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내일은 오랜만에 루카랑 만나기로 했다. 알바도 소개받고 <십중팔구 만독불침> 스킬을 얻었으니 가능하다면 공략도 해 볼 생각이었다. 불완전한 스킬이긴 하지만 공략이 가능해졌으니 상태 창이 뜰지도 몰랐다. 그녀는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 실비아는 아침을 먹고 이를 닦은 뒤 만능 레이저 반지를 초록색으로 돌려 림보와 제 치아 건강을 챙겼다. 세비스도 옆에서 해달라고 조르기에 정성스럽게 치석을 제거해 주었다.
집을 나선 그들은 림보의 터보 주행으로 3초 만에 바닷가에 도착했다. 중간에 몇 번 행인들을 친 것 같았지만 이제 익숙해졌기에 개의치 않았다. 오늘은 루카를 만나 일일 알바를 소개받기로 했기에 세비스와 림보는 그녀와 떨어져 따로 축제 구경을 하기로 했다.
잠시 세비스가 툴툴댔지만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는 그녀의 말에 입을 닫았다.
둘과 떨어진 실비아는 바닷가 입구에 있는 조각상에 몸을 기대고 서 있다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걸 듣고 고개를 들었다.
“저기 웬 조각상이 걸어 다니지?”
“아, 저 금빛 눈동자, 저 아름다운 눈을 핥고 싶어….”
‘금안이면 루카 같은데?’
실비아는 깨금발을 들어 인파 사이를 기웃기웃댔다. 이내 길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인파가 모세의 기적처럼 양 갈래로 길을 텄다. 아니나 다를까, 길의 끝에 광채가 나는 인물이 하나 서 있었다.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 루카였다.
그는 평소와 달리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겨 세팅한 채 그 위에 선글라스를 얹어 놓았다. 그리고 기하학적 무늬의 검은 반팔 셔츠와 품이 넓은 검은 통바지를 입었는데, 보통사람이면 동네 양아치가 됐을 그 패션도 그가 입으니 홍콩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 같았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저번에도 봤던 중년의 남자가 저절로 오픈된 길에 레드카펫을 깔았다. 루카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느긋하게 걸어오더니 실비아를 발견하곤 시원하게 웃었다.
“실비아!”
‘세상에, 혼자서 영화를 찍고 앉아 있네.’
루카가 잘생긴 건 좋은데 뒤에 달고 온 금붕어 똥들은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그는 혼자 온 게 아니라 뒤에 스무 명가량의 덩치들을 함께 데려왔기에 관광객들은 눈치를 보면서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화려하게 생겨서 튀는 루카는 덩치들까지 한가득 대동하고 나타나서 오늘 축제의 화제의 인물이 될 듯했다. 덩치들은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낯이 익은 멸치랑 문신뚱땡이도 보였다. 그들은 루카에게 무슨 얘길 들은 건지 실비아의 눈을 피하곤 저 멀리 딴 곳으로 도망쳤다.
루카는 그녀의 앞까지 걸어온 뒤 나른하게 미소 짓곤 뒤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부하들은 그가 별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루카의 행동에 익숙한지 알아서 몰려든 군중들을 정리하고 물러났다.
단둘만 남자 그는 팔짱을 끼더니 삐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곤 몸을 숙여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에 넋이 나가기도 잠시. 실비아는 정신을 차리고 <동정 레이더>를 켰다. 예상대로 반가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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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입니다. 상태 창을 열람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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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렇지! 열람!’
환호성을 지를 뻔한 걸 가까스로 참고 열람을 외치자 눈앞에 루카의 상태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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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가의 후계자 루카>
정식 이름은 루카 디 아리센트.
대대로 업보를 쌓아 온 아리센트가의 차남으로 장남이 작고한 후로 후계자가 되었다.
사업을 할 땐 더없이 사악하지만 의외로 순정파.
그의 입을 항상 조심하라. 정신 차리고 보면 가산을 탕진해 길가에 나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흰 피부, 강렬한 붉은 색 머리와 황홀하게 빛나는 금빛 눈이 특징.
공략 포인트 : 그가 소개하는 아르바이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것. 루카는 자신을 성공의 길로 데려갈 여자를 기다리고 있다.
호감도 : 60
공략 보상 : 레벨 업 / 불속성 스킬트리 개방
<불의 씨앗 조각>
주의 사항 1 : 누가 심어놓은 건지 모를 독이 체내에 흐른다.
주의 사항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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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중팔구 만독불침> 덕에 불완전하지만 공략이 가능해졌다. 신나기도 잠시, 상태 창을 빠르게 읽어 내리던 그녀는 공략 포인트에서 멈칫했다.
‘소개해 주는 아르바이트를 다 성공해야 하는 거네. 이상한 알바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더 내려가 보니 다행히도 호감도가 이미 60이었다. 아마도 공략 불가인 상태에서 몇 번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호감도가 올라간 것 같았다.
‘아니면, 데드엔딩을 맞기 전에 했던 스킨십이 영향을 준 걸까? 정확한 건 알 수가 없네.’
공략 보상은 <레벨 업>과 <불속성 스킬트리 개방>이었다. 처음 만났던 날 손 위에 불꽃을 소환해 냈었으니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주의 사항 2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주의 사항 1이 독인데 주의 사항 2는 <??>네. 휴…. 시스템이 또 무슨 개수작을 하려고.’
