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둘은 그녀를 짜게 식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세비스의 눈빛은 아주 싸늘했다.
“실비아 님…. 저희를 카페에 내버리고 대체 뭘 하고 계셨던 거죠?”
“어, 그게….”
실비아가 망설이자 세비스가 그녀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리고 대체… 씨름판 안에서 왜… 선수들을 껴안고 다니….”
“큭…. 보였? 세비스 그걸 봤구나? …크흡.”
세상에나. 그 모습을 세비스가 다 봤다니, 정말 수치스러웠다. 이럴까 봐 카페 안에 놔두고 도망친 건데. 실비아가 얼굴을 붉힌 채 더듬거리자 세비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짐승의 감각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좀 추잡…. 아니 좀 그랬어요.”
세비스의 말에 그녀의 얼굴은 이제 홍당무처럼 벌게졌다. 짐승의 감각으로 세비스가 <손은 눈보다 빠르다> 스킬을 간파한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나보다 레벨이 높거나…. 상태 창을 볼 수 없어서 알 순 없지만, 설마 세비스가 나보다 레벨이 높나? 후, 그건 그렇고 하필 딴사람도 아니고 세비스가 그 광경을 다 봤다니. 진짜 민망하네.’
“이것도 다 신의 뜻이야…. 자세히 말하긴 힘들지만… 그런 게 있어.”
실비아가 힐긋힐긋 눈치를 보며 말하자 세비스는 할 말이 더 있어 보였지만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게임의 개발자가 누군지 몰라도 정말 격하게 패고 싶다고 생각하며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 속에 그들은 해수욕장을 걸었다. 실비아는 둘의 옆에서 재롱을 피우고 옆구리를 찌르며 나 잡아봐라, 를 하며 혼자 도망쳤다가 뻘쭘하게 돌아오는 등. 눈물겨운 노력으로 겨우 분위기를 푸는 데 성공했다.
다행히 세비스와 림보 둘 다 오래 꿍해 있는 타입은 아니었기에 곧 풀어져, 축제 구경에 삼매경이었다.
‘성년의 날 축제’는 현실의 다른 축제들이 그렇듯이 ‘성년의 날’이란 명분은 거들 뿐, 관광객들이 좋아할 만한 즐길 거리와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성하게 있어서 하루 종일 쏘다녀도 지겹지가 않았다. 다트 쏘기 게임과 물풍선 던지기 게임을 즐기며 땀을 흘린 그들은 시원한 음료를 사 먹으며 축제를 구경했다.
축제가 한창인 해수욕장 뒤편엔 소나무 숲이 무성한 산림욕장이 있었다. 시끌벅적한 축제를 뒤로 하고 셋은 잠시 힐링도 할 겸 소나무 숲을 거닐었다.
‘꽤 논 거 같은데. 축제 끝나면 뭘 하면 될까.’
던전 공략 후로 5일간 놀았다. 물론 비상금을 1만 골드 받거나 오늘만 해도 레벨이 3이나 오르는 등 쉬는 동안도 여러 가지 이벤트가 발생했었기에 아무 의미 없는 휴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안했다. 욜로족이었던 실비아는 게임에 빙의한 지 30일 차가 지나면서 어느새 열심히 하는데도 너무 놀고 있다는 한국인 특유의 불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내일은 루카가 알바를 소개해 준다고 했으니 뭐라도 하게 되겠지만 그건 어차피 일일 알바. 결국은 새 던전이나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하는데…. 맞다! 새우잡이 배가 있었지?’
잠시 얼굴이 밝아졌던 실비아는 일당 1천 골드를 떠올리며 멈칫했다. 그때 당시야 1천 골드는 무척 구미가 당기는 일당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국일보를 다시 뒤져봐야겠다고 고민하는 와중에 세비스가 말을 걸어왔다.
“인간 세계의 축제란 이렇게 재밌는 거였네요. 진작에 내려와 볼 걸 그랬어요.”
“그러게, 나도 인간인데도 여기 축제가 참 재밌네. 근데 이렇게 쉬어도 되는가 걱정이 되기도 해.”
“뭐 어때요. 쉰만큼 더 열심히 일하면 되죠.”
“히이잉.”
대화를 나누며 산림욕장에서 산책을 하던 셋은 돗자리를 펴고 쭈그려 앉아 있는 할머니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쏴아아- 하고 소나무 사이로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지나갔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는 돋보기를 끼고 책을 보다가 실비아 일행을 보고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거기 아가들, 운세 한번 보고 갈텨?”
홀린 듯이 할머니에게 다가간 셋은 돗자리 앞의 조그만 의자에 쪼그려 앉았다. 그들을 찬찬히 살피며 씨익- 웃은 할머니가 은방울을 바구니에서 꺼내더니 곧 요란스럽게 흔들었다. 그리곤 순간 우뚝 멈추더니 실비아를 가리키며 탄성을 뱉었다.
“허어, 꽃이 한두 개가 아니구나. 여러 개의 꽃을 한꺼번에 가질 운명이로다.”
“음….”
‘용하군…, 이 아니라. 내가 플레이어니까 당연히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지?’
실비아는 애초부터 여러 명의 남자랑 엮이러 들어온 거니 당연한 소리였다. 또 열심히 쌀알을 꺼내서 흩뿌리던 할머니는 갑자기 낯빛이 하얘지더니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몇 번을 죽은 거야? 거기다가 앞으로도 죽을 일이 도처에 널려 있어!”
“그런….”
