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오! 이 상품에 관심이 있으시군요. 마침 고객님에게 꼭 필요한 아이템이라 생각해서 얼마 전에 들여놨습죠. 가격은… 크흠, 1만 골드입니다. 아이템의 가치를 생각하면 싼 편이죠.”
1만 골드라니, 비상금을 털리다 못해 가진 돈까지 꺼내 써야 살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하아, 정말 필요한 아이템이긴 한데… 여기다 돈 쓰면 집은 언제 사. 세비스가 멀쩡한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렇다고 해서 선택을 잘못해서 몇십 년 동안 베드엔딩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도 정말 끔찍할 거 같은데.’
실비아가 갈팡질팡하며 아이템을 바구니에 담길 주저하자 시크릿이 얼른 덧붙여 말했다.
“지금 사지 않으신다면, 나중에 다시 오실 땐 가격이 더 오를 겁니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필수 아이템의 가격은 오르는 법이니까요.”
“저런….”
맞는 말이었다. 처맞는 말…. 온라인 게임이든 오프라인 게임이든 레벨 업을 할수록 더 고급 물건이 나왔으면 나왔지, 같은 물건의 가격이 오르는 일은 없건만 저리 태연하게 맞는 말인 척 처맞는 말을 하다니. 시크릿은 게임 아이템을 살 수 있는 곳은 비밀상점이 유일하단 걸 알고 갑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게 바로 독점 시장의 폐해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렇지만 비밀상점이 아니면 살 수 없는 물건이 맞았기에 실비아는 그에게 쌍욕을 하며 멱살을 쥐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이 아이템으로 한몫 단단히 잡으려는 하는구나. 정말 때리고 싶다…. 그렇지만 특수 NPC를 함부로 팼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실비아는 어금니를 꽉 사리물며 돈독 오른 시크릿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돈만 많으면 이런 나쁜 생각도 안 할 텐데, 그놈의 돈이 또 문제였다.
재산은 확실히 게임을 하면 할수록 늘어났다. 그렇다면 여유로워져야 마땅한데 필요한 건 또 왜 이리 많아지는지, 절망적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시크릿을 한 대 쥐어박고 상점의 물건을 다 털어 가고 싶었다.
주먹을 잠시 쥐었던 실비아는 게임의 특수 NPC가 호락호락할 리가 없단 걸 상기하고 참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건 정말 범죄였기에 실행하는 순간 당장 지옥으로 끌려갈지도 몰라 못된 상상으로만 그쳤다.
“사… 살게요. 지금 사는 게 나을 거 같아요.”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엔딩 회귀권>을 바구니에 담았다. 혹시 모를 베드엔딩 진입을 대비해서 꼭 필요한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흐뭇해하는 시크릿의 얼굴이 정말 얄미웠다. 그녀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노력하며 나머지 아이템들을 찬찬히 살폈다.
다음 아이템은 <뭉게뭉게>. 상세 설명을 보니 그냥 연막탄이었다.
‘뭐 하러 귀여운 아이템 명을 붙여 놨담. 그냥 연막탄이라고 하면 되잖아.’
<뭉게뭉게>는 200골드로 가격이 저렴한 편이었다. 비상금은 이미 날아갔지만 뭐, 원래는 비상금이 있어서 물건을 샀던가? 소지금에서 지출하면 된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던전 공략을 대비해 <뭉게뭉게> 두 개를 바구니에 담았다.
<한여름 밤의 꿈>은 뭘까. 앙증맞고 귀여운 유리병 안에 찰랑거리는 금색 액체가 담겨 있었는데 마치 요정의 꿀을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생긴 것도 그렇고 이름 또한 사용하면 무척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아이템 명이었다. 상세 설명 보기를 선택하자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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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 이 달콤한 꿀을 마시면 환상을 보며 기절한 듯이 푹 자게 된다. 괴로울 때는 한여름 밤의 꿈을 꿔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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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번드르르하네. 그냥 환각제잖아.’
