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다음 날 아침, 실비아는 고소하고 달달한 냄새를 맡고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 보니 세비스는 옆에 없고 허전한 자리만이 그녀를 반겼다. 1.5룸 집안을 가득 채운 고소한 냄새로 미루어 보아 한창 아침 식사를 만들고 있는 듯했다.
“세비스, 아침 식사 만들고 있어?”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실비아 님.”
소리쳐 묻자 세비스가 부엌에서 명랑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 앞으로 가 거울로 제 얼굴을 살폈다.
‘어우, 눈이 완전 개구리가 됐네.’
어제 실컷 울었더니 실비아의 눈이 다래끼가 난 것처럼 부어 있었다. 그녀는 아려 오는 눈가를 비비며 눈곱을 떼곤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려! 세비스랑 어제 드디어 한 침대에서 같이 잤는데 잠을 설치지 않고 푹 잔 게 이상했다. 한창 자다가 화장실에서 귀신이 흑흑거리며 울길래 ‘조용히 좀 하자, 이 좁아터진 집구석에서 사는 게 너뿐인 줄 아냐!’고 벽을 쾅쾅 치며 울분을 터트린 것 빼곤 완전히 숙면을 취한 것이다.
물론 세비스는 정신은 어른이라도 몸이 성체가 아니기에 입에 담을 수 없는 이것저것을 했다간 19금 게임의 심의 준수 법에 의해 지옥에 끌려갈지도 모른다…. 그러니 야한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거지만 법에 걸리지 않는 한 야한 상상이야 할 법도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는 번뜩 어제 기분이 안 좋아서 대충 봤던 메시지 창을 떠올렸다.
‘아, 그래. 퀘스트 실패로 경건한 마음이 생겨서 그렇구나.’
절망한 상태로 흘깃 보고 꺼버리는 바람에 잊고 있었는데, 실비아는 어제 게임에 빙의한 이래 처음으로 퀘스트를 실패했다. 그래서 디버프로 마음이 경건해지는 효과를 얻었기에 잡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근데 그런 효과가 없었어도 어차피 야한 생각을 할 상황은 아니었지, 뭐.’
실비아는 여러 번 말하지만 상식이 있는 변태였기에 분위기를 읽을 줄 알았다. 어제 그런 상황에서 야한 생각을 했다면 그건 정말 갈 때까지 간 변태일 것이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고 기지개를 켜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오늘 날씨 참 좋네. 새우잡이 배를 타러 가야 하는데 비라도 왔으면 노인과 바다를 찍을 뻔했는데, 다행이다.’
그녀는 거렁뱅이 옷을 개조해서 만든 커튼을 걷고 집 밖을 구경했다. 여유롭게 날씨를 감상하기도 잠시, 눈을 비비며 동그랗게 떴다. 원래라면 잡초가 무성했을 앞마당이 깔끔해져 있었다. 세비스가 앞마당을 정리한 건가?
“세비스! 앞마당은 언제 청소한 거야?”
“네? 아아. 어제 청소했다고 말씀드린 거 기억나시죠? 앞마당에 자란 게 잡초들처럼 보였는데 나름 쓸모 있는 식물들이더라구요. 싸그리 뽑아서 안 먹을 건 시장에 내다 팔고 남은 건 냉장고에 저장했죠. 그래서! 오늘 아침 식사 메뉴는 쑥 수프….”
“와!”
‘맞다. 세비스가 어제 앞마당에서 쑥을 캤다고 했었지. 쑥이라, 그거 나쁘지 않지!’
실비아가 신선한 쑥을 떠올리며 작게 환호성을 지르자 주방에서 세비스의 말이 이어졌다.
“…는 애피타이저고 쑥 피자, 쑥 샐러드, 쑥 리소토가 있습니다! 후식은 쑥 푸딩과 쑥차예요.”
“와아…. 그것참…. 듣기만 해도 건강해질 거 같은 메뉴네.”
하나 정도면 좋아했겠지만 신선함이 과했다. 온통 쑥 파티라니 끔찍한 일이었다. 실비아는 순간적으로 반찬 투정을 하려다가 꾹 참고 힘없이 호응을 했다. 생각해 보니 어제 그녀는 한꺼번에 많은 돈을 쓰지 않았던가. 그것 때문에 세비스가 집 앞에 있던 쑥들로 잔치를 연 게 분명했다. 헛짓에 돈을 쓰지 않았다면 고기 한 점 정도는 밥상에 올라왔을 텐데, 슬픈 일이었다.
‘그래, 뭐라 안 하는 게 어디야. 쑥 파티는 감수해야지.’
실비아는 어깨를 추욱 늘어트리곤 씻기 위해 목에 수건을 걸고 욕실로 향했다.
“그쵸? 다 먹으면 건강해질 거 같아요. 실비아 님, 빨리 씻고 식사하러 오세요. 얼른 먹고 새우잡이 배 선장을 만나러 가야 해요.”
“응…. 그래야지….”
실비아는 힘없이 욕실로 들어가서 제마의식을 1분간 하고 샤워기를 틀었다. 밤마다 울어 대는 귀신을 실비아가 꺼림칙해하는 걸 눈치챈 세비스가 시장에 간 김에 팥 주머니와 싸구려 십자가를 구해 욕실 선반 위에 올려놨다.