놀라는 척하면서도 게임이니 당연한 소릴 한다고 생각해 심드렁해진 실비아는 차라리 이번 주의 운세를 물어보기로 했다. 실비아의 질문에 할머니가 또 은방울을 세차게 흔들더니 눈을 번쩍 떴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으로 가면 네가 원하는 것을 찾으리라!”
“사면이 바다요? 섬? 아니면… 배?”
“그것까진 나오지 않아! 조만간 바다로 둘러싸인 곳으로 가게 될 운명이야!”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라니. 게임 속 인물이 하는 말이니 적중률이 꽤 높을 것이다.
‘내가 뭘 해야 할지 헷갈려 하는 걸 알고 시스템이 등장시킨 인물이 아닐까?’
그녀의 추측이 맞는다면 축제가 끝나고 새우잡이 배를 타는 게 좋을 듯했다. 일당 1천 골드는 던전 돈맛을 본 그녀에겐 내키지 않았지만, 아쉬운 일당은 새우를 좀 얻어와 채우면 되리라.
‘아니면 낚싯대가 있으니 배 위에서 낚시를 해도 되고. 바다 한가운데에선 좀 더 좋은 게 낚이겠지.’
실비아의 점괘가 끝나고 세비스를 바라보며 쌀알을 흩뿌린 할머니는 돗자리를 한 번 팡- 하고 치더니 세비스와 실비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무언가가 막혀 있군. 옆에 있는 이 사람이 널 도와줄 거야.”
“아….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죠?”
세비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할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진 알 수 없어! 어찌 됐든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귀인이니 항상 옆에 붙어 있도록 해.”
세비스의 점괘를 들은 실비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막혀 있단 건 아마도 성체가 되지 못한 걸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럼 도와준다는 건 세비스의 성장을 도와줄 어떤 아이템을 구해 온다는 걸까?
어찌 됐든 옆에 붙어 있으라는 말이 맘에 들어서 실비아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끝난 줄 알았더니 할머니는 은방울을 다시 흔들곤 림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번 년 운이 안 좋아. 반년 안에 사방이 막힌 어딘가에 갇히겠군.”
“히잉?!”
림보가 화들짝 놀라서 양발을 번쩍 들었다.
‘마구간을 말하는 걸까. 내가 림보를 감금할 일은 없는데…. 감금은 딱히 취향도 아니고….’
실비아가 잡생각에 빠져 있는데 할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걸 잘 견디면 꽃길이 펼쳐질 걸세.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역시 이 여자가 널 도와줄 거야.”
세 명의 점괘가 끝났다.
복채를 내고 할머니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그들은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어쩐지 부담스러운 느낌에 실비아가 옆을 힐끗 바라보자 세비스와 림보가 그녀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비스야 신탁의 내용을 듣고 원래부터 자신을 따랐다지만 림보는 새삼스럽게 그녀를 세상 둘도 없는 은인을 보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재미로 본 점괘지만 게임에서는 캐릭터들의 말 하나하나 허투루 들으면 안 되는 법. 실비아는 할머니가 한 말대로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새우잡이 배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라고 했지…. 세비스, 축제가 끝나고 새우잡이 배를 타러 가야겠어. 전서구를 보내 줘.”
“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주위가 어둑해졌다. 배가 고파진 그들은 저녁을 밖에서 때우려다가 돈을 낭비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신난다고 막 썼다가는 거지꼴을 못 면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해서 간단하게 씻고 세비스가 해 준 저녁 식사를 먹고 나니 어느새 잘 시간이 되었다.
‘응? 허깨비를 봤나?’
침대에 누운 실비아가 흠칫- 창문을 바라보니 그녀의 누더기옷 다섯 벌 중 한 벌이 깔끔하게 해체되어서 커튼 형태로 달려 있었다.
‘걸레 만들고도 하나 남았나 보네. 커튼 정도는 하나 사면 안 되나…. 아니야, 세비스의 절약 정신 덕에 안 굶어 죽고 살아 있는 거지. 저 원피스로 수영복을 안 만든 게 어디야.’
침대에 누운 실비아는 오랜만에 상태 창을 불러냈다. 중간 점검을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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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레벨 37
망치 전사
가진 돈 : 42500G(비상금:9900G)
체력 : 230 힘 : 170 지력 : 85 민첩 : 150
화술 : 300(+50)
업보 : 40
신앙심 : 5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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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도 : 50
전투 스킬 : <뚝배기 깨기>, <1+1>, <정화의 망치>,<*손은 눈보다 빠르다>
생활 스킬 : <헛소리를 진지하게>, <*손은 눈보다 빠르다>
패시브 스킬 : <십중팔구 만독불침>
[분배하지 않은 포인트가 15 있습니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는 전투와 생활 스킬 양쪽에 다 사용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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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켜보니 그동안 참 많이 발전한 것 같네.’
뿌듯하게 미소 지은 실비아는 옆으로 넘겨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동안 획득한 아이템들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월급루팡의 축복이 담긴 목걸이>는 착용 중이었고 <은밀한 사과 상자>는 이미 까서 비상금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노엘이랑 네 번을 더 했기에 <신관의 씨앗 조각>이 4개가 추가되어 있었다. 업보가 40 내려간 것도 확인했다. 노엘이 준 <만능 레이저 반지>는 게임 아이템이 아닌 그냥 물건이었기에 애초부터 상세설명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노엘 님이 준 반지가 쓸모가 많았지. 내일 축제 가기 전에 림보 치석 제거 좀 해 줘야겠다. 나도 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