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실비아 님, 일어나셨어요? 또 일할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오네요.”
“하아, 아직 동이 트지도 않았건만 벌써 일을 하라니…. 어제도 한참을 부려먹어 놓고는!”
“그러게 말이에요. 상시 모집이 괜히 상시 모집이 아니었나 봐요. 꾸준히 일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늘 인력이 부족한 거겠죠.”
남의 돈 먹기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거라고 했던가.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쉴 틈 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하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선택지가 아니라도 따지고 싶어진 실비아는 대충 고양이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는 흉흉한 얼굴로 배불뚝이를 찾아 나섰다.
마침 배불뚝이는 하품을 하며 뱃머리에 기대 서 있었다. 실비아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성큼성큼 다가가니 그가 깜짝 놀라서 몸을 바르게 세웠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는 단호한 얼굴로 배불뚝이 앞을 막아섰다.
“배불… 갑판장님. 한 말씀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인간적으로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어제도 거의 밤 10시까지 일을 시켜 놓고 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 다시 일하라니요?”
“어허! 이 사람이 왜 이런대? 신전이 싫으면 신관이 떠나야 한다는 말도 몰라? 싫으면 집으로 돌아가시든지!”
배불뚝이는 잠시 찔린 표정을 하더니 그녀에게 배를 들이밀며 이죽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라니, 바다에 뛰어들기라도 하란 말인가.
실비아가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혀 있다가 겨우 입을 여는데, 그 모습을 외면한 배불뚝이가 ‘허, 참! 요즘 젊은 것들은 고생을 몰라서 문제야!’라고 혼잣말을 하곤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저기요!’라고 불러 봤지만 귓구멍이 막힌 것처럼 무시하고 지나가는 모습이 황당했다.
‘좋게 말하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헛소리를 진지하게>를 써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실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우선은 다른 선택지가 있으니 스킬을 아껴 두기로 했다.
‘남용했다가는 저번처럼 부작용이 일어날 수도 있어. 우선 다른 선택지인 선원들과 대화하기를 해 보자.’
그녀는 일하다가 잠시 짬이 날 때 선원들을 모아 보기로 마음먹었다.
작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또 끝없는 노동이 시작됐다. 바쁜 와중에 주위를 둘러본 실비아는 채찍을 바닥에 내려치며 거들먹거리는 배불뚝이를 몰래 째려보았다. 열심히 일하고 있건만 더 쇠가 빠지게 일하라고 채찍을 들고 위협을 하다니. 정말 최악이었다.
이를 갈며 그물을 손질하던 실비아는 생각에 잠겼다. 과연 선원들과 얘기를 한다고 해서 뭐가 얼마나 바뀔지가 문제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2천 골드는 일반 제국민들에게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일이 익숙한 선원들의 모습을 보니 이제껏 돈만 바라보며 묵묵히 일해 온 것 같았다.
고민하던 실비아는 또 고개를 저었다. 일당이 많다고 해서 꿀꿀이죽 같은 식사에 최소 휴식 시간도 보장이 안 되는 근무 환경은 말이 안 됐다. 망망대해에서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거나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일을 하는 건데 그만큼 쾌적한 근무환경을 보장해 줘야 되지 않을까? 지쳐 보이는 선원들의 표정을 보니 제 생각이 잘못된 것 같진 않았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그물이 찢어져 잠시 조업이 중단됐다. 주위를 둘러보니 갑판 위에는 배불뚝이와 선장은 물론이고 항해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 딱 선원들과 대화를 할 타이밍이군.’
그녀는 그물을 손질하는 척하며 옆에서 일하는 선원들에게 불평불만을 말했다. 처음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망설이던 그들은 실비아의 진지한 표정에 술자리에서의 뒷담보다 더 솔직한 얘기들을 해 줬다.
“그게 사실은 말이지….”
“예, 하나도 빠짐없이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대화를 나누다 알게 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일당 2천 골드는 사실 알바생을 구하기 위한 페이크고 새우를 하루 동안 5천 마리를 까야 최대 2천 골드의 인센티브가 지급 되는 거지, 기본 시급은 500골드라는 것이었다.
새우잡이 배에 인센티브제를 적용하다니. 현생에서 구인 사이트에 이딴 공고를 올려놨다간 지속적인 신고로 내려갈 터였다. 웬만한 악덕 알바보다 더 지독한 기만에 그녀의 눈이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뭐야. 500골드라니! 바다 위에서 하루 종일 부려먹어 놓고 말도 안 되는 수당이잖아.’
“500골드라니! 이 고생을 시켜놓고 그게 말이 되나요?”
실비아가 분에 겨워하자 선원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해 온 일이 이것뿐이라 익숙하다.’라고 체념하면서도 결국 이 배에서 일을 시작한 게 후회된다고 했다.
정상적으로 다른 배에서 수당을 받았으면 이 나이엔 배 하나쯤 가지고 있을 텐데, 돈을 받기 전에는 배에서 내릴 수가 없다며 그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계속 얘기를 들어보니 선장은 힘없는 선원들의 월급도 10년 이상 체불한 상태였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나야 며칠 일한 돈을 못 받으면 선장 뚝배기를 깨고 받아 내면 그만이지만, 이 아저씨들은 너무 불쌍하잖아! 배도 얻을 겸 이 사람들을 도와줘야겠어.’
참을 수가 없어진 실비아는 머리를 굴렸고 곧 좋은 묘안을 떠올렸다. 그녀는 선원들을 구석에 모아서 웅변하듯이 제 의견을 피력했다. 오랫동안 횡포에 익숙해져 무기력해진 그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헛소리를 진지하게> 스킬도 후추 뿌리듯이 조금 썼다.