그녀는 십자가를 들고 여기저기 흔들고 팥을 흩뿌렸다. 샤워를 한 뒤 온통 쑥 부림이 난 아침 식사를 힘겹게 마치고 세비스, 림보와 함께 집을 나섰다. 림보는 새우잡이 배에 데려갈 생각은 아니고, 잠시 반려 짐승 호텔에 맡기기 위해서였다. 림보의 고삐를 쥐고 집을 나서는데 세비스가 어두운 낯빛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실비아 님, 반려 짐승 호텔에 림보를 맡기신다니요. 반려 짐승 여관도 찾아보면 있을 텐데요. 아니면 여인숙은 어때요? 그게 좀 별로면 반려 짐승 고시원도 총무 일만 하면 할인해 준다고….”
“세비스, 림보는 우리 식구야. 여인숙에 맡기진 말자. 휴…. 나도 돈을 아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이번에 새우잡이 배에 가면 돈을 많이 벌게 될 테니 인간적으로 림보는 좋은 곳에 머물게 하자, 외제마잖아…. 미안해.”
그녀가 풀이 죽은 얼굴로 ‘미안해.’라고 말하자 세비스가 움찔했다. 그는 잠시 입술을 깨물며 머릴 헝클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미안해요, 실비아 님.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니야. 지금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때인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난…. 그냥, 우리는 아껴도 말 못하는 짐승인 림보는 고생시키기 싫어서….”
실비아는 말끝을 흐리곤 입을 꾹 다물었다
먹구름이 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세비스가 괜히 뒷목을 문지르며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세비스의 논조는 이랬다. 어차피 몇 박 며칠은 금방 지나가는 거니 여인숙이든 호텔이든 똑같다고, 거기에 주인이 한창 고생 중이니 림보도 이제는 세상의 쓴맛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말 못 하는 짐승을 여인숙에 맡긴단 말인가.
실비아와 세비스가 어색하게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데 림보가 실비아가 잡고 있던 고삐를 말머리로 쳐냈다. 그리고는 입으로 방 손잡이를 열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세비스, 림보가 왜 저러지?”
“여인숙에 갈까 봐 겁먹었나 봐요. 림보! 아니야! 호텔로 데려갈게!”
세비스와 실비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방에 들어가 보니 림보가 에비X 생수 상자를 궁둥이로 밀고 있었다. 그는 낑낑대며 생수 상자를 둘의 앞에 가져다 놓고는 말발굽으로 상자를 툭툭 쳤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하던 실비아가 얼핏 든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혹시… 이걸 가져다 팔라는 건가?”
“히이잉!”
림보가 그녀의 말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실비아는 깜짝 놀랐다가 곧 그렁그렁한 눈으로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어제는 자린고비 세비스가 화낼 줄 알았더니 따뜻하게 위로해 줘서 감격했는데, 오늘은 제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림보 때문에 한 번 더 가슴이 벅차올랐다.
게임 생 30일 헛산 건 아니었구나 생각하니 저절로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어제는 울고 오늘은 웃고, 이러다가 엉덩이에 뿔이 나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다.
“아… 림보.”
“히이잉!”
림보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그녀에게 다가와 울지 말라는 듯 말발굽으로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는 신전에서 해외직구로 구해 준 장난감들과 말 방석까지 입으로 끌어서 가져왔다. 말도 못하는 짐승이 어떻게 이런 예쁜 짓을 하는지. 실비아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방긋 웃었다.
“고마워, 림보. 이제 걱정 안 하고 갔다 올 수 있겠다!”
“히잉!”
“림보 네가 희생한 물건들은 전당포에 맡겨 놨다가 꼭 다시 가져올게. 그러니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호텔에서 조식이랑 룸서비스 팍팍 시켜 먹어! 부자가 돼서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실비아가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림보는 걱정 말라는 듯 말발굽으로 바닥을 탕! 쳤다. 세비스도 감동했는지 말없이 림보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상남자들만의 사인인지 뭔지 그런 종류 같았다.
실비아와 세비스는 수레에 말 용품들을 싣고 림보의 몸에 걸었다. 그리고는 터보 주행으로 재래시장 입구에 위치한 전당포에 가서 물건들을 맡기고 돈을 받았다.
자그마치 10만 골드. 게임에 빙의한 뒤로 처음 만져 보는 두둑한 돈주머니였다. 만약 신전에서 유지비를 감당해 주지 않았다면 농담이 아니라 진짜 홀스푸어가 돼서 길거리에 나앉았을 거란 생각에 그녀의 등 뒤가 잠시 서늘해졌다.
‘몇 개만 가져다 팔아도 10만 골드인데, 그럼 대체 나머지 용품들은 얼마란 거지? 다 가져다 팔면 엄청 나겠… 아니지! 이런 못된 생각을 하면 안 돼. 림보 것은 림보 것이고 내 것은 내 것이야.’
실비아는 잠시 나쁜 생각을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순 없었다.
전당포에서 나온 그들은 시장을 지나 번화가로 갔다. 생각도 못 한 엄청나게 큰돈을 얻은 덕에 림보를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7성급 반려 짐승 호텔에 걱정 없이 맡길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은 부지런히 걸었다. 삼면이 바닷가로 둘러싸인 마을인지라 자주 방문했던 바다의 반대편으로 경보하듯이 한참을 걷자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우잡이 배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세비스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더니 실비아를 불렀다.
“실비아 님! 새우잡이 배를 찾았어요.”
“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