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
그리고는 좋아죽겠다는 듯 그녀를 안고 흔들었다.
“뭐, 뭐야?”
이미 게임 속 수많은 남자의 철벽에 익숙해진 실비아는 공략 캐릭터의 낯선 행동에 당황해서 버둥거렸다.
‘공략 캐릭터가 순수한 목적으로 날 안을 리가 없는데? 역시 찌부러트린다? 아니면 칵테일처럼 흔든다가 답인가!’
실비아가 몸부림을 치자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가 기다란 검지로 그녀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녀는 눈을 데구루루 굴리곤 빠르게 해석을 끝마쳤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네 뺨을 뚫어 버리겠다?”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격렬하게 젓더니 몸을 추욱 늘어트렸다. 계속되는 실비아의 오해에 속상해진 것이다.
“아냐?”
실비아가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로운 감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게 덩치는 루카, 노엘이랑 맞먹을 정도로 컸지만 비 맞은 강아지가 떠올랐다.
‘강아지라기보단 대형견…. 대형견 같네.’
대형 멍멍이 같은 푸른 머리의 남자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다시 너른 품 안에 조심스럽게 가뒀다. 그리곤 뺨을 그녀의 머리통에 대고 비볐다. 그건 마치 애교를 부리는 몸짓 같아서 실비아는 더욱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 찼다.
‘애교? 첫 만남부터 애교?’
애교인지 살인예고인지 아직 섣불리 판단할 순 없었다. 경계심을 풀었다가 또 죽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녀의 의심 어린 표정에 남자가 속상한 듯 한숨을 내쉬더니 조심스럽게 이마에 쪽- 입맞춤을 했다.
“앗!”
이마에 닿는 촉촉한 질감에 잠시 놀랐던 그녀는 이내 그것이 남자의 입술임을 알고 감격한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맙소사! 다짜고짜 뽀뽀부터 갈기다니? 그래, 아까부터 이상하다 싶었어. 드디어 19금 게임답게 불도저 직진캐릭터가 등장했구나! 이 파란 머리는 여타 게임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직진남이 틀림없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던가. 세비스는 침대에 같이 눕자고만 해도 싸늘하게 바라보고 노엘은 공략하다가 날벼락을 맞을 뻔했다. 심지어 루카를 공략할 땐 뽀뽀하다 죽고, 추잡스럽게 아래를 빨아 보려다가 얼싸 당해 죽고, 어제는 눈만 만졌는데도 죽었다. 그녀는 잠시 암담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곤 반짝이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동안의 고생은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어!’
벅찬 감정을 이기지 못한 실비아가 남자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자 그가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그녀의 귀에 조그맣게 뭐라고 속삭였다.
실비아는 여전히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네 마음 다 안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뭔 소린진 모르겠지만 감미로운 사랑의 밀어, 뭐 이런 거겠지?’
남자는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더니 바다를 가리키며 방긋 웃고 뭐라 말했다.
‘뭔 소리야?’
실비아가 못 알아듣겠다는 듯 눈을 찌푸리자 남자가 말없이 한 번 더 바다를 가리켰다.
“바다로….”
실비아가 손짓을 해석하자 고개를 끄덕인 그가 손가락으로 실비아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너와 나…?”
이젠 환하게 미소지은 남자가 실비아를 수줍게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 놀자?”
실비아의 말에 남자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바다에서 같이 놀자는 건가? 이걸 따라가, 말아? 공략 불가 캐릭터잖아. 그래도 스킨십만 안 하면 안 죽지 않을까?’
그때 망설이는 실비아의 눈앞에 선택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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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자의 손을 잡는다.
2. 캬악, 퉷! 힘껏 침을 뱉고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
3.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작별 인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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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은 절대 안 돼. 아예 공략 루트가 파괴될 것 같아, 근데 3번도 이상해. 작별 인사라니? 기껏 만났는데 헤어지라고? 1번은 손을 잡는다…. 아냐, 이 게임이 호락호락할 리 없지. 뭔가 싸해. 차라리 작별 인사를 하자. 어차피 공략 불가 캐릭터니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게임의 법칙상 루카처럼 또 만나게 되겠지.’
