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어, 어떤 소식요?”
실비아에게 양손을 잡힌 세비스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녀는 늘어난 소지금에 흥분해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짜잔! 3만 골드가 생겼지롱! 깜짝 놀랐지?”
자그마치 3만 골드나 되는 돈이 한꺼번에 생겼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지만 세비스는 잡힌 손이 신경 쓰여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온몸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보나마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개져 있겠지.
‘던전 공략 할 때도 부드러웠던 실비아 님의 손에 굳은살이 다 박였네. 새우잡이 배 선장은 내가 먼저 나서서 혼내 줄 걸 그랬어.’
“세비스?”
실비아가 대답 없는 그에게 의아해하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바라봤지만 그의 생각은 끝날 줄을 몰랐다.
‘같이 있으면서 내가 하는 일이 뭘까. 집안일이랑 요리를 열심히 하긴 하지만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 실비아 님은 늘 뭐든 열심히 하셔. 잠시 한눈팔고 있으면 벌써 저 앞으로 가 계시지. 이번에도 나는 실비아 님이 문제를 해결할 동안 옆에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잖아. 좀 더 적극적으로 실비아 님을 도우면 남자로 봐주실까.’
그녀의 썩은 뇌를 추호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는 더 열심히 그녀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그윽한 눈길로 싱그러운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어둑해지는 사위 때문에 어쩐지 진득하게 보이는 붉은 눈과 마주친 그녀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몰래 빼돌린 거 아니야!”
“네?”
실비아의 뜬금없는 말에 세비스가 뭔 소리냐는 듯 살짝 눈썹을 꿈틀대자 그녀의 오해가 더 깊어졌다.
“금고에 있는 돈을 빼돌린 게 아니라구. 세비스. 왜 수상한 사람 보듯이 쳐다보고 그래…. 내가 아무리 돈이 아쉽다고 해도 선원 아저씨들 몫을 슬쩍 하겠어? 이 3만 골드는 선원 아저씨들이 고맙다면서 굳이 사양하는데도 준 거야!”
아마도 실비아는 그의 눈빛을 오해한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평소의 세비스는 절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실비아가 알기로 세비스가 가만히 바라볼 때는 대부분 두 가지 경우였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미 알고 있으니 빨리 말하라고 추궁하거나 자신이 추잡한 짓을 했을 때가 그것이었다.
세비스는 말없이 한숨을 쉬며 제 앞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였다.
그 모습을 여전히 세비스가 돈의 출처를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오해한 그녀는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냈다. 뒤늦게 그런 게 아니라고, 세비스가 말하려 했지만 틈을 내주지 않았다.
“저기 가서 물어봐. 내 말이 맞단 걸 알게 될걸? 미역원피스도 받긴 했는데 이건…. 음, 나중에 전투할 때 보여 줄게. 하여튼 이 돈은 정당하게 얻은 거야!”
“네, 실비아 님. 알아요.”
세비스가 ‘그래, 참 잘했어요.’ 하는 얼굴로 은은하게 미소짓자 그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오늘따라 세비스가 뭘 잘못 먹었나. 눈빛이 왜 저따구지. 아니면 내 눈에 먼지가 들어간 건가? 어쩐지 너무 느끼해 보이는걸.’
실비아는 손으로 눈을 세게 비볐다. 그리곤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옆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크흠…. 이제 알겠어? 억울할 뻔했잖아. 그럼 선원 아저씨들이 준 3만 골드에다가 선장실 금고에서 꺼낸 우리 몫의 일당까지 합하면, 소지금이 7만 골드야!”
“정말요? 실비아 님, 이번에 새우잡이 배를 타길 정말 잘했네요. 소득이 커요.”
“놀랍지?!”
실비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를 흘깃 쳐다보니 세비스의 얼굴은 평소와 똑같이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안심하고 으스대며 자랑을 했다.
“참, 사람이 말이야. 찰나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내가 꾹 참기로 결정했다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겠지! …세비스 듣고 있어?”
