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여름이라지만 밤에는 바닷바람이 추워. 이거 걸치면 좀 나을 거야.”
“고마워요.”
와이셔츠를 벗은 루카는 얇은 면티 한 장만을 입고 있었는데, 티셔츠 밖으로 탄탄한 근육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거 같은 뇌쇄적인 모습이었다. 천 조각 아래의 몸을 이미 알고 있는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거친 숨을 내쉬었다.
‘죽여주네.’
조용히 손으로 침을 닦은 그녀는 곁눈질로 그의 가슴근육을 힐끗대며 함께 산책했다. 그러고 보니 날씨가 꽤 쌀쌀했다. 실비아는 닭살이 돋아나는 팔뚝을 매만지며 루카를 힐끗댔다. 저녁 바닷바람은 그에게도 추울 텐데 옷을 벗어 주다니, 의외의 모습이었다.
쓰레기면서도 이런 면에선 인간성이 남아 있다니. 루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실비아의 조그만 어깨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 안았다.
노을이 지는 바닷가를 둘이서 걷고 있으니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맞닿은 몸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이 세계가 현실 세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짜와 다를 것 없는 세계에서 여러 남자를 한 번에 후려도 되는 걸까? 순간 죄책감이 들었던 실비아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각오를 다졌다.
‘천국에 가려면. 그리고 이 세계를 구하려면. 공략 캐릭터 다섯 명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것도 여러 번… 따먹어야 해. 양심이 찔리지만… 어쩔 수 없는 플레이어의 숙명이지.’
그녀는 순두부가 되려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일전에 봤던 나태지옥을 다시 떠올렸다. 눈을 감고 나태지옥의 입구로 날아가니 망자가 달그락거리는 뼈 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손을… 아니, 손뼈를 흔들었다. 그 망자는 손가락으로 제 옆을 가리키며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리 와, 신입을 기다리고 있었다구! 여긴 너무 빡세. 혼자서 일할 순 없단 말야!’
‘훠이! 저리 가! 어림없는 소리! 꿈도 꾸지 마!’
실비아가 질색을 했지만 망자는 환영 인사를 하듯 그녀에게 포옹했다. 조금 잔인하지만 그녀는 원 펀치로 망자의 강냉이를 한방에 털어 버리고 무사히 달아났다. 그리곤 다시 눈을 떴다.
‘헉! 역시 안 될 말이야. 암, 절대 안 돼. 열심히… 아주 열심히 따먹겠어.’
그녀는 실감 나는 상상을 하며 간신히 해이해지려는 마음을 재정비했다.
그녀가 눈을 감고 부르르 떨다가 혼자서 주먹을 꽉 쥐는 등 이상한 증상을 보이자 루카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가까스로 진정한 실비아는 나태지옥을 떠올리고 나니 온몸이 서늘해져서 루카의 품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어깨를 감싸 안은 루카는 별말이 없었는데, 힐끗 고개를 올려 쳐다보니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까 도박장에선 뻔뻔하게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고 껴안기도 하더니 지금은 왜 저러나 했더니, 업무시간이 끝나고 밤이 되니 뺀질뺀질한 제비 근성이 사라지고 부끄러움이 그를 찾아온 듯했다.
왜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일터에선 적극적이고 빠릿빠릿하다가도 밖에만 나오면 얌전해지는. 루카도 그런 부류 같았다.
‘조금 귀엽네. <종신형 계약>을 내민 건 진짜 비호감이지만…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겠어.’
“아이, 추워….”
“헉….”
실비아가 추운 척하며 루카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대자 그가 헉- 하고 숨을 들이쉬더니 뻣뻣하게 굳었다. 가만히 있던 그가 돌연 거친 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어설프게 끌어안았다. 엉성한 자세에 실비아가 아닌 척 몸을 더 밀착시키자 맞닿은 몸 사이로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빈틈없이 껴안고 있는 둘의 위로 커다란 폭죽이 화려하게 하늘을 수놓았다. 멀리서 아름다운 폭죽 쇼를 보고 놀란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실비아가 따뜻하고 너른 가슴에 폭 싸여 눈을 감고 있는데 루카가 갑자기 결심한 듯 그녀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 쥐곤 고개를 내렸다.
‘엇?’
“아….”
실비아는 무의식중에 데드엔딩 트라우마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돌리자마자 아차! 하고 아쉬워했지만 말이다. 실비아는 제 몸의 반응에 기막혀했다. 주인의 의지를 배반한 몸은 심지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이런 썅…. 안 죽을 수도 있었는데. 망할 놈의 반사신경이….’