그녀는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이놈의 시스템이 사람을 만만하게 보고 말이야. 한 번 속지 두 번은 안 속는다! 그런 것치곤 꽤 많이 속았던 거 같긴 한데… 어쨌든! 난 예전의 멍청이가 아니라고! 이제 호락호락하지 않단 말이지.
실비아는 두뇌를 풀가동해 고심한 끝에 3번을 택했다. 그녀가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안녕, 잘 가.’라고 하자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낯빛이 어두워졌다. 인간 같지 않은 아름다운 남자가 시무룩해지자 기분 탓인지 하늘도 비가 올 것처럼 어둑해졌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실비아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을 했다.
“아니, 난 저 앞 바닷가에 있는 축제를 구경하러 가야 해서 그래. 다음에 여기서 또 만나자!!”
실비아가 미남을 앞에 두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 냈다. 그러자 남자가 그녀의 앞을 막아서더니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고 다른 손을 마치 로켓을 날리듯이 바닷가 쪽으로 길게 뻗었다.
“응?”
그리고 실비아가 놀랄 틈도 없이 남자가 몸집을 거대하게 부풀렸다. 순식간에 그는 신비한 푸른색 비늘로 뒤덮인 블루드래곤이 되었다.
“허억!”
‘뭐야, 드래곤이었어?’
그녀가 놀라자 드래곤이 귀로 추정되는 푸른색 지느러미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만화나 영화에서 보던 전설의 동물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실비아는 집채만 한 푸른 드래곤을 보면서 신음을 삼켰다. 비슷한 종류로 공룡이나 포켓X스터 망나X이 있지만, 서양 판타지 배경 게임이니 눈앞의 동물은 드래곤일 터였다.
‘사막여우에 내가 관심을 안 보이니 하다 하다 이제 드래곤을 등장시키네? 19금 게임의 섹슈얼 로맨스 장르 도전이 눈물겨워. 그래, 뭐 인간 남자로 변할 수 있으니 이 정도는 참아주겠어. 난 인외존재플은 취향이 아니니 드래곤인 상태로 공략해야 했다면 끔찍했을 테지만, 인간이 되는 거면 환영!’
잠시 거대한 몸집에 무서워하던 그녀는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리고 방긋 웃었다. 블루드래곤이 올라타라는 듯 고개를 숙이곤 순박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그 모습이 은근히 귀여웠다.
“데려다주겠단 거구나?”
그녀의 말에 드래곤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화 속에서만 보던 신비한 생물이 데려다준다니! 거기다가 드래곤이면 날아다닐 것이 아닌가.
게임 속에 빙의 된 후로 한 번도 날아본 적 없었던 그녀는 설레는 마음에 ‘고마워!’라고 답하고 드래곤의 등에 올라타려고 낑낑댔다. 조그만 동산을 등반하듯 비늘을 움켜쥐고 기어오르자 드래곤이 간지럽다는 듯 몸을 흔들며 킥킥댔다. 림보도 함께 태우려고 불러봤지만 아무래도 압도적으로 큰 덩치에 졸아 버린 건지 쉬이 따라오려고 하지 않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림보! 그러면 나 먼저 바닷가에 가 있을게. 너도 얼른 와!”
실비아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블루드래곤이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땅을 박차고 올랐다. 아래를 보니 림보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림보의 모습은 곧 점처럼 조그마해지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림보가 똑똑한 말이긴 하지만 드래곤 같은 전설의 동물 앞에선 본능적으로 공포심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
커다란 블루드래곤이 하늘로 날아오르자 림보가 터보 주행을 할 때보다 훨씬 강한 바람이 그녀의 뺨을 세차게 때리고 지나갔다.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니 축제 장소로 향하는 오솔길이 한눈에 보였다.
드래곤의 등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푸른 지느러미가 돋아 있었는데, 그 벼슬인지 비늘인지를 꽉 잡고 밑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어쩐지 현생에서 휴가를 갈 때의 설렘과 블루드래곤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지금의 기분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스물한 살…. 친구들과 동남아로 자유여행을 떠났었지. 첫 여행이라서 그런지 공항검색대를 지나갈 때조차 행복했었어. 그리고 비행기를 탔고, 이륙할 땐 어찌나 설렜는지…. 지금이랑 딱 똑같았어. 점처럼 보이는 지상의 풍경들, 바로 아래에는 연기 같은 구름, 먹먹한 귀…. 먹먹한 귀?’