“네, 듣고 있어요.”
실비아는 한참 동안 자랑질을 해 댔고 세비스는 적절한 추임새를 넣으며 그녀를 추켜세워 줬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지고 주위가 깜깜해졌다. 식사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선장과 배불뚝이가 사라져서 이제 감시할 사람이 없기에 요리사는 싱싱한 새우와 갓 잡은 물고기들로 음식을 내왔다. 덕분에 선원들과 실비아네는 서로의 밝은 앞날을 빌며 즐겁게 저녁 만찬을 벌였다.
그렇게 선상에서의 밤이 지나가는가 했는데….
우르릉- 쾅쾅!
“저기! 저기 짐 고정해!”
“그물은 싹 다 모아서 안으로 옮깁시다!”
아닌 밤중의 폭풍우로 갑판 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예상치 못한 풍랑을 만난 것이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무거운 해우가 갑판을 때렸다. 비옷을 입은 선원들이 분주하게 여기저기 뛰어다니자 실비아와 세비스도 그들을 도왔다.
안 그래도 연식이 오래돼서 고물상에 가져다 팔기로 한 배인데 풍랑에 무사할 수 있을까 무척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배를 집어삼킬 것 같은 집채만 한 파도가 위협적으로 배 여기저기를 치고 지나가자 덩치 큰 선원들의 얼굴에도 공포심이 깃들었다.
‘이러다가 배가 침몰해서 데드엔딩을 맞으면 어쩌지?’
몇 번을 죽어도 죽음은 익숙해지지 않는 법.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낫지, <배가 부서져 망망대해에서 나무 조각을 붙잡고 떠내려가다가 무인도에서 여생을 마감> 엔딩 같은 게 뜨면 끔찍할 것 같았다.
그때 마치 폭풍전야처럼 사위가 고요해지더니 시커먼 바닷속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한 선원이 공포에 질려 외쳤다.
“으아악! 크라켄! 크라켄이야!”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거대한 문어 다리가 물살을 가르고 솟아오르더니 쿵-! 하고 갑판 위로 떨어졌다. 100년 묵은 나무의 몸체 같은 거대한 문어 다리가 반으로 접혔다가 다시 펴지며 갑판 위를 훑고 다니는 모습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전부 저놈을 공격합시다!”
선실로 들어간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선원들은 공포심을 무릅쓰고 무기를 들었다. 실비아와 세비스도 고개를 끄덕이곤 각자 망치와 손톱을 꺼냈다. 다리 한 짝만 해도 웬만한 사람 열 명의 몸을 합쳐놓은 듯한 크기였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성가시게 굴면 질려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열심히 문어 다리를 공격했다.
퍽 퍽, 깡 깡, 쉬익 쉬익-.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문어 다리에 스크래치를 내자 흉측한 몸통에서 시퍼런 피가 튀어나왔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비주얼이었지만 한가롭게 감상이나 할 때가 아니었기에 공격에 집중했다.
애석하게도 거대한 크라켄은 실비아가 지금 상태에서 무찌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크라켄의 다리만 공격하였다.
‘루카를 공략하고 나면 불속성 스킬을 익힐 수 있었지. 그러면 마법으로 크라켄을 무찌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지금은 정화스킬 말고는 기본 물리 공격만 할 수 있으니 무리야. 거기다가 저놈은 바다가 제 구역이니 활개를 칠 수 있지만 우리는 배를 잃으면 꼼짝없이 물고기 밥이 될 테니 마음껏 공격하기도 힘들지.’
한참을 찌르자 문어 다리가 너덜너덜해졌다. 푸른 피를 뿜던 문어 다리는 순간 꿈틀- 하고 비틀거리더니 스르륵 배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잠시 일시 정지한 상태로 다시 올라올 크라켄을 기다리던 선원들은 한참이 지나도 괴물이 밖으로 나올 기미가 안 보이자 ‘살았다!’라고 소리치며 얼싸안고 기뻐했다.
