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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89화 (89/372)

89화

‘종신형 계약? 뭐야 이게.’

“종신… 이게 뭐…?”

“응. 종신형 계약. 내 평생의 피고용자가 되어 줘. 실비아.”

실비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종신형 계약’이란 말도 이상한데 두 단어 사이에 검은색의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루카가 말릴 새도 없이 떼어 보니 ‘노예’라는 말이 그 사이에 있었다.

“허허… 심지어 노예….”

“어? 아아, 이건 신경 안 써도 돼!”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미친놈아.’

실비아의 똥 씹은 표정에도 루카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른하게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는 무척 뻔뻔했다. 그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워서 그녀의 이성을 흐리게 했지만…. 실비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건 아니다. 정신 단단히 차려야 했다.

“실비아, 너를 계속 내 옆에 두고 싶어서 그래.”

“아…. 아무래도 이건 안 될 것 같아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할 일이 많아서 어디에 묶이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안 돼? 아쉽다. 평생 함께 하고 싶었는데.”

‘염병하네! 이 싸이코패스 같은 자식. 잘생긴 것만 아니었으면…. 주먹이 운다. 울어.’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반대편 주먹을 부르르 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억지로 웃었다. 그녀가 루카의 아쉬워하는 얼굴에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있는데, 빵빠레 효과음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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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엔딩 <염전 노예 60년. 그 처참한 기록>을 피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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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건?’

실비아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급하게 일어나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하자, 루카가 사무실 밖에 있는 실내화장실까지 안내해 주었다. 문을 열며 뒤돌아보니 아까완 달리 그의 미소가 무척 비열해 보였다.

화장실 안에서 손을 씻으며 기록 창을 켜 보니 배드엔딩의 상세설명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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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엔딩 : <염전 노예 60년, 그 처참한 기록>

- 실비아는 루카의 외모에 홀려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종신형 노예 계약>에 사인을 한 그녀는 소원대로 루카의 곁에서 평생 함께하게 되었다. …염전 노예로서 말이다.

루카는 그녀가 60년 노예 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매일 염전에 찾아와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 물론 사랑한다는 말 외의 육체적 접촉은 전무했다. 가끔 격려차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게 최고의 스킨십이었다.

방년 83살, 실비아는 멍석에 싸여 루카의 사랑한다는 소릴 들으며 눈을 감았다. 누군가는 그녀를 남자에 미친 여자라 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들이 뭐라 생각하든 그녀가 행복했으면 된 거 아닐까? 행복은 기준은 저마다 다른 것이니 말이다….

배드엔딩 조건 : 루카의 호감도 100 미만, <종신 계약 이벤트>를 수락할 시에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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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뭐 이딴 정신 나간 엔딩이…. 하마터면 염전 노예가 될 뻔했네.’

실비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무슨 놈의 공략 캐릭터가 체내에 독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배드엔딩 루트까지 있는지, 지뢰밭이 따로 없었다.

‘공략하기 힘든 만큼 성공할 때 짜릿하게 느껴지긴 하겠지만… 인간적으로 너무한 거 아냐? 이런 씨…!’

그녀는 핸드타월을 마구 뽑아 거칠게 손을 닦은 뒤 쓰레기통에 던져 넣다가, 어쩐지 쓰레기통이 루카처럼 보여 발로 힘껏 걷어찼다. 곧 아이고- 하면서 발을 들고 콩콩 뛰었지만 말이다.

잠시 후 혼자서 모노드라마를 찍으며 성질을 내던 그녀는 겨우 진정하고 어기적어기적 화장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간 실비아가 한 번 더 ‘종신 계약’을 거절하자 루카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계속 옆에서 날 도와주면 좋을 것 같은데…. 사실 내가 조만간 우리 집안일 때문에 바쁠 예정이거든.”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실비아가 묻자 루카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을 이어갔다.

“음… 그게…. 뭐, 너한텐 말해도 상관없겠지. 사실 우리 집안 소유의 섬이 얼마 전부터 이상해져서 출입을 할 수가 없어. 거기다가 주변 정찰을 갔던 부하들이 다시 돌아오질 못하고 있어서 말이야.”