루카는 그녀가 떨면서 고개를 돌리자 단단히 착각해 버렸다. 설마 이렇게 몸을 떨며 두려워할 줄이야. 키스할 사이는 아닌데 저도 모르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다가가다니, 섣부른 행동이었다.
‘아…. 나도 모르게 분위기를 타 버렸어. 아무래도 진도가 너무 빨랐나 보다. 떨기까지 하다니.’
루카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미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미안.”
“아, 아니에요.”
그는 떨고 있는 실비아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어깨 위에 걸치고 있던 와이셔츠를 더 단단히 여며 주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손을 잡고 다시 해변가를 걷기 시작했다.
“미안해, 내가 이런 건 잘 몰라서….”
“아니에요….”
‘시발, 아까워 죽겠네, 진짜.’
실비아는 속으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말없이 걷다 보니 어느덧 둘은 해수욕장의 입구에 다다랐다. 저번의 반려 짐승 동반 카페에서 세비스와 림보를 만나기로 했기에 아쉽지만 루카랑은 여기서 헤어져야 했다.
“이제 여기서 헤어져야 할 거 같아요. 식구들이랑 만나서 같이 집에 가기로 했거든요.”
“응. 있잖아…. 혹시 내가 싫어지거나 한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전혀 아니에요. 배를 구하게 되면 연락할게요.”
싫어지다니, 그럴 리가 없지. 실비아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하자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루카는 영업용 미소, 일이 잘 풀려서 짓는 만족스러운 미소, 심지어 비열하게 입꼬리만 올려 짓는 미소조차 아름답지만, 드물게 나오는 저 부드러운 미소는 희소성이 높아서 그녀를 더 황홀하게 했다.
‘어우, 저렇게 부드럽게 웃을 줄도 아네.’
“그래, 너무 무리하진 마. 웃돈을 줘도 배를 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니까. 그래도 한 명쯤은 돈이 급한 사람이 있겠지. 적절한 배를 찾게 되면 실비아 너에게 먼저 연락할게. 내일부터는 아까 말한 대로 선주들이랑 딜을 해야 해서 축제 기간에는 더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그런가요?”
“응. 그리고 사실 섬에 같이 가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라서… 선뜻 함께 가잔 말을 못 하겠어.”
루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실비아는 의외의 멘트에 살짝 놀라 버렸다. 자신을 사지에 몇 번이고 내몬 남자가 위험할까 봐 함께 가잔 소릴 못하겠다니. 그런 것치곤 이미 실컷 같이 가자고 하고 무슨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면서 배도 구해 보라고 하지 않았나? …그녀는 디테일한 건 따지지 않기로 했다.
“걱정 마세요. 배도 구할 수 있을 거고, 저를 데려가시면 골치 아픈 일도 해결될 거니까.”
“정말? 말만으로도 고마워.”
루카는 고마워하면서도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여러모로 능력 있는 사람인 건 알지만 설마 인맥이 넓고 자본이 많은 본인도 못 구하고 있는 배를 선뜻 구해 올 수 있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불가능한 일을 해결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눈앞의 여자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럼, 안녕!’하고 몸을 돌렸던 그녀는 충동적으로 다시 뛰어와 까치발을 들고는 루카의 뺨에 쪽- 하고 입맞춤을 했다. 자신이 그의 뺨에다 입맞춤을 하면 독에 중독될 일이 없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아…!”
루카가 깜짝 놀라서 제 뺨을 감싸 쥔 채 멍하니 있자 그녀가 손을 흔들며 뒷걸음질로 멀어졌다.
“진짜 안녕! 곧 봐요.”
그리곤 뒤돌아서 대답할 새도 없이 다람쥐처럼 빠르게 뛰어 가버렸다.
루카는 멍청하게 서 있다가 곧 얼굴을 붉히며 조용하게 웃었다.
“아, 진짜 특이한 애네.”
키스하려고 할 때는 무서워하는 거 같길래 기분이 안 좋아졌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뺨에다가 뽀뽀를 날리고 도망쳐 버리다니. 정말 한 치 앞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실비아는 보면 볼수록 괜찮은 여자였다. 옥장판 행사장에서 봤을 땐 탁월한 화술과 아름다운 외모, 이유를 알 수 없는 성적긴장감에 호감을 가졌었다. 그때부터 가졌던 좋은 감정은 날이 갈수록 커지더니 오늘 일로 더 진지해졌다.
도박장에서 보여 준 신들린 손기술과 배를 구해 올 테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치는 배포. 거기다가 키스를 거부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뽀뽀를 하는 의외성까지.