그들과 같이 안도한 실비아가 푸른 피가 튄 얼굴을 손으로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크라켄이 도망친 건가?”
“그런 거면 좋겠는데요.”
세비스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고 제 손톱도 닦았다. 크라켄과 사투를 벌이고 나니 바다 위도 아까의 난리는 거짓말이었던 양 잔잔해졌다. 여전히 비는 세차게 내리지만 파도가 멎었다. 바다를 내려다보며 실비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는 크라켄이 바닷속을 휘저어서 풍랑이 거세게 일어난 거였나 보네.’
크라켄이 다시 공격을 시작할까 봐 경계를 늦추지 않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도 잠잠한 걸 보고 갑판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세비스와 실비아도 그들과 함께 어질러진 선상을 정리했다.
세비스는 크라켄이 올라오면서 같이 딸려 온 해초 더미를 모아 바다 위로 던졌다. 실비아가 배 중간까지 밀려간 짐들을 끌고 와 기둥에 묶여 있는 끈으로 고정시키고 있는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갑작스레 크게 기울었다. 선원들의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실비아의 눈에, 문어 다리에 감겨 바다로 질질 끌려가고 있는 세비스가 보였다.
“으악! 크라켄이 다시 나타났다!”
“아이고, 서 씨, 서 씨가 잡혔어. 이걸 어째.”
선원들은 갑작스러운 괴물의 재등장에 집어 던졌던 무기를 다시 꺼내 다리를 세차게 찔러 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세비스는 급하게 손발톱을 길게 빼 갑판을 붙잡고 끌리지 않으려 했지만 크라켄의 힘을 이기기 힘들어 보였다.
선원들이 어찌할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와중에 실비아는 급하게 기둥에 매여 있는 끈과 방금 인벤토리에서 불러낸 망치를 번갈아 봤다. 길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급하게 망치 끝에 끈을 단단히 고정하고는 당장이라도 세비스를 바다 안으로 끌고 갈 것 같은 문어 다리를 바라보았다. 선원들의 공격에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은 듯 세비스를 잡은 문어 다리가 공중으로 치켜 올라간 순간, 실비아가 <부메랑 망치>를 속으로 말하곤 망치를 힘껏 던지며 외쳤다.
“문어 다리를 감아!”
힘차게 날아간 망치가 끈으로 공중에 떠 있던 문어 다리를 감더니 빠른 속도로 실비아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 덕에 크라켄은 세비스를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지 못하고 출렁거렸다.
끈을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끌어당기며 그녀가 외쳤다.
“같이 당겨 주세요!”
곁에 서 있던 선원들이 곧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곤 젖 먹던 힘을 다해 끈을 잡아당겼다.
쿵! 하고 다시 갑판 위로 쓰러진 문어 다리는 그 와중에도 세비스를 놓지 않았다.
“끈을 기둥에 단단히 감아 주세요!”
선원들에게 부탁한 실비아는 끈을 푼 망치를 들고 세비스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갔다. 잠시 넘어진 충격으로 비틀거리던 문어 다리는 다시 팽팽하게 줄을 당기며 빠져나가려고 꿈틀거렸다. 그 몸부림에 튼튼하던 끈의 올이 풀려 아슬아슬하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끈을 끊은 크라켄이 세비스를 잡아 바다로 끌고 들어갈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
실비아는 <손은 눈보다 빠르다>를 써서 순식간에 문어 다리 앞으로 갔다. 그러나 스킬을 써서 크라켄을 때려눕히려던 그녀의 계획은 바로 틀어졌다. 크라켄은 그녀보다 레벨이 높았기에 바로 스킬을 <간파> 당한 것이다.
실비아의 움직임을 읽은 크라켄이 다른 다리를 수면 위로 끌어 올려 그녀를 내동댕이치자 세비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실비아 님! 괜찮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