처음에는 망설이던 선원들도 그녀의 설득에 점점 넘어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실비아의 말에 고무된 선원들은 손에 하나씩 무기를 들고 씩씩대며 선장실을 향해 흉흉하게 걸어갔다. 그 선봉에 망치를 든 실비아가 섰다. 세비스도 뒤늦게 합류해서 얼떨떨한 얼굴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실비아는 성큼성큼 앞서 나가며 망치를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갑시다! 우리의 소중한 돈을 되찾자고요!”
그렇게 선장과 배불뚝이 갑판장, 항해사들이 게으르게 오수에 빠진 오후 3시. 선상 위에서 조그만 혁명이 일어났다!
흉흉한 기세로 거침없이 선장실 문을 부수고 들어간 그들은 이 난리가 났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엎어져 있는 선장과 배불뚝이를 발견했다. 테이블에서 나뒹구는 술병을 보니 낮술을 한 듯했다.
“이것들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어? 저기 봐.”
선원들이 뛰어가 한 남자를 붙잡아왔다. 화장실을 갔다가 방으로 들어오던 1등 항해사가 무리를 발견하고 몰래 도망가려다가 뒷덜미를 잡힌 것이다. 그는 선장과 배불뚝이랑은 달리 책임자는 아니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방관자였다.
실비아는 그를 은밀히 밖으로 불러냈다. 선원들과 실비아는 배를 운전해 본 적이 없기에 항해사를 설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뭐? 나보고 당신들을 위해서 배를 운전하라고? 웃기는 소리!”
역시나 그는 좋은 말로 설득해선 들어먹질 않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헛소리를 진지하게> 스킬을 써서 그의 운전 욕구를 북돋아 주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실비아는 스킬의 힘을 믿고 그냥 아무 소리나 하기로 했다.
‘에라, 모르겠다.’
“림, 림, 림보르기니이이이, 보르보르보르쉐에에에에에, 삐빅, 환승입니다. 삐빅-! 잔액이 부족합니다.”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말하면서도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든 그녀는 아찔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참 가지가지 하는군. 통하긴 할까.’
염려와는 다르게 스킬의 효과는 굉장했다. 대체 어느 구절에서 설득당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맛이 간 눈깔로 배 운전은 내가 하겠다고 외쳤다. 실비아는 흐뭇하게 웃으면서도 스킬 이거 참 무섭다고 느꼈다.
‘<헛소리를 진지하게> 스킬이 생각보다 더 위험한 스킬이었네. 이런 개소리도 먹힐 줄이야. 설마 이런 정의로운 일에 쓰는데 업보가 오르진 않겠지.’
다행히 업보가 올라갔다는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항해사 설득도 끝났겠다, 선장실로 의기양양하게 돌아와 보니 선장과 갑판장 배불뚝이가 밧줄에 결박당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양옆에는 분노한 얼굴의 선원들이 그들을 감시 중이었다.
실비아가 둘을 가만히 내려다보자, 곁에 다가온 세비스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려 주었다.
술에 취해 자고 있던 선장과 배불뚝이를 깨운 선원들은 처음에는 좋게 말로 설득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동안 체불한 임금을 다 지급하고 근무 조건을 개선해 달라고 하자 선장과 배불뚝이는 조용히 듣는 척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선장이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칼을 빼 들었고 선원들을 공격하려고 달려들었다.
다행히 세비스가 동물적인 감으로 길게 낸 손톱을 이용해 선장의 칼을 막아섰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한 순간이었다. 공격이 막히자 주춤한 선장을 화가 난 선원들이 포박했고 옆에서 어쩔까 눈치를 보던 배불뚝이도 함께 무릎 꿇린 것이다.
순박한 선원들은 무기를 들고 왔지만 나름 최후의 순간까지 평화롭게 대화를 시도했는데 그 마지막 기회를 선장은 차 버렸다. 밧줄에 묶여 있던 선장은 실비아와 세비스의 대화를 듣더니 몸을 흔들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씨발, 이것들이 갑자기 왜 이러나 했더니만 니들이 문제였구나! 일하러 왔으면 조용히 일이나 하다 갈 것이지, 왜 애들 헛바람을 들게 하고 난리야, 난리가!”
“헛바람?”
“그럼 헛바람이지. 고용주에게 감히 대들고 말이야. 이것들아, 나니까 니들을 써주지, 딴 데 가면 나이 먹었다고 받아 주지도 않아! 주제를 모르고 말이야!”
선장이 붉어진 얼굴로 악다구니를 써 댔다. 첫날 이후로 본 적이 없어서 말수가 적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냥 술을 처먹어서 조용한 거였다. 그나마 옆에 있는 배불뚝이는 눈치가 있는지 입을 닫고 있는데 선장은 선원들의 화가 난 얼굴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막말을 뱉어 대고 있었다.
실비아의 원래 계획은 반성한 선장에게 체불 된 임금을 받아 선원들에게 나눠 주고, 겸사겸사 배도 그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명 배로 선장과 배불뚝이는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 내려보내고, 항해사에게 보물섬까지 데려다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뻔뻔한 선장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자비를 베풀 마음이 사라졌다.
선원들과 세비스를 잠시 내보낸 실비아는 <헛소리를 진지하게> 스킬을 써서 그의 금고 비밀번호를 알아냈다. 금고 안엔 직원들의 근무 장부와 함께 금화와 수표 뭉치가 잔뜩 들어 있었다.
“모두들 들어오세요.”
밖에 서 있던 그들을 다시 불러 모은 실비아는 장부에 적힌 대로 재화를 나눠주었다. 장부가 정확한진 모르겠지만 기준을 삼을 만한 건 그것뿐이었다. 다행히 선원들은 다들 만족한 듯 연신 허리를 굽히며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럼 이 배는… 어느 분이 가지면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