그는 한 마리 인외 존재 같았던 실비아의 화려한 손기술을 떠올리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배를 빨리 구해야겠어. 그 섬에는 내 측근들이나 우리 집안사람이 아니면 원래 들어갈 수 없지만… 실비아는 곧 내 가족이 될 수도 있으니까 괜찮겠지.’
루카는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곤 다시 뒤돌아 부하들이 있는 노점 거리로 돌아갔다. 마주친 부하들이 생전 처음 보는 그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고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경악해 눈을 크게 뜨자 다시 정색을 했지만 말이다.
* * *
다음 날 아침, 식탁에 앉은 실비아가 하루 알바로 6500골드를 벌어왔다는 말에 림보와 세비스가 손과 앞발을 짝짝 치면서 좋아했다.
“와! 진짜 최고네요. 이러다가 조만간 이 망할 놈의 오두막집은 버리고 벽돌집으로 이사 갈 수도 있겠는걸요?”
“그렇지? 던전에서도 점점 많은 돈을 얻고 있고, 알바로도 이렇게 돈을 계속 벌게 된다면 조만간 월세가 아니라 아예 벽돌집을 사게 될지도 모르지!”
그녀의 말에 세비스가 양손을 모으곤 감동한 얼굴을 했다.
“상상만 해도 좋아요! 이 오두막집은 사실 누가 버려둔 폐가를 무단점거해서 쓰고 있는 거였거든요. 이대로면 진짜 집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기뻐요, 실비아 님.”
“아, 어쩐지 가끔 밤마다 화장실에서 알 수 없는 울음소리가 난다 싶더니….”
실비아의 낯빛이 시퍼레지자 세비스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예, 뭐 공짜로 사는데 귀신이랑 동거하는 건 감수해야죠. 이제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 봐요. 우리.”
“…그러고 보니, 축제가 끝나고 새우잡이 배를 타기로 했잖아. 새우잡이 배 선장한테 보냈던 전서구는 돌아왔어?”
귀신 얘기가 싫었던 실비아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직 연락이 없네요.”
“그래? 그 전에 좀 확인해 볼 게 있어. 혹시 제국 일보 오늘 자 가져왔니?”
그녀의 말에 세비스가 소파 구석에 끼어있던 신문을 가져왔다.
“여기요.”
식탁 위에서 신문을 펼친 실비아는 구인광고란을 빠르게 훑어봤다. 스크랩해 둔 광고가 있었지만, 혹시나 이미 구해 삭제했거나 수당이 더 올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새우잡이 배 구인광고는 상시모집인지 그대로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던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파르게 오르는 물가를 반영한 건지 일당이 2천 골드로 올라 있었다! …아니면 신청하는 사람이 없어서 급하게 일당을 올릴 것일 수도 있고. 뭐가 됐든 반가운 소식이었다.
“2천 골드네? 이 정도면 할 만하겠다. 연락이 오면 축제 끝나고 바로 한다고 전해 줘.”
“저도 갈래요!”
“안 돼. 세비스 너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녀의 단호한 표정에 세비스의 어깨가 추욱 쳐졌지만 별수없었다. 배를 구하면 바로 루카에게 연락해야 하는데, 세비스가 있으면 곤란했다. 루카의 성격상 분명히 세비스랑 부딪힐 것 같았다.
‘그것도 그렇고 떡도 좀 쳐야 되니까…. 배를 구하고 나면 백 프로 루카를 공략할 수 있게 될 텐데, 세비스가 옆에 있으면 뭘 할 수가 없잖아.’
어깨뿐만 아니라 귀도 물먹은 솜처럼 늘어트린 세비스는 실비아가 그의 가엾은 표정을 보고도 가만히 있자 입술을 내밀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같이 가고 싶은데…. 실비아 님만 갔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요?”
“던전도 아니고 새우 잡으러 가는 건데 별일 있겠니? 그리고 내 능력 알잖아. 큰일이 나도 그 배가 큰일이 나지, 나는 안 나.”
“그건 맞는데….”
사실 새우잡이 배에 탄 뒤에 바로 보물섬으로 갈 예정이기에 위험할 수도 있었다. 섬이니까 도망칠 구석이 없어서 더 위험할지도 모르고. 그래도 실비아는 죽을 각오를 해서라도 절실하게 루카랑 단둘이서 실컷… 있고 싶었다.
실비아는 이미 결론이 났다는 듯 얄짤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세비스가 한숨을 쉬는 게 보였지만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이번엔 정말 안 돼. 루카는 다른 이의 방해 없이 온전하게 맛보고 싶으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