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의 제기합니다!”
실비아의 뜬금없는 난입에 관중석이 술렁였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제 의견을 피력했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둘 다! 둘 다 이겼습니다.”
“예?”
심판이 영문을 모르는 눈으로 바라보자 실비아는 다시 한번 더 단호하게 외쳤다.
“이 게임에 패배자는 없어요! 둘 다…. 둘 다 이겼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건 토너먼트 경기라서 패배자가 있어야 해요. 그리고 심판인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파란 띠 선수가 이겼어요.”
“과연…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실비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되묻자 심판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뭐 이런….”
“후…. 외람된 말씀이지만… 굳이 이 아름다운 승부에서 패자를 한 명 정해야 한다면….”
“한다면?”
실비아는 심판의 가슴에 달린 명함을 힐끗 쳐다봤다. ‘피터’라고 적혀 있었다.
‘피터 씨, 미안해요.’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뒤 다시 외쳤다.
“그건 죄송하지만 피터 씨입니다. 피터 씨가 패자입니다!”
“뭐요? 허참….”
그녀가 말을 마치고 비장한 표정으로 다시 의자에 앉자 잠시 관중석엔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심판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떼려는 순간, 뒤늦게 그녀의 숨겨진 의중을 읽은 다른 관중들이 하나둘씩 말을 얹기 시작했다.
“그래. 패자를 굳이 정해야 한다면 그건 피터, 피터다!”
“피터! 피터 씨가 패자야!”
화려한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귀부인들도 실비아의 말에 동의했는지 점잖게 의견을 냈다.
“…맞아! 패자가 있다면 심판이야!”
“저 여자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어! 두 선수 다 이겼는걸!”
“둘 다 잘생겼….”
실비아의 말에 동감한 관중들이 떼거리로 일어나 항의를 하자 심판이 당황해 한참을 굳어 있더니 이내 머드 풀 위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내가… 내가 패자라니. 으아아!”
잠시 소란이 일어난 끝에 심판은 관계자들의 부축을 받아 나갔다. 실비아는 그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관중들의 항의로 첫 번째 토너먼트가 무승부가 되어 버리자 뒤에서 긴급회의를 한 관계자 중 한 명이 관중석 앞으로 걸어나왔다.
“이건 토너먼트인데 무승부가 됐네요. 이러면 경기를 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어차피 재미로 하는 대회라고 들었습니다만?”
실비아가 관중석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자 주변 관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계자는 말문이 막혀서 어버버 거리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죠. 그냥 재미로 하는 거죠…. 그래도 승부는 내야지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이미 일대일 승부는 물 건너간 거 같으니… 대결의 방식을 바꾸는 거죠.”
“어떻게 바꾸자는 겁니까?”
관계자의 물음에 실비아는 목이 타는 듯해 입술을 핥았다. 사실 조금 전에 미친 사람처럼 중간에 난입한 건 순간적인 충동도 있었지만 목적이 있어서였다.
“단체 씨름대회, 어떻습니까?”
실비아의 말에 관계자의 얼굴이 묘해졌다. 실비아는 나름 머리를 굴린 것이다. 기존의 토너먼트 방식으로는 <프리허그 이용권>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없었다. 씨름한다고 한 명씩 껴안아 봤자 몇 명이나 껴안을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니 그동안 반려 짐승 동반 카페에 감금해 놨던 두 짐승이 풀려날 위험이 있었다.
그녀는 제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말을 더 얹었다.
“두 명씩 싸우는 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좀 올드한 방식이잖아요? 무엇보다… 선수들이 한꺼번에 싸우는 게 이목도 집중되고 더욱 볼만할 것 같은데요.”
“단체 씨름대회라, 축제 씨름대회를 십 년 동안 주최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 겪네요. 그렇지만 다수의 분들이 원하는 것 같으니…. 잠시 윗분들과 상의하고 오겠습니다.”
