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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105화 (105/372)

105화

“…윽. 괜찮아,”

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인데도 실비아를 먼저 걱정하는 세비스의 말에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마음이 고마워서, 그리고 이대로 그가 죽어 버릴까 봐 겁이 나서였다.

‘울지 말자, 운다고 바뀌는 건 없으니까.’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땀을 닦는 척 눈물을 닦은 그녀는 애써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스킬이 통하지 않다니, 그렇다면 이제 어쩌면 좋을까. 그녀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다가 다시 소리쳤다.

“세비스, 늑대로 변신해!”

일반 제국민들은 늑대 수인을 자주 접하지 못했기에 선입견을 가진 사람이 가끔 존재했다. 그래서 원래 선원들 앞에서 몸을 바꾸는 걸 좀 꺼렸으나 이미 손톱, 발톱이 길어지는 것도 본 마당에 살고 보는 게 먼저였다.

그녀의 말에 세비스가 급하게 늑대로 변신했다. 그러자 갑자기 작아진 그의 몸집에 당황한 듯 잠시 움찔거리던 크라켄은 이내 빠져나가려는 검은 털 뭉치를 더듬거려 찾곤 다시 옥죄였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서 세비스를 빼내려 시도했지만 문어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이대로 못 구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자신은 플레이어니 죽으면 다시 마지막 세이브 지점으로 돌아가면 되지만 세비스는 달랐다. 만약에 그가 죽었는데 그대로 세이브가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그럴 리가 없나? 혹시 세비스가 죽자마자 세이브가 된다면?

예전에 해 본 게임 중에 동료가 죽은 채로 그대로 진행되던 RPG를 떠올린 그녀의 가슴이 선뜩해졌다. 그 순간 크라켄의 힘을 버티지 못한 끈이 끊어졌고, 문어 다리가 남은 끈을 털어 내려는 듯 크게 꿈틀거렸다.

“세비스! 괜찮아?”

“실비아 님….”

실비아의 물음에 검은 털 뭉치가 꼬물거리며 겨우 대답하다가 픽- 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크라켄이 계속 옥죄는 바람에 정신이 아득해진 듯했다. 그가 이대로 크라켄의 밥이 되게 놔둘 순 없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인벤토리에 있던 아이템 하나가 떠올랐다. <귀환 스크롤>. 원래라면 위급한 상황에서 쓰려고 했지만 지금 당장으로선 그 아이템만이 세비스를 살릴 수 있었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녀와 세비스가 같이 오두막집으로 돌아간다면 새우잡이 배를 이용해 보물섬으로 가는 루트는 완전히 실패하는 것이다.

‘나랑 세비스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면, 오두막집 밖을 나서는 순간 자동 세이브가 될 거야. 그러면 새우잡이 배로 보물섬에 가려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진다.’

그럼 다른 방법은 없을까? 자신이 죽은 후 마지막 세이브 지점으로 돌아가는 건 어떨까.

‘내가 당장 죽어서 원래대로 돌아가면 다시 삼 일간의 긴 시간을 새우잡이 배 안에서 보내야 해. 거기다가 같은 상황에서 크라켄의 공격을 피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어. 무엇보다 스스로 죽다니, 너무 끔찍한걸. 잠깐, 그건 게임이 만들어 준 데드엔딩이 아니잖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가는 그냥 그대로 지옥으로 갈 수도 있어.’

방법이 없나?

‘…아니지. 하나 있어. 크라켄을 무찌르면서 세비스를 구할 수 있는 방법. 당장은 이것뿐이야.’

그때 이제 바닷속으로 들어가려는 듯 크라켄이 꾸물거리며 뒤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안 돼!”

위급한 상황이 되니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그녀는 검은 털 뭉치를 휘감은 크라켄의 다리가 공중으로 높이 떠오른 순간 급하게 달려나갔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귀환 스크롤>을 불러내 세비스에게 힘껏 던지며 외쳤다.

“세비스, <귀환 스크롤>을 써. 크라켄이랑 같이 오두막으로 돌아가!”