그녀가 상태 창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데 루카가 별안간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실비아? 실비아! 왜 말이 없어.”
“…아, 미안해요.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
실비아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사과를 하자 루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 너무하네. 사람을 앞에 세워 두고 딴생각을 하고. 거기다가 내 편지에 답장도 늦게 주고 말이야, 정말 이러기야?”
“편지는 제가 좀 바빠서 늦게 봤어요.”
“어어? 이런 나를 두고 바쁘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루카가 양손을 펼치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루카를 두고 바쁠 수가 있냐니. 충분히 논리적인 말이라 할 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바쁜 건 바쁜 거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루카가 그녀의 뒤를 자연스럽게 뒤따라 왔다.
“말 안 될 건 없죠?”
“뭐? 참나…. 그래, 바빴다니까 이해하기로 할게. 우선 소개 해주기로 한 알바 얘기를 해 볼까.”
루카는 혼자서 기가 막힌 듯 참나 거리더니 금방 화를 풀었다. 호감도 60의 힘은 싸가지 없는 남자도 부드러워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실비아는 루카의 변화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걸음을 빨리했다.
“네. 어떤 알바죠?”
“그게…”
실비아는 사무적으로 대답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리고 재빠르게 루카를 한적한 해변의 칵테일바로 이끌었다. 루카는 대화에 정신이 팔려 의심 한 톨 없이 그녀를 따라 칵테일바 안으로 들어왔다.
해변의 구석에 위치한 가게는 인위적으로 심어 놓은 야자수 덕에 시원한 그늘이 져 있고 축제의 중심지랑은 살짝 떨어져 있었다. 이용객도 거의 없어 보여 아무도 몰래 루카를 작업하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상태 창이 떴다는 건 이제 공략이 가능하단 소리야. 심지어 호감도도 이미 60이야. 왜 호감도가 올라간 건진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스킨십을 하면 호감도가 올라간단 사실이지.’
그러나 욕심에 눈이 멀어 일을 망치면 안 되는 법. 우선은 획득한 스킬에 아쉽게도 ‘십중팔구’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기에, 혹시 모를 데드엔딩에 대비해 그녀는 칵테일바 입구 앞에서 세이브를 했다.
노엘 때의 경험을 떠올리면 적절한 스킨십은 호감도를 올리기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물론 아르바이트를 성공하는 것도 루카의 공략 포인트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우선은 독이 다 제거된 복어회를 한 점 맛보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변태같이 웃을 뻔한 걸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고 으슥하고 어두침침한 가게의 야외석으로 루카를 데려갔다.
이 게임은 19금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야한 일을 벌일 수 있는 으슥한 장소가 많아서 좋았다. 물론 이 망할 놈의 게임은 19금 게임인 주제에 남주들 공략이 쉽지 않아서 그 장소를 쓸 일은 잘 생기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 근데 여긴 왜 온 거야.”
루카는 영문모른 채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실비아가 안내하는 푹신한 2인용 야외의자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앉았다. 실비아는 말없이 카운터에 가서 테킬라를 두 잔 주문한 뒤 그의 옆에 다가갔다. 그리곤 목이 타는 느낌에 입술로 혀를 핥으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글쎄요? 목이 말라서?”
“알바 할 곳에도 음료수가 있는데?”
“그렇군요? 그냥 좀 피곤해서요.”
실비아가 야릇한 몸짓으로 그의 팔에 몸을 기대자 루카가 흠칫하더니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는 얼굴을 살짝 발그레하게 붉히며 딴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곤한 건 우리 회사 제품 먹으면 다 낫는데….”
“후후. 술은 또 다르죠.”
잠시 야릇한 침묵이 흐르고 눈치 빠른 칵테일바 직원은 재빨리 술을 서빙하고 가 버렸다. 그녀가 테킬라를 시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술은 손등에 소금을 얹어서 무려! 핥아 먹어야 하는 술이었기 때문이다.
루카는 그녀와 끈적하게 닿아 있어서 목이 탔는지 술을 급하게 잔에 따른 후 그대로 들이켜려고 했다.
“잠깐….”
잔을 드는 그의 손을 우아하게 막아 다시 내려놓은 그녀는 조그만 그릇에 담긴 소금을 제 손등에 톡톡 흩뿌렸다. 그리곤 루카를 향해 고혹적으로 미소 지었다.
“루카 님, 이 술 드실 줄 모르시는구나? 이건 손등에다가 소금을 쳐서 같이 먹는 거예요.”
“어…? 아아…. 그런 거구나. 하아….”
실비아는 일부러 루카에게 몸을 기울여 제 가슴을 슬쩍 닿게 하며 손등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루카가 답지 않게 멍청하게 눈을 껌뻑이더니 애타는 듯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나긋한 손짓으로 테킬라를 따른 뒤 술을 한 번에 원샷했다. 그리곤 혀를 내어 제 손등을 핥으면서 루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을 본 루카의 목울대가 거칠게 꿀렁였다. 눈이 흔들리며 얼굴은 물론이요, 목까지 새빨개진 게 실비아가 손등을 핥는 걸 보고 제대로 꼴린 듯했다. 루카는 손으로 제 턱을 거칠게 쓸더니 별안간 잔을 들어 테킬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곤 제 손등에다가 소금을 뿌리려고 하는데, 그의 손을 실비아가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