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는 걸 알아도 쓰레기한테 끌리는 사람이 있는 법. 그녀가 딱 그랬다. 실비아는 현생에서 늘 똥차 콜렉터였기 때문에, 방금까지 쳐서 세 번이나 데드엔딩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루카에게 가슴이 뛰고 있었다.
계속 죽으면 정나미가 뚝 떨어져야 정상이건만 오묘하게 빛나는 금안과 가운데가 섹시하게 갈라진 입술, 시선을 내리면 보이는 탁 트인 초원처럼 광활한 어깨와 두툼한 가슴을 어찌 외면할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끈적한 눈길로 루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거기다가 나를 세 번이나 죽게 할 남자는 흔치 않지…. 크흠.’
정상적인 사고로는 한 번 죽을 뻔한 것조차 큰일인데 실비아는 눈앞의 위험한 남자에게 설레는 제 감정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루카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제 목을 쓸어 올렸다.
“실비아, 여기 노점상 중에 하고 싶은 알바를 고르면 돼. 어차피 다 내 관할구역이니까 아무거나 선택해도 상관없어.”
“음….”
실비아는 노점상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아이스크림 판매, 복조리 판매 같은 멀쩡한 것부터 멸치와 문신뚱땡이가 하는 약장사까지. 꽤 다양했지만 선뜻 끌리는 게 없었다.
“일당이 가장 센 걸로 하고 싶은데요.”
“음? 아…. 좀 위험한 일도 있는데 괜찮겠어?”
루카의 말에 잠시 멈칫했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해 봤자 뭐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이미 피라미드 행사장도 체험했고 던전도 성공적으로 클리어한 그녀의 간은 무척 부어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남주들을 공략할 때가 아니면 알바를 하다가 죽을 일은 없는 것 같았기에 안심한 것도 있었다.
“나쁜 일도 괜찮아?”
“나쁜 일요?”
피라미드 행사장에서 업보가 쌓였던 걸 떠올린 그녀는 또 고개를 끄덕했다. 나쁜 일을 하더라도 업보를 내려 주는 효과를 가진 노엘이 있었기에 괜찮았다. 그리고 사실 이 게임 속에 멀쩡한 알바란 게 존재하긴 할까.
잠시 아련하게 눈을 뜬 그녀가 뭐든 상관없다고 하자 턱을 문지르며 고민하던 루카가 손가락을 딱- 맞부딪쳤다. 그리곤 아름다운 금안을 달콤하게 휘며 눈웃음을 쳤다.
“아! 마침 딱 좋은 알바가 있어. 네가 그 일을 제대로 해낼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번 해 볼래?”
“어떤 일이죠?”
실비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못 먹어도 고!”
“이야, 오늘 판이 아주 죽여주네?”
“으아아! 내 돈! 저 새끼 사기꾼이야!”
환호성을 지르거나 절망하는 사람들로 정신없는 시끌벅적한 내부는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어 그녀의 목을 쓰라리게 했다. 그녀가 있는 이곳은 하우스 도박장. 말 그대로 간이하우스를 세워 놓고 즐기라는 축제는 안 즐기고 도박을 하러 온 이들의 주머니를 터는 곳으로, 루카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녀는 새삼 그의 쓰레기력에 감탄했다. 즐겁게 즐기라고 연 축제 한구석에 음침한 도박장을 세우다니.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실비아가 하게 된 알바는 그 하우스 내부의 일일 심부름꾼이었다. 아무래도 담배 연기도 맡아야 하고 도박으로 예민한 이들 사이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니 일당이 셌다. 자그마치 하루에 3천 골드.
그리고 도박판이니만큼 금전 감각이 마비되어 버린 도박꾼들이 그녀에게 주는 팁도 두둑했다. 업보가 얼마가 쌓일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짭짤한 알바였다.
‘으윽, 매캐한 담배 연기. 대체 성년의 날 축제까지 와서 왜 도박을 하는 거야.’
“어이, 거기 담배 한 갑 좀 사와 봐라.”
“아이고, 당장 사 오겠습니다.”
오만상을 쓰던 실비아는 도박꾼이 팁과 담뱃값을 함께 내밀며 심부름을 시키자 배꼽 인사를 하고는 돈을 챙겼다. 그녀는 얼른 코앞에 있는 노점상으로 가 담배를 사 왔다.
실비아가 담배를 가져오자 도박꾼이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검지와 중지를 내밀었다. 이미 1시간 만에 익숙해진 그 모습에 실비아는 담뱃갑을 풀어헤쳐 재빠르게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 담배 한 개비를 꽂아 주었다. 그러자 그가 껄껄- 웃으며 그녀를 칭찬했다.
“눈치가 빨라서 좋구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녀가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아부를 하자 도박꾼이 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밤색 머리, 오늘 내가 이길 거 같아?”
“두말하면 입 아픈 소리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 아부인 건 아는데 기분은 좋네!”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비고 있자 추가로 팁이 더 떨어졌다. 도박꾼들은 대부분 고급스러운 옷을 걸친 게 딱 봐도 돈깨나 있는 귀족이나 사업가들로 보였다. 그녀가 영업용 미소를 잃지 않으며 루카를 힐끗 바라보자 그가 느른하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엄지를 추켜올렸다.
‘잘하고 있단 거겠지. 내가 어쩌다가 남주 중 하나한테 이딴 알바를 소개받는 지경에 이르렀는진 모르겠지만…. 우선은 무사히 돈이나 벌어가자. 기왕지사 루카의 호감도가 더 오르면 좋고.’