다행히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든 세비스가 두루마리를 얼른 입으로 물었다. 그와 동시에 괴물이 차가운 바닷속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다. 그 순간 실비아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따라서 바다로 뛰어들었다. 혹시나 <귀환 스크롤>을 세비스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를 구출해야 했으니까.

“아이고! 실비아 님이 서 씨를 구하려고 바다로 들어갔어!”

“산 사람을 살아야지 그래도! 아유, 아유! 이걸 어쩐담!”

선원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기도 잠시, 웅- 하면서 커다랗게 해수면이 진동하더니 밝은 빛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진동으로 배가 크게 흔들리는 와중에 그들은 이게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난간을 붙잡거나 바닥에 겨우 엎드렸다.

사납게 출렁이던 해수면이 곧 잠잠해지면서 실비아가 바다 위로 솟아올랐다. 밑을 내려다보던 선원들이 급하게 구명 튜브를 내려 실비아를 끌어올렸다.

배로 올라온 그녀는 바디 타월을 받아 몸을 닦으며 방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가 크라켄과 세비스를 따라 바닷속으로 뛰어들자마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섬광이 시야를 가렸고, 곧 바닷속에 있던 괴물이 세비스와 함께 사라졌다.

‘<귀환 스크롤>이 제대로 작동한 거 맞겠지?’

그녀의 걱정을 안 건지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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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스크롤>로 세비스와 <세발낙지 크라켄>은 오두막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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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성공했구나. …세발낙지라. 어쩐지, 왜 여러 개 있는 다리는 내버려 두고 한두 개만 쓰나 했더니.’

그녀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메시지가 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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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발낙지 크라켄의 몸집이 오두막집에 비해 너무 컸다. 실비아의 보금자리였던 오두막집은 쓰임을 다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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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할 틈도 없이 짜잔- 소리와 함께 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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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 점거한 오두막집도 사라진 실비아는 <자랑스러운 우리 마을명물>에서 <측은한 우리 마을 떠돌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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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를 본 그녀는 순간적으로 너무 분통해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순식간에 <측은한 우리 마을 떠돌이>가 되다니.

‘개 같은…. 게임이면 상식적으로 홈그라운드는 안 부수는 게 맞지 않나? 오두막집이 터질 것 같다, 정도에서 멈춰야 정상 아니냐고! …그래, 빙의 된 마당에 뭔들 정상이고 뭔들 상식이겠어.’

최선을 다해서 크라켄도 물리쳤건만 너무 하는 것 아닌가.

잠시 화가 났던 실비아는 가까스로 진정하려고 노력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이미 없어진 거. 오두막집이 중요한가, 당장 세비스의 목숨도 살리고 크라켄도 물리쳤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다독였다.

‘성공… 성공했으니 됐지. 세비스도 살았고 크라켄은 물 밖에서 오래 살지 못하고 금방 죽을 테니, 그럼 세비스가 해체해서 수산물 시장에 내다 팔거나 하겠지?’

실비아는 온몸을 파르르 떨며 표출할 곳 없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그나저나 떠돌이라니…. 상태 창을 열어 상세설명을 보니 떠돌이의 효과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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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은한 우리 마을 떠돌이>

<측은한>의 효과로 랜덤으로 상점에서 공짜 물건을 얻게 된다.

<떠돌이>의 효과로 황실에서 지원하는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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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건 <자랑스러운 우리 마을 명물>보다 더 효과가 좋은데? 가끔 공짜 물건을 받게 된다니 엄청나다! 거기다가 복지 혜택까지?’

전에 가지고 있던 세간의 평가보다 혜택이 더 좋다니, 불행 중에 다행이었다. 무단 점거한 오두막집이 없어진 게 어쩌면 전화위복이 되는 걸까?

집만 있을 뿐 늘 돈 걱정을 하는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실비아네가 홈리스 신세가 되면서 드디어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거니까 진짜 잘 된 일이었다… 는 개뿔. 실비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망할, 살다 살다 이젠 떠돌이가 되다니. 열심히 살수록 가난해진다는 게 이 말인가. 당장 살 집은 어디서 구해.’

