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세비스가 가리킨 곳을 보니 마치 금방이라도 풍랑을 만나 좌초할 것 같은 낡은 배가 하나 있었다. 연식이 적어도 20년은 된 듯한 배였다. 배 위에는 딱 봐도 한 성질 할 것 같은 거친 이목구비의 뱃사람들이 그물을 손질하거나 파이프를 문 채 걸걸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저분들과 며칠 동안 한 배에서 동고동락해야 하는 건가. 조금 무서운걸.’
실비아가 살짝 졸아 있는데, 세비스가 그녀를 데리고 배로 가까이 걸어가 외쳤다.
“저기요! 선장님 계신가요?”
“누구신가들?”
세비스의 씩씩한 목소리에 배불뚝이 선원이 둘을 힐끗 바라봤다.
세비스는 모자를 고쳐 쓰곤 꾸벅,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실비아도 옆에서 같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이 배에 승선하기로 한 선원들입니다.”
“선원이라고? 아니…. 둘 다 좀, 몸이 비리비리해 보이는데. 잠시만 기다려보슈. 어이, 선장님! 알바생들 왔는데요.”
배불뚝이가 크게 소리쳐 선장을 부르자 잠시 후 코가 빨갛고 머리가 희끗한 중년남성이 럼주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나타난 뒤에도 작은 목소리로 선원과 뭐라 뭐라 잠시 떠들더니 술병의 코르크 마개를 열어 꼴딱꼴딱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며 걸어가 사다리를 내리고 손을 위로 까딱거렸다. 올라오란 소리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올라가자. 세비스.”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삐걱거리는 나무 사다리를 위태위태하게 기어올랐다.
‘근데 아무리 게임 속 캐릭터라고 해도 그렇지, 편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냐? 딱 봐도 여자인 나를 너무 쉽게 채용하는데….’
실비아는 잠시 의아함을 느꼈지만 갑판 위에 올라간 뒤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에 곧 잡생각을 버렸다.
둘이 갑판 위로 올라서자 올 사람이 다 온 듯 배가 출항 준비를 시작했다. 선장은 그들을 힐끗 보더니 신경 쓰지 않고 선장실로 올라갔다. 그 대신에 미리 지시를 받은 건지 배불뚝이 선원이 둘을 데리고 가 방을 배정해 주었다. 그는 자신을 이 배의 갑판장이라고 소개했다.
혹시나 10인실에라도 들어갈까 염려한 실비아였지만 다행히 2인실을 세비스와 함께 쓰게 되었다.
‘또 같은 방…. 정말 너무 편견 없다. 아니야…. 5인실, 10인실이 아니라 2인실이니 다행이지. 19금 게임의 특성이라고 생각하자.’
19금 게임의 특성인 것치곤 너무 건전하게 하루하루가 돌아갔지만 세비스와 같은 방을 배정받지 않았나. 그녀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방을 배정받고 착용감이 있어 보이는 후줄근한 줄무늬 선원 옷을 배급받는 사이에 힘차게 뱃고동이 울리며 배가 출발했다. 화장실과 방에서 각각 파란 줄무늬 옷과 빵모자 차림으로 갈아입은 둘은 갑판으로 걸어 나왔다.
“실비아 님! 저, 배 처음 타 봐요. 너무 신나요.”
“으응. 신나네. 어떤 일을 시키려나.”
세비스는 방긋 웃었지만 실비아는 낯빛이 어두웠다. 세비스는 배를 처음 타 봐서 설레는 마음으로, 실비아는 또 어떤 미친 일이 벌어질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멀어져 가는 바닷가 마을을 바라봤다.
얼마 안 돼서 항구는 점처럼 작아지더니 시야에서 사라졌고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어이! 놀지 말고 일하슈!”
배 난간에 몸을 기대고 바다를 구경하고 있던 그들을 발견한 갑판장 배불뚝이가 윽박지르듯이 바닥 청소를 명령했다. 그들은 다른 선원들과 함께 기다란 막대가 달린 솔로 쓱싹쓱싹 열심히 바닥을 청소했다.