19금 게임이라 그런지 전연령에선 팔 수 없는 아슬아슬한 아이템도 있었다. 섬에 가면 힘들긴 하겠지만 인간 환각제인 루카를 실컷 먹으면 된다. 그러니 별로 쓸모없는 아이템이라 판단한 그녀는 고개를 젓고 아이템 선택을 마쳤다. 몸을 돌리자 시크릿이 가까이 다가와 간사하게 손을 비비며 물었다.
“더 안 사시구요?”
시크릿의 말에 그녀가 매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새로 나온 아이템은 이게 다인가요?”
“아이구,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달랑 네 개만 있을 리가 있나요. 원하시면 더 많은 아이템이 있는 매대를 안내해 드릴게요.”
시크릿이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며 발걸음을 옮기자 그녀는 새 아이템을 구경할 생각에 신나서 쫄랑쫄랑 따라갔다. 그러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우뚝 멈췄다.
‘아, 안 돼. 비상금도 다 털렸고 이미 소지금도 썼어. 분명히 따라가면 사고 싶은 아이템들이 또 잔뜩 있겠지.
지금은 1.5룸 좁아터진 오두막에서 세비스, 림보 거기다가 가끔 밤마다 우는 화장실 귀신과 억지로 동거하는 상황이야. 생각 없이 막 쓰다간 다시 거렁뱅이가 되고 말 거야. 물론 지금도 거렁뱅이지만…. 견물생심, 아예 안 보는 게 낫겠어. 괜히 좋은 아이템을 보고도 사지 못하면 눈물만 나니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 지독하게 가난한 집구석을 생각하자 더 이상 쇼핑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집사인 세비스가 조만간 무단 점거한 거지 같은 오두막을 탈출하겠다며 좋아했었는데 주인 된 자가 이렇게 물 쓰듯이 돈을 써서야 볼 면목이 없지 않을까.
실비아는 울적한 속을 애써 다독이고 휘장으로 가려진 다른 코너를 향해가는 시크릿을 불러 세웠다.
“저기, 시크릿 씨! 그냥 오늘은 이것만 살게요. 다음에 보여 주세요.”
“그래요? 좋은 게 많은데….”
“아뇨. 이걸로 됐어요.”
”네, 뭐…. 어쩔 수 없죠.”
시크릿은 그녀의 단호한 표정에 어깨를 으쓱이며 어쩔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불쌍한 개미의 남은 단물을 빨아먹지 못해 아까워하는 개미지옥처럼 보였다. 카운터로 걸어가는 시크릿의 뒤를 힘없이 따라가던 실비아는 번쩍 떠오른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세비스 생일선물을 사야 하는데! 시크릿이 보여 준 물건들에 정신이 팔려 까맣게 잊고 있었어. 축제에서 산 선물이 있긴 하지만, 뭔가 생일선물이라기엔 약한걸.’
돈을 더 이상 쓰지 않기로 생각했지만 아침에 봤던 ‘마이 다이어리’의 내용이 걸려서 더 좋은 걸 사 주고 싶었다. 비상금을 이미 다 써서 공금을 써야겠지만….
그녀는 앞서가는 시크릿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불러 세웠다.
“아…. 혹시 늑대수인이 좋아할 만한 아이템은 없나요?”
“늑대수인…. 아! 집사분 말씀 하시는 거군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카운터 옆 쪽문으로 들어간 시크릿은 잠시 후 몇 가지 물건을 상자에 담아 왔다.
“어때요? 구미가 당기죠?”
“아니… 이게….”
실비아는 당황스러움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그가 들고 나온 상자를 들여다보니 성인용 하네스, 밧줄과 입마개, 그 외 차마 입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망측스러운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휘황찬란한 보석들이 달리면 안 될 부위들에 달려 있었다.
가격만 비싸고 누가 볼까 무서운 그런 것들…. 그녀는 아이템들을 보자마자 기가 막힌 듯 ‘하! 참나!’하면서 붉어진 얼굴에 손부채질 했다. 이건… 세비스한테 좋은 게 아니라 나한테 좋은 거잖아.