“아…?”

“그 섬을 조사해야 해서 한동안 너랑 만나지 못할 것 같아.”

루카의 말을 들은 실비아는 깜짝 놀랐다. 섬이라니, 점쟁이 할머니가 말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은 루카의 섬을 뜻하는 게 아닐까?

“섬이요?”

“응, 배를 타고 간 부하들이 계속 돌아오질 못하니까, 우리 집안 소유의 배가 몇 척 있었는데 다 사라져 버렸어. 당장 급한 대로 선박업체에 배를 빌렸는데 그 배들도 반환을 못 하니 소문이 났나 봐. 선원도 소개해 주지 않고 배도 빌려주지 않겠다고 하고…. 그래서 그걸 해결할 때까진 정신이 없을 거야.”

“어…. 제가 도울 순 없는 건가요?”

실비아의 말에 루카가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저었다.

“도와준다면 고맙지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보물창고용으로 만든 거라 이동 스크롤로도 갈 수 없게 철저하게 방어막을 쳐 놔서 우선은 배가 있어야 해.”

“돈을 줘도 안 빌려준대요?”

실비아의 말에 루카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인상을 썼다.

“응. 아무래도 바닷가마을이라 그런가, 배를 제 목숨처럼 생각해서 그런지 웃돈을 준다고 해도 쉽게들 안 빌려주네. 배를 잃으면 일 년간 재수가 없다나 뭐라나 미신이나 떠들어 대고 말이야. 축제가 끝나면 선주들이랑 딜을 좀 해 봐야겠어.”

“딴 것보다 배를 구하는 게 우선이군요.”

‘어쩐지 내가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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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로 싸인 보물섬의 입장권>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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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던전 입장권 획득이었다. 그녀는 루카가 눈치채지 못하게 인벤토리를 열어 입장권의 상세설명을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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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로 싸인 보물섬

- 루카 집안 소유의 섬으로 대대로 보물창고로 사용되던 곳이다. 그곳은 루카의 선조가 결계를 쳐 놨기에 집안의 인장을 지닌 자들만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러나 관리가 소홀해진 5년 사이에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최근 1년 사이 정찰병으로 보낸 부하들이 계속 사라지고 있다는데? 아무래도 오염된 기운이랑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사라진 부하들을 찾고 그 섬의 보물도… 몰래 챙겨오자!

좌표 : 북위 3X도, 동경 2X도

입장 조건 : 레벨 30 이상 / 정화의 스킬 필수. 루카랑 동행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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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권의 상세설명을 읽어 내려가던 실비아의 눈이 좌표에서 멈췄다. 정확한 좌표가 있으니 나침반을 보고 항해하면 될 것 같았다. 섬이니까 수영으로 가기엔 무리가 있을 거고, 루카의 말대로 배가 있으면 갈 수 있을 텐데….

그 순간 그녀의 뇌리에 서랍장에 고이 접어 넣어둔 ‘새우잡이 배’ 광고와 점쟁이 할머니의 조언이 스쳐 지나갔다.

‘맞아! 안 그래도 새우잡이 배를 타기로 했었지. 배를 타서 새우 좀 잡다가 선장에게 부탁해서 보물섬으로 가자고 하면 되지 않을까? 점쟁이 할머니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으로 가면 잘 될 것이라고 한 게 이 말이었구나!’

실비아가 시스템 창을 보며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루카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실비아! 한동안 만나지 못할 거라니깐? 내 말 듣고 있어?”

“…네? 아아, 듣고 있어요.”

“그래서 종신 계약을 해서 항상 함께 하고 싶었던 건데. 이 일이 언제 해결될지 모르니 한동안 못 만날 수도 있어.”

저놈의 ‘종신 계약’…. 다시 한번 <배드엔딩 : 염전 노예 60년, 그 처참한 기록>을 떠올리며 잠시 이를 갈았던 실비아는 가까스로 입꼬리를 올려 그를 바라봤다.

“종신 계약은 안 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확답은 못 하겠지만 어쩌면 배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구하게 되면 저도 그 섬에 같이 가도 될까요?”

