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식사 후 설거지를 한 실비아는 외출준비를 했다. 그런데 세비스를 보니 옷도 갈아입지 않고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머리를 묶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를 불렀다.
“세비스! 너 오늘 같이 안 나갈 거야?”
“아, 이틀간 실컷 구경했더니 오늘은 별생각이 없네요. 저는 간만에 시장 가서 장도 봐 오고 집 청소도 하고 있을 테니 재밌게 놀다 와요.”
세비스는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소파에 더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래?”
‘이상하다, 원래 어딜 가든 쫓아오질 못해서 안달이던 애가 웬일로 집에서 쉰다고 하지?’
혹시 새우잡이 배 따라오지 말라고 해서 삐졌나? 실비아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세비스가 화장실을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화장실 문을 닫는 걸 보고 나서 소파를 내려다보니 책 한 권이 있었다.
인위적으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책의 표지에는 대문짝만하게 ‘마이 시크릿 다이어리’라고 적혀 있었다. 뭔가 펼쳐보고 싶은 생김새였다.
‘잠시 보는 것 정도야, 뭐.’
화장실 쪽을 주시하며 슬쩍 다이어리를 집어 든 실비아는 방금 쓴 거 같은, 잉크도 마르지 않은 오늘의 일기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는 게 힘들어서 까먹고 있었는데 방금 달력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일이 내 생일이라니. 가족들이 항상 생일을 챙겨 줬었는데 이번엔 혼자다. 당연히 실비아 님은 모르고 계실 테니 내 생일을 그냥 넘어가겠지? 나 자신에게 선물을 줘야겠다. 생활비를 횡령해서라도….]
뒤의 내용은 신경 쓰지 않고 다이어리를 덮은 실비아는 안타까움에 혀를 쯧쯧 찼다.
‘가족들 없이 혼자서 맞는 생일이라니, 그럼 티를 냈어야지, 내가 이걸 못 봤으면 어쩔 뻔했어. 지금 의지할 곳이라곤 나뿐일 텐데…. 나라도 선물을 준비해야겠어.’
아무렇지 않게 다이어릴 소파에 다시 올려 둔 실비아는 신발을 신고 외출 준비를 마쳤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세비스에게 태연하게 ‘집 잘 보고 있어.’라고 인사하자 그가 힘없이 미소지었다.
‘안타까워라. 그래도 서프라이즈를 위해선 티 안 내고 나가야겠지.’
모른 척 밖으로 나온 그녀는 림보 위에 올라탔다. ‘바닷가!’라고 외치자 림보가 자율주행을 시작했다.
그녀는 이동하는 내내 세비스에게 무슨 선물을 줄지 고민했다.
‘선물…. 선물이라. 뭘 준비할까. 축제 때 살만한 게 있나 보고… 카페에 디저트도 팔고 있었던 거 같으니 집 가는 길에 케이크도 하나 사면 되겠네.’
그때 고민하는 실비아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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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스의 생일이벤트!
- 어떤 선물을 주냐에 따라 그는 한방에 성체가 될지도 몰라! 신중하게 골라야 할지도? 두근두근!
성공 보상 : 세비스가 성체가 된다.
실패 시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이 한없이 경건해지는 효과가 하루 동안 지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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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맞다! 옛날에 플레이했던 어떤 게임은 생일마다 캐릭터가 자랐었지…! 생일선물을 뭘 주느냐에 따라 이벤트도 발생했고 말이야! 신중하게 골라야겠는걸.’
퀘스트가 떴으니 신중하게 선물을 골라야 했다. 축제 때 돌아다녀 보고 괜찮은 게 없으면 어차피 가려 했던 비밀상점에도 한번 가봐야겠다고 결심한 그녀는 림보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승마를 즐겼다.
한참을 가다 보니 얼마 전에 광어와 우럭을 낚았던 바닷가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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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 신비한 노랫소리가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실비아를 부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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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보, 잠깐만 멈춰 봐.”
끼익-
림보 위에서 내린 그녀는 잔잔하게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를 가만히 바라봤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 사이로 소라고둥에 귀를 댄 것 같은 신비한 소리가 들려왔다.