그다음엔 채찍질하는 배불뚝이의 눈치를 보며 그물을 손질하는 사람들 옆에서 새우 찌꺼기를 부지런히 치웠다. 그게 끝나고는 마른걸레를 들고 배 이곳저곳을 열심히 닦았다. 또 빨래도 개고 잡아 놓은 새우도 손질하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한 세 시간 일했나? 현생은 물론이고 게임에서도 이렇게 빡세게 일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실비아는 제 몸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승선하기 전엔 뽀송했던 그녀의 몸에는 어느새 새우 쩐 내가 잔뜩 배어 있었다. 옆의 세비스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몰골이었다.
‘시발, 무슨 체험 삶의 현장도 아니고 진짜 힘드네.’
“실비아 님, 저 눈앞에 별이 보여요….”
“나도….”
실비아와 세비스가 높은 노동 강도로 고통에 시름하고 있는데 구석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양은냄비를 땅땅-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배불뚝이가 점심시간을 알린 것이다.
“점심들 먹고 하슈.”
잠시 멍하니 있던 그들은 좀비 떼처럼 밥을 향해 걸어가는 선원들을 힐끗 보고는 후다닥 함께 달려갔다.
배식 대 앞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 선원들은 서로를 떠밀며 먼저 밥을 받으려고 난리였다. 우워어- 하는 좀비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인파를 헤치고 나아간 그들은 이가 나간 나무 식판을 들고 정체 모를 음식을 배급받았다. 새우잡이 배라서 식사를 크게 기대하지 않긴 했지만 야채인지 고기인지 모를 수상한 재료들이 찌꺼기처럼 떠 있는 멀건 죽을 보니 비위가 상할 것 같았다.
그러나 시장에 장사가 없다고 하던가. 이상한 음식도 입에 잘만 들어갔다.
허겁지겁 죽을 해치우고 나자 오 분도 안 돼서 다시 중노동이 시작됐다.
‘식사도 별로고 휴식시간도 제대로 안 주네. 현실이었으면 노동청에 고발했다, 정말.’
망할 놈의 새우잡이 배는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괜히 일당이 이천 골드가 아니었고, 괜히 상시 모집이 아니었다.
망망대해에서 탈주도 못 하고 근육이 녹아내릴 때까지 일하고 또 일하고… 그러다가 양은냄비를 땅땅- 두드리면 하던 거 던지고 달려나가 허겁지겁 밥을 입에 욱여넣고 죽은 듯이 잠들고….
그렇게 삼 일 차가 되자 둘의 모습은 몇 년 차 선원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실비아의 손바닥에는 망치를 휘둘러도 박이지 않았던 노동 굳은살이 잔뜩 생겼다.
갑판의 찌든 때를 닦다 보니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졌다. 작업 시간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실비아와 세비스가 기둥에 기대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데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아저씨들이 다가오더니 옆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리곤 가져온 먹을거리를 펼쳐 놓고 둘에게 술을 권했다.
“어이, 서 씨! 신 씨! 술 한잔 받아.”
“저는 신 씨가 아니라 실비아인데요…. 얘는 서 씨가 아니라 세비스구요.”
“뭐가 됐든. 힘들 땐 술 한잔 마시고 털어 버리는 거야.”
세비스는 정신이 흐려지는 걸 싫어했기에 사양했고 실비아는 간만의 술에 눈이 돌아가 얼른 잔을 내밀었다. 꼴깍 소리를 내며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오랜만에 알코올을 섭취하자 온갖 시름이 달아나는 듯했다.
“자, 새우 안주도 먹어.”
“감사합니다.”
구운 새우를 집어 먹으며 고개를 들어보니 반짝이는 별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노동력 착취만 제대로 당하다 보니 여태껏 밤하늘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도 몰랐다.
선원들과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다 보니 선장과 갑판장에 대한 여러 가지 불만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뒷담을 선장과 배불뚝이가 들으면 큰일 날 텐데.’
겁이 난 실비아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자 선원들이 손사래를 치며 선장과 갑판장은 진작에 술을 마시다가 뻗었을 거라고 했다.
