 어깨 뽕이 가득 차는 걸 느꼈다. 루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노를 저어 깨진 결계 안으로 배를 몰았다. 결계를 넘어섬과 동시에 다시 한 번 아까 전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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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로 싸인 보물섬>에 입장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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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하겠어!’
실비아가 속으로 외치고 나니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자욱한 안개가 그들을 둘러쌌다. 그리고 곧 웅장한 효과음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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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메인 던전 : 안개로 싸인 보물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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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저절로 긴장되는 기분에 실비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루카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진한 안개에 눈살을 찌푸렸다.
“웬 안개지?”
“…그러게요. 이러면 섬까지 가기가 쉽진 않겠어요.”
‘<안개로 싸인 보물섬>이라더니. 이름대로구나.’
루카가 눈을 찌푸리며 안개를 쫓아내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나 안개가 손을 휘젓는다고 사라질 리가 없었다. 그는 혀를 쯧쯧 차더니 간단한 주문을 외었다. 그러자 화륵- 소리와 함께 손바닥 위에 불꽃이 일더니, 점차 몸을 키워 금세 활활 타는 불덩이가 되었다.
그가 정신을 집중하듯이 눈을 감고 손을 높이 올리자 불로 된 커다란 구체가 배 앞에 둥실 떠오르더니 곧 앞이 환해졌다.
루카는 진지한 표정으로 구체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걸로 바로 앞은 어떻게든 볼 수 있겠지만 여전히 섬까지 가긴 쉽지 않아 보이는걸. 혹시 몰라서 몸 안의 마력을 끌어올려 주는 물건을 들고 오긴 했지만…. 하늘이나 바다에 어떤 생명체가 있을지 모르는데 안개 좀 없애자고 다 불 질러 버릴 수도 없고 말이야.”
관자놀이를 짚으며 고민하는 루카의 모습에 실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사이코패스가 동식물을 걱정할 줄도 알다니! 생각보다 인간적인 면모가 존재했다.
사실 루카는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온 가업을 열심히 할 뿐, 누굴 함부로 죽인다거나 입에 담지도 못할 짓을 저지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비아는 눈앞의 남자 때문에 세 번이나 죽었기 때문에 그를 편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저 불 마법…. 루카를 공략하고 나면 불 마법을 쓸 수 있게 될 테니 던전 공략이 더 쉬워질 텐데. 그렇게 되면 성가신 안개를 치울 수 있는 스킬을 얻을지도 모르지.’
정화 스킬을 얻었던 노엘 때처럼 루카를 공략 하고 나면 불 속성 스킬을 얻게 될 텐데, 그게 던전 공략의 실마리가 되어 줄지도 몰랐다.
실비아는 자신을 등지고 있는 루카를 입맛을 다시며 바라보았다. 옷을 금방이라도 찢어발길 것 같은 눈빛에 루카가 본능적으로 또 섬찟함을 느낀 건지 몸을 떨었다.
“으, 이상하다. 여기 오고 나서부터 왜 이렇게 춥고 몸이 떨리지? 실비아, 너는 아무렇지 않아?”
“…괜찮은데요.”
“그래? 아, 미치겠다. 이러다가 몸살 걸리겠는데.”
루카는 아마 몸살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오싹함을 느낀 이유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실비아의 매서운 눈빛 때문이니까.
실비아는 슬쩍 엉덩이를 들어 그에게 더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는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 마법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법을 제가 알 것도 같은데요….”
“응? 뭔데?”
“후후, 그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