‘메시지가 뜬 걸 보니, 혹시 낚시를 하면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을까?’
인벤토리에서 <최고급 낚싯대>를 꺼낸 그녀는 잠시 미끼로 쓸 만한 게 없나 인벤토리와 미니 백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얼마 전에 먹다가 넣어 놓은 말라비틀어진 젤리 하나를 발견하고 얼른 낚싯바늘에 끼웠다.
힘껏 낚싯대를 던지고 집중하기를 한참, 광어와 우럭 때랑은 비교할 수도 없는 묵직한 존재가 낚싯줄을 팽팽하게 당기는 게 느껴졌다. 실비아가 곧바로 손에 힘을 주었으나 어찌나 힘이 센 놈인지 하마터면 그녀가 끌려갈 뻔했다.
“으읏!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히이잉!”
실비아가 낑낑대며 낚싯대를 당기자 옆에 서 있던 림보가 땅을 발굽으로 두드리며 격려했다. 너무 세게 당기면 낚싯대가 부러질 수 있으니 밀었다 당겼다 하기를 10분여. 치열한 사투 끝에 실비아는 온통 퍼런 괴상한 물체를 낚을 수 있었다. 퍼렇고 사람만 한 덩치의 그것은 어떻게 봐도 먹을 수 있는 물고기는 아니었다.
“뭐야 이게?!”
“푸르릉?!”
실비아와 림보는 순간적으로 놀라서 서로를 껴안고 뒤로 물러났다.
잠시 오돌오돌 떨던 그들은 가까스로 진정하고 괴상한 물체의 정체를 확인하러 가까이 다가갔다. 웬 괴상한 미역 괴물? …아니,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에 미역이 몇 가닥 얽혀 있는 사람이었다.
푸른빛의 긴 머리를 가진 사람이, 머리색과 비슷한 나풀나풀한 푸른 옷을 입은 채 낚싯바늘에 걸려 있었다.
“설마 시체… 는 아니겠지?”
“히잉!!”
실비아의 말에 림보가 앞발로 그런 소리 하지도 말라는 듯 그녀를 톡- 치는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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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합니다! 굉장한 존재인 <??>를 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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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한 존재라고?’
실비아는 조심스럽게 퍼런 덩어리에게 다가갔다. 손으로 어깨를 잡아 뒤집어보니 그 존재의 얼굴이 드러났다. 잘생긴 남자였다.
‘와! 엄청 잘생겼잖아!’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다행히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니 죽은 건 아닌 듯했다.
하늘과 바다를 오묘하게 섞은 것 같은 빛을 내는 기다랗고 푸른 곱슬머리가 그의 얼굴에 이리저리 달라붙어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속눈썹은 또 무척 길어서 그 밑에서 햇빛을 피해도 될 정도였다. 그리고 눈 밑엔 점 두 개가 있었는데, 아름다운 얼굴에 찍혀 있으니 핥아 보고 싶을 만큼 섹시했다.
그것뿐인가. 오뚝한 코는 손을 대면 베일 것 같고, 바닷속에 있었으면 푸르뎅뎅해야 마땅하건만 입술은 또 어찌나 탐스럽게 붉은지.
얼굴 감상을 마친 실비아는 남자의 몸 감상을 시작했다. 적당히 탄 듯 건강해 보이는 구릿빛 피부가 탄탄한 몸을 감싸고 있었는데, 잘 구운 빵 같이 먹음직… 아니,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근육 결 사이로 한 방울씩 바닷물이 또르르 흘러내리는데….
피부를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을 보는 순간 남자가 눈을 떴다. 남자의 눈동자는 맑은 바다색 머리랑은 달리 깊은 심해를 닮은 감색이었다. 어쩐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상체를 일으키더니 눈을 깜빡이며 실비아를 쳐다봤다.
‘어쩐지 얼굴이 살짝 발그레한 것 같은데…. 설마?’
실비아는 용기를 얻어 그의 몸을 살짝 다독였다. 먼지를 털어 주는 척 가슴도 살짝 토닥이고 단단한 어깨도 격려하는 척 툭툭 치고….