뒷담화가 끝난 후엔 실없는 수다가 이어졌다. 아들딸 같은 실비아와 세비스를 보니 고향 생각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히는 선원들의 모습에 마지막엔 다 같이 얼싸안고 꺼이꺼이 울며 술자리는 끝이 났다.
즐거운 술자리도 잠시, 내일 일할 생각을 하자 실비아는 술이 바로 깨버렸다. 그녀는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세비스와 함께 새우껍질이 나뒹구는 갑판을 힘없이 터덜터덜 가로질러 배정받은 방에 도착했다.
“실비아 님, 먼저 씻으세요….”
“그래….”
세비스가 힘겹게 말하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자 실비아도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비스는 온몸의 진이 다 빠진 듯 의자를 놔두고 나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끼익- 소리가 날 정도로 녹이 잔뜩 슨 샤워실 문을 열며 실비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의 샤워실은 씻을 때마다 짜증이 나네.’
오두막집은 여기에 비하면 호텔이었다. 온몸을 두드려 맞은 것 같은 고통 속에 그녀가 부들부들 떨며 옷가지를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물이 즉각 나오지 않자 실비아는 눈을 감고 파르르 떨었다.
‘휴, 그래. 이 페달을 밟아야 물이 나오지. 망할,’
첫날 일을 마치고 씻으려는데 물이 안 나와서 얼마나 고생했던가. 알고 보니 페달을 밟아야 물이 나오는 방식의 샤워기였다. 이건 삼일 차인데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바닥의 페달을 세차게 밟았다. 미친 듯이 삐걱거리며 밟아도 개미 오줌만큼 찔끔 나오는 물 때문에 한참을 걸려서야 겨우 샤워를 끝낼 수 있었다.
지친 얼굴로 그녀가 샤워실에서 나오자 바톤 터치를 한 세비스가 들어갔다. 실비아가 침대에 앉아서 목을 돌리자 뚜둑- 뚜둑, 하는 소리가 살벌하게 났다.
‘이건… 이건 최악이야. 신전 알바처럼 능력치가 오르는 것도 아니고. 진짜 쌩고생이잖아. 돈이고 뭐고 도망치고 싶어. 배를 얻으려면 선장과 대화를 해야 하는데 일이 이렇게 힘들어서야 뭘 어떻게 하냐고! 선장 얼굴 볼 틈도 없이 노동을 해야 하잖아.’
그녀가 속으로 투덜대고 있는데 눈앞에 갑작스럽게 선택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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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만 하다가는 보물섬에 언제 갈지 몰라! 뭐라도 해야겠어. 내일 자고 일어나서 해야 될 일은…
- 선원들과 불평을 한 번 더 얘기해 본다.
- 배불뚝이에게 찾아가 일거리를 줄여달라고 호소한다.
- 아무도 몰래 구명 배를 훔쳐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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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녀가 뭘 할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자 선택지가 떠오른 것 같았다. 1, 2번은 무난한 거 같은데 3번은 좀 그랬다. 구명 배를 훔쳐 달아나라니, 조그만 배로 보물섬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삼 일 동안 번 일당도 전혀 못 받고 끝날 게 아닌가.
‘아까도 술자리에서 수다를 떨었잖아. 다시 선원들과 얘기한다고 뭐가 되려나? 배불뚝이한테 말해볼까?’
그녀는 오랜만에 <헛소리를 진지하게>를 써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스킬이 아니라도 기본적으로 화술을 많이 올려서 그런지 유창하게 말이 나왔기에 배불뚝이를 설득하는 게 어렵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최소한 근무 환경이라도 좋게 만들어놔야 선장을 설득할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2번을 선택했지만 당장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지친 몸을 싸구려 침대에 눕혔다. 너무 힘들게 일해서 그런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그녀의 눈이 저절로 감겼다. 실비아는 그렇게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
뿌우- 뿌우!
몇 시간을 잤을까. 시끄러운 기상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태 창을 보니 피로도는 아주 조금 해소된 상태였다. 아직 다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일을 해야 되는 것이다. 저절로 욕이 나오는 상황에 실비아는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귀가 밝은 세비스는 진작에 깨어났는지 힘없이 양말을 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