‘누굴 변태로 아나!’
실비아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시크릿을 노려보고 외쳤다.
“외상도 되나요?!”
“휴…. 화가 나네.”
실비아는 어깨를 추욱 늘어트린 채 터덜터덜 걸었다. 외상도 되냐는 그녀의 말에 시크릿은 단호하게 ‘놉!’을 외쳤고, 다른 아이템 중엔 선물로 살 만한 게 없었다. 결국 담아 놓은 아이템만 계산하고 나왔다.
‘외상이 안 된다니. 장사한단 사람이 융통성이 저리 없어서야…. 으휴! 역시 괜히 봤어. 사지도 못할 걸 구경해서 기분만 나빠졌잖아.’
그녀는 낙심한 얼굴로 손에 든 쇼핑백을 들여다보았다. 돈독 제대로 오른 시크릿에겐 <자랑스러운 우리 마을 명물>의 효과인 10프로 할인도 통하지 않았다.
특수 아이템을 사느라 14400골드를 썼고 멀미약, 해충제 등 바깥보다 저렴한 섬용 물건들을 구입하느라 600골드, 500골드인 마나 포션 두 개와 300골드인 체력 포션을 세 개 사서 1900골드로 총 16900골드를 비밀상점에서 지출했다.
비상금 9500골드를 다 털린 건 물론이요, 7400골드의 공금을 썼다. 소지금을 확인해 보니 비상금 란은 사라져 있었고 축제 기간 동안 생활비도 꽤 썼는지 남은 돈은 38000골드였다.
‘아직은 그래도 꽤 있네. 그래, 어차피 크게 한탕하지 않는 이상 개미 눈곱만큼 모아선 평생 집 살 일은 없어. 필요한 걸 산 거니까 자책하지 말자.’
실비아가 애써 자신을 다독이고 있는데 눈앞에 보이는 골목길에서 수상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저번에 왔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 저기는 저번에 회색 망토들이 뚱땅거리던 곳이네. 뭐가 생겼나 가볼까.’
코너를 돌아 골목길로 들어서니 저번에 봤던 회색 망토를 입은 사람 중 한 명이 호롱불을 켜놓은 수레 옆에 기대 서 있었다. 조그만 수레에는 한눈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수상한 아이템들이 담겨 있었다. 실비아가 가까이 다가가서 기웃거리자 회색 망토가 몸을 바로 하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아아, 네. 안녕하세요.”
노점 주인은 회색 망토를 더 꾹 눌러쓰며 물건들을 하나하나 집었다 내려놨다.
“효과 좋은 거 많으니까 천천히 둘러보세요.”
“아, 여기도 저쪽 상점처럼 게임 아이템을 파나 봐요.”
“그럼요, 골라 보세요.”
노점은 예상대로 비밀상점처럼 게임 아이템을 팔고 있었다. 노점이라니, 비밀상점도 모자라서 플레이어의 지갑을 털려고 게임이 작정한 듯했다.
‘구경하는 것 정도야, 뭐. 구경만 하는 거야, 구경만.’
그녀는 아이쇼핑만 하기로 마음먹고 수레 안을 찬찬히 훑었다. 그러다가 묘한 걸 하나 발견했다. 그건 케이크 상자였는데, 베이커리 전문점의 것처럼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투명한 비닐에 싸여진 상자 안에는 먹음직스러운 딸기 케이크가 있었다.
“어? 왜 케이크가 여기 있죠? 이건 무슨 효과가 있나요?”
“아, 이건 나이를 먹는 케이크입니다.”
“예에?! 나이요? 비밀상점엔 이런 거 없었는데!”
나이를 먹는 케이크라니, 실비아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세비스 생일선물로 딱이었다. 이거면 성체가 될 수 있는 거 아닐까?
‘성체가 된다면 몸도 마음도 성인이니까 이제 거리낄 게 없지. 그럼 림보는 잠시 어디 보호소에 맡겨 놓고, 크흠…. 에효! 19금 게임의 플레이어는 몸이 한시도 쉴 틈이 없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