“배를 구할 수 있다고?! 그래, 구하기만 하면 뭐든지! 사랑해, 실비아.”

루카가 예고도 없이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그와 함께 쓸모없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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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게임 내에서 <두 번째 사랑 고백 받기♥>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속도가 빠른데요?]

[여전히 별다른 효과는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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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입만 걸레인 동정남다워….’

고개를 휘휘 저어 메시지를 없애 버린 실비아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다시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맞닿은 루카의 뜨거운 몸을 느끼며 야한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배만 구한다면 보물섬으로 같이 들어갈 수 있을 테고, 섬에선 금방 호감도를 다 채워 공략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섬은 사면이 바다로 막혀 쉽게 도망칠 수 없는 구조니, 루카는 그녀를 피할 수 없을 테다. 그땐 순결한 루카의 몸을 아주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실비아가 음흉한 각오를 하던 중 그녀를 껴안고 있던 루카는 몸을 일으켜 사물함을 뒤지더니 그 안에서 조그만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그리고는 상자를 열어 그 속에 있던 돌돌 말린 양피지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이건 우리 집안에서 만든 소환 스크롤이야. 배를 구하게 되면 이 스크롤을 써. 그러면 내가 그 자리에 소환될 테니까.”

“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배를 구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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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전용 소환 스크롤>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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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는 <루카 전용 소환 스크롤>을 매고 있던 미니 백 안에 집어넣었다. 메시지가 뜬 걸 보니 게임 아이템으로 보였지만 루카 앞에서 인벤토리를 열어 아이템을 집어넣기엔 좀 그랬기 때문이다.

루카는 실비아가 배를 못 구하더라도 자신이 어떻게든 구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덧붙였지만, 아마도 게임의 흐름상 실비아가 배를 구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어쩐지 구인광고를 처음 볼 때부터 ‘새우잡이 배’가 눈에 띄더라니, 이걸 위해서였나.’

실비아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알바 퀘스트도 끝냈고 체내에 독이 흐르는 위험한 루카랑 더 있어 봤자 진도를 더 나갈 수 있을 거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집에 얼른 가서 새우잡이 배 광고나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제 할 일도 다 끝났으니 집에 가 볼게요.”

“데려다줄게.”

실비아가 갈 채비를 하자 그가 사무실의 금고를 열어 심부름꾼 알바 일당과 도박꾼 정신개조 수당을 챙겨 주었다. 심부름을 하면서 받은 팁까지 합치니 총 6500골드의 돈이 하루 만에 생겨 버렸다.

‘이제 게임 한 달 차가 지나니까 돈 벌기가 쉬워지는구나. 가난을 벗어날 날도 머지않았어.’

돈을 챙겨 문을 열고 나오니 루카가 그녀를 따라 나왔다. 도박장은 어느새 하우스 마감 시간이 된 건지 덩치들이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의 무심했던 모습과는 달리 실비아를 보곤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어쩌다 보니 덩치들에게 인사까지 받게 됐네. 기분은 좋다만.’

그녀는 덩치들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바닷가 바람에 휘날리는 앞머리를 붙잡고 있는데, 실비아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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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는 도박판에 훌륭하게 데뷔했다. 업보가 +50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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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업보가 안 오른다 싶더니, 하우스 밖으로 나오자마자 메시지가 떠오르네.’

하우스에 들어선 순간 업보가 오를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기에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그녀는 업보가 쌓였단 메시지를 본 순간 노엘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이틀이나 못 봤다.

‘노엘 님이랑 하면 업보가 내려가지…. 그러고 보니 노엘 님이 축제 때 뭘 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내일 무대 행사에 참여한다고 했던가? 구경하러 가야겠다. 보고 싶어….’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 되어 가는지 수평선 너머로 붉은 태양이 지고 있었다. 바닥을 구르는 축제 팸플릿을 집어 들어 읽어 보니 수요일 무대 행사 중 하나에 ‘엘베우스 신전의 축하 공연’이 있었다. 실비아가 아련한 눈길로 팸플릿을 읽고 있는데 갑작스레 루카가 와이셔츠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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