‘음, 이 정도면 튼튼해.’
그녀가 흐뭇하게 미소짓고 있는데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묻는 것 같은 몸짓이라 실비아는 급하게 변명을 내뱉었다.
“아! 이건 이상한 짓이 아니라…. 그, 근육들이 잘 살아 있나, 무사히 움직이나 인명구조 할 때 확인하는 방법….”
실비아가 구구절절하게 변명을 내뱉는데 남자가 싱긋 웃더니 뭐라 떠들었다.
“@#$%!”
“…예?”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실비아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남자가 제 가슴을 주먹으로 콩콩 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
“뭐, 뭐요?”
‘…뭐라는 거야?’
그때 눈앞에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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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이 낮아서 <??>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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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을 올리면 이 남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는 걸까. 이목구비가 예사롭지 않은 걸 보니 분명히 새로운 공략 캐릭터 같은데, 말이 안 통하니 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혹시나 해서 <동정 레이더>를 켜 보니 루카 때랑 똑같이 ‘공략이 불가능한 캐릭터입니다.’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메시지를 본 실비아는 환호성을 지를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았다. 예상대로 이 남자도 공략 캐릭터라는 소리였다.
‘지력! 지력을 올리면 공략할 수 있구나. 드디어 지혜로운 전사가 될 차롄가.’
그녀가 잠시 <동정 레이더>를 본다고 한눈을 파는 사이에도 남자는 뭐라 뭐라 계속 떠들었다. 메시지 창을 끈 실비아는 고개를 저으며 못 알아듣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실비아가 계속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자 남자가 한숨을 내쉬더니 보디랭귀지를 시도했다. 그는 우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실비아는 멍하니 있다가 그가 하는 몸짓을 해석했다.
“나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남자는 실비아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실비아를 가리켰다.
“너를….”
또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이번엔 손깍지를 끼며 미소지었다.
“찌부러뜨리고 싶어? 히익!”
실비아가 화들짝 놀라 물러서자 남자가 황급히 고개를 젓더니 제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손을 깍지 낀 채로 실비아를 바라보며 몸을 살짝 흔들었다.
“칵테일 흔들 듯이 흔들어 버리겠다?”
한숨을 쉰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답답하다는 듯 이마를 잠시 짚고는 돌연 팔을 교차해 제 양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흔들었다.
“…양쪽 어깨가 뒤틀릴 정도로….”
“#@$%&!”
남자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머리를 쥐어뜯더니 못 알아들을 소릴 내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실비아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우리 대화로 해결합시다. 짐승과 달리 인간에겐 지성이란 게 있잖아요? 그쪽이 인간인지 모르겠긴 한데…. 우선 화를 푸시고, 천천히 손과 발을 써 가며….”
그녀가 뒷걸음질 치는 만큼 남자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일촉즉발의 상황. 림보는 뭘 하는가 싶어서 옆을 힐끗 보니 그는 잔뜩 웅크린 몸을 떨고 있었다. 심지어 머리를 타조처럼 수풀 속에 숨긴 상태였다. 짐승의 감으로 이 남자가 살인마란 걸 알아챈 걸까?
‘아니지! 뭔 살인마. 아무리 루카라는 쓰레기 캐릭터가 있다지만 살인마가 공략 캐릭터일 리 없잖아. 전두엽아, 망상은 그만둬.’
실비아는 차분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상황을 파악했다. 다가오고 있는 남자의 속은 알 수 없었지만 몬스터도 아니고 공략 캐릭터가 자신을 공격할 리가 없단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바위에 퇴로가 막힌 실비아는 망상을 멈추고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물에 푹 몸을 담그고 있다가 나온 게 분명한데 남자의 맑은 바다 빛 머리카락은 언제 마른 건지 꿀타래처럼 부드럽게 어깨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의 몸도 베이비파우더라도 두드린 듯 보송보송했다.
실비아는 의아한 눈길로 말끔해진 그의 몸을 잠시 힐끗 쳐다봤다가 다시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보고 있으면 정신이 아찔해지는 심해 같은 감색 눈동자를 바라보는데, 그가 대뜸 실비아를 와락 껴안았다.
“으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