그녀는 루카를 힐끗 바라봤다. 그는 카운터에 앉아 감시자 겸 환전소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가끔 보면 빙긋 웃고 있기도 하고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서 서늘하게 정색을 하고 있기도 했다.
실비아는 그 모습을 잠시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빙긋 웃을 땐 인간을 유혹하러 내려온 악마 같았고 정색을 할 땐 조직의 보스 같은 포스가 풍겼다.
‘역시 잘생겼어. 저 얼굴 보는 맛에 알바를 하는 거지.’
정신없이 심부름을 하다 보니 어느덧 꽤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살짝 지루해서 하품을 했지만 도박꾼들은 지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이 뒤집혀 정신없이 카드를 돌리기 바빴다. 오가는 판돈을 보니 안 그래도 부자인 루카는 오늘 더욱더 부자가 될 듯했다.
축제 안의 간이하우스 도박장엔 관광객들도 가끔 들어와서 재미로 몇 판 하다가 나갔다. 폐장 시간이 다 돼 가자 어느새 하우스 안엔 뜨내기 도박꾼들은 다 사라지고 전문 도박꾼들만 남았다.
그녀가 지루한 기색을 티 내지 않고 아부를 떨며 팁을 받고 있는데 루카가 은밀하게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실비아.”
가까이 다가온 루카의 몸에선 은은한 머스크 향기가 풍겼다. 밖에선 향수 향기가 나지 않았는데, 담배 냄새가 많이 나는 이 하우스에 들어와서 뿌린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실비아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대자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떨렸다. 옷 위로도 느껴지는 루카의 탄탄한 몸 탓이었다.
‘후…. 근육이 아주 꽉 들어차 있구나. 몸이 아주 그냥 대놓고 단단해.’
실비아의 생각을 꿈에도 모른 채 루카가 턱으로 테이블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보여?”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한 테이블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게 보였다. 귀를 기울여보니 ‘우와, 계속 맞히네.’, ‘진짜 대단하다.’ 이런 소리들이 들려왔다. 조끼와 나비넥타이를 찬 테이블의 딜러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곳을 날카롭게 쳐다보던 루카는 이내 목을 꺾으며 하- 하고 아니꼬운 표정을 지었다.
“저 테이블은 야바위판이거든? 그냥 재미로 하라고 만든 곳인데 어떤 미친놈이 와서 돈을 계속 따가네?”
“아… 예. 부럽네요.”
실비아가 심드렁하게 답하자 루카가 그녀의 어깨를 꽉 쥐더니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그리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게 아닌가. 그 아찔한 눈빛에 순간적으로 저번처럼 제 주머니를 뒤적거려 줄 것을 찾던 실비아는 이어지는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실비아, 저 사람 때문에 우리 하우스가 우스워지게 생겼단 말이야. 돈을 잘 딸 수 있단 소문은 좋지만 실제로 저렇게 싹 쓸어 가면 곤란해. …네가 어떻게 해 줄 수 없을까?”
“뭘… 뭘 어떻게 해요?”
“너 말 잘하잖아. 테이블에 딜러로 들어가서 저 도박꾼을 조져 버려. 할 수 있겠어?”
‘조져 버리라니, 내가 어떻게?’
그런데 루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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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꾼을 조져서 루카의 환심을 사 보자.
- 축제 내에서 도박 하우스를 오픈한 루카는 돈을 계속 따는 도박꾼 때문에 깊은 시름에 잠겨 있다. 그의 부탁대로 도박꾼을 조져 하우스에서 도망치게 하자. 혹시 모르지, 호감을 완벽하게 쌓는다면 <십중팔구 만독불침>의 불완전성을 없앨 수 있을지도?
보상 : 루카의 호감도 +20, 3000골드, 새로운 세간의 평가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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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창을 바라본 실비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안 그래도 <십중팔구 만독불침>이 해독을 실패해서 절망해 있던 참이었는데 구미가 당기는 소리였다. 혹시 퀘스트 메시지가 루카 공략에 대한 힌트라면, 그의 독은 호감도 100을 쌓는다면 완벽하게 해독될지도 몰랐다.
활짝 웃으며 퀘스트 창을 바라보던 실비아는 메시지 창의 마지막 문구에서 눈썹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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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 루카의 호감도 -100. 실비아와 루카는 적대 관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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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나갔나…. 이 쓰레기 같은 자식! 실패 한 번 했다고 호감도를 버리다 못 해 나랑 적이 된다고? 휴…. 무조건 성공해야겠구나.’
호감도 –100이면 지금 쌓은 호감도가 60이니 –40이 된단 소리였다. 역시 독을 품은 남주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 공략이 어려운 만큼 나중에 실컷…. 실컷 괴롭혀 주겠다.’
실비아는 잠시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고는 게임을 세이브했다. 그리고는 루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퀘스트가 수락되었다는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좋아요. 저 도박꾼, 오늘 이후로 이 도박판을 떠나게 만들어 줄게요.”
“정말? 실비아, 사랑해.”
실비아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사랑한다니, 이 게임 내에서 처음으로 사랑 고백을 받았다. 물론 루카의 입에서 나오는 달콤한 말은 보통 상대방을 착취하기 위한 멘트로 영혼이 없단 걸 알고 있었지만, 듣는 순간만은 황홀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 빵빠레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