정신 차리고 보니 그녀의 밑에는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 훅 떨어진 온도 때문에 입에선 연신 입김이 나오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거기다가 공기가 희박한 건지 숨도 잘 안 쉬어졌다.
“내려가! 내려가라고!”
인식한 후에는 이미 늦었다. 급하게 드래곤을 손으로 두드리고 꼬집으며 내려가라고 외쳤지만, 입이 얼었는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소용이 없었다. 거기다 블루드래곤은 그녀가 강하게 내려치는데도 단단한 비늘 때문에 전혀 느끼지 못하는 건지 반응이 없었다. 그녀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작은 몸이 블루드래곤의 등짝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정신을 잃은 그녀의 시야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내 온통 시커메졌다.
잠시 후, 암울한 새드엔딩 곡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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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자랑스러운 우리 마을 명물>인 당신은 게임 시작 <31일> 만에 <블루드래곤이 데려다준단 말에 덥석 올라탔다가 하늘 위에서 사망> 엔딩을 맞았습니다.
저런…. 분명히 공략 불가 캐릭터였는데, 어째서 경계하지 않았나요? 정신 차리고 보니 성층권으로 올라가 구름 위를 날고 말았습니다…. 인간을 처음 만난 순진한 블루드래곤 <??>은 당신이 죽은 줄 모르고 그 후로도 산책하듯이 20분을 더 날았답니다…. 대화만 통했어도 이런 비극적인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요!
결국 당신은 노엘만 먹고 나머지 네 명의 동정 미남은 먹지도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실비아! 그래도 한 명은 먹었으니 퍽 나쁜 삶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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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까지 확인한 실비아는 완전히 기절해 버렸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녀는 곧 마지막 세이브지점인 집 앞에서 림보의 위에 탑승한 채 번쩍 눈을 떴다.
‘휴…. 경계를 늦추지 말았어야 했는데. 설마 성층권에 진입해서 사망할 줄이야.’
그녀는 이를 갈면서 림보를 자율주행 시켰다.
림보가 떨면서 드래곤 위에 올라타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아마도 림보는 짐승의 감으로 그녀가 데드 플래그에 올라섰단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한참을 달렸을까, 다시 드래곤을 낚았던 낚시터까지 온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그대로 지나쳤다. 섹시한 구릿빛 피부와 핥아보고 싶은 눈 밑의 점 두 개, 신비로운 감색 눈이 아른거렸지만 눈 호강 좀 하자고 또 개죽음을 당할 순 없었다.
‘1번 선택지를 골라도 산다는 보장이 없어. 대화도 안 통하겠다, 그냥 다음에 낚자. 지금 나로선 상대하기 벅찬 남자야.’
눈물을 머금고 공략 캐릭터를 낚는 걸 뒤로 미룬 실비아는 한참 말을 몰아 바닷가에 도착했다.
오늘은 축제 마지막 날. 팸플릿에 나온 대로 축하 공연이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이라서 그런지 관광객들이 어느 때보다 바글바글했다.
림보 위에서 내려온 그녀는 노점들을 구경하며 세비스에게 생일선물로 줄 만한 걸 찾아봤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건 보이지 않았다.
‘역시 저녁에 비밀상점을 가봐야 하나. 그치만 혹시 거기서도 허탕 칠지 모르니 뭐라도 하나 사 두자.’
그녀는 반려 짐승 동반 카페에 급히 들러 세비스가 늑대로 변신했을 때 가지고 놀 만한 장난감을 몇 개 구입했다. <자랑스러운 우리 마을 명물>의 버프 덕에 10프로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덕에 남은 예산으로 조각 케이크도 몇 조각 구매하고 나서 밖으로 나오자 알림 방송이 바닷가에서 울려 퍼졌다.
“1시간 후에 바닷가 끝에서 축제 축하 공연이 있겠습니다. 모두 마지막까지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