실비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떠돌이 신세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건 안 될 말이었다. 이번 던전에서 많은 돈을 벌어가야 밤에 몸을 누일 곳이라도 구할 수 있지, 안 그러면 꼼짝없이 제국 일보를 덮고 광장에서 자야 할 판이었다.

실비아가 걱정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려니 선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그… 서 씨는 어떻게 된 겁니까?”

“크라켄이 이대로 서 씨를 물고 간…. 아이고, 입이 방정이지.”

턱수염 선원이 손으로 제 입을 찰싹찰싹 쳐 댔다. 실비아는 사라진 집은 잠시 잊기로 하고 애써 방긋 웃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걱정마세요. 다행히 <귀환 스크롤>이 있어서 집으로 돌아갔어요. 크라켄도 같이 가긴 했지만… 뭍에서 힘을 쓸 수 없는 괴물이니 금방 죽었겠죠.”

“어유, 다행이네요. 그런 귀한 물건이 있었다니. 귀동냥으로만 들었던 아이템인데! 실비아 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군요. 처음에 몰라본 걸 사과드립니다.”

선원들이 실비아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자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세비스가 무사하단 걸 알게 된 선원들은 다시 기운을 차려서 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쉬고 계시라는 선원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엉망이 된 갑판 위를 함께 정리했다.

정비를 마친 배는 다시 보물섬으로 출발했다. 세비스랑 연락이 안 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배에도 강제로 길들이고 있는 갈매기 전서구가 있었기에 그에게 편지를 부칠 수 있었다.

[세비스, 나는 던전 공략을 마치고 갈 테니 너는 잠시 신전에 몸을 의탁하도록 해. 오두막집이… 그렇게 됐을 테니까 말이야. 어떻게 아냐고? 다 아는 수가 있어…. 내 걱정은 말고 네 몸부터 생각하길 바라. 곧 돈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갈게. 실비아로부터.]

밤늦게 전서구를 날려 보내고 크라켄과의 전투로 지친 실비아는 잠옷만 급하게 갈아입고 잠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눈곱만 떼고 급하게 조타실로 올라가 보니 여전히 눈이 맛탱이 간 항해사가 휠을 잡고 있다가 그녀를 반갑게 돌아봤다. 드디어 보물섬 근처까지 왔단 말에 그녀는 얼른 방으로 돌아가 인벤토리에 넣어 둔 <루카 전용 소환 스크롤>을 꺼냈다.

‘아이템 사용.’을 속으로 외치자 손에 있던 두루마리가 스르륵 사라졌다. 그러나 잠시 기다려 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왜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거야.’

생각해보니 지금은 이른 아침이었다. <소환 스크롤>의 작동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자고 있던 사람을 갑자기 불러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한참 뒤에 오려나 싶어 우선 샤워를 하기로 했다.

선원복은 어젯밤 크라켄과의 전투 때문에 푹 젖은 데다가 푸른 피로 더러워져 있어 입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인벤토리에서 미역 원피스를 꺼내 욕실 입구에 두곤 페달을 밟으며 샤워를 시작했다.

한창 열심히 바디 워시로 거품을 내 몸을 씻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욕실 안에 정체 모를 연기가 자욱이 퍼졌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루카가 하필 샤워실 안으로 소환된 것이다.

“실비아! 배를 구한 거야? 준비하느라 늦었어!”

“엄마야!”

예상한 상황이었다면 흐뭇하게 미소지었겠지만 귀신처럼 나타난 루카 때문에 실비아의 심장이 놀라 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그녀는 허둥지둥하다가 비누 거품을 밟고 미끄러졌다. 그 와중에도 실비아는 19금 게임의 인위적 법칙에 의해 필사적으로 팔을 휘젓다가 루카의 가슴에 손을 댔고, 둘은 함께 넘어졌다.

“윽! 아…. 실비아.”

“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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