이게 받아들여질까? 실비아의 입속이 초조함으로 바짝 말라왔다. 다행히 다른 곳으로 사라졌던 남자는 잠시 후 돌아와 실비아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 이게 되네. 화술을 많이 올려서 말발이 오른 건가? <헛소리를 진지하게>를 안 썼는데도 통할 줄이야.’
약간의 자유시간이 지나가고 실비아를 포함, 참가 신청을 한 선수들 모두 수영복 위에 샅바를 착용하며 긴장한 얼굴로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를 기다렸다.
피터 씨는 아직도 충격에 빠져 있는 건지 새로운 심판이 심판대에 올라갔다. 머리가 몇 가닥 남지 않은 심판은 손수건으로 두피를 톡톡 두드려 닦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휴,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이 대회는 재미로 하는 거니까 진심으로 하시진 마시구요. 바닥에 쓰러지시면 탈락입니다.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단체 씨름은 이어집니다. 그럼 시-작!”
삐익-!
“으아아!”
선수들이 단체로 환호성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떼거리 씨름대회가 시작됐다. 그런데 예상 못 한 일이 일어났다.
여자 참가자들이 간간이 섞여 있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호리호리한 실비아의 몸을 보고 공격하기가 꺼려졌는지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목이 마른 자가 우물을 찾는 법. 실비아는 먼저 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휴…. 그래. 어차피 <프리허그 이용권>에는 누가 먼저 안아야 된다는 조건 같은 건 없었으니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프리허그 이용권을 보며 한 달 동안 설렌 마음으로 기다렸건만 정신 차리고 보니 단체 씨름대회에서 공격적으로 남자들을 껴안게 됐다.
아련한 눈빛으로 잠시 회의감을 품었던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젓고 곧 흉흉한 얼굴로 남자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양손을 들어 공격 자세를 취한 후 아까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냉미남부터 덮쳤다.
“너부터!”
“크윽!”
공격을 가장한 와락 껴안기를 시전하자 차가운 인상의 냉미남이 몸을 떨었다.
버둥대는 냉미남을 거칠게 껴안은 채 시스템을 불러와 보니 1/10로 <프리허그 이용권>의 미남 껴안기 카운팅이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미남의 등에 얼굴을 비비며 혀로 입술을 핥곤 비열하게 미소 짓다가 아차- 하곤 그를 놓아주었다. 자신도 모르게 비열한 뒷골목의 양아치가 되어 역할극에 과몰입해 있었다.
그녀가 놓아주자 고통에 신음하던 냉미남이 무사히 도망쳤다.
‘휴…. 몇 명을 껴안을 수 있을까.’
실비아가 단체 씨름대회를 제안한 이유는 또 한 가지 있었는데 참가자가 많아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심판이 모두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할 테고, 씨름이 아니라 껴안기만 하러 들어 온 그녀를 눈치채지 못할 테니 말이다.
참가자는 많았지만 바닥에 몸이 닿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기 전에 모든 걸 끝내야 했다. 그녀는 스킬 <손은 눈보다 빠르다>를 써서 탈락자가 많이 발생하기 전에 한꺼번에 껴안기를 시전하기로 했다.
순간적으로 정말 추잡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나태지옥에 가면 안 된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스킬을 시전하자 그녀 빼고 모두가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실비아는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한꺼번에 미남들을 껴안고 다닐 수 있었다.
정신없이 껴안다 보니 10명이 넘었는지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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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추잡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 거야! 10명을 순식간에 허그하는 데 성공, 레벨이 1 업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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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리는 듯한 메시지에 실비아는 정색하고 시스템을 바라봤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 스킬 덕에 메시지를 보는 동시에 미남들을 껴안고 다니는 게 한꺼번에 가능했다.
‘열 받네…. 사람 놀리나? 그나저나 벌써 레벨이 올라갔네. 이 씨름대회의 참가자는 눈대중으로 보니 60명가량이다. 그중에 여성 참가자들과 비동정들을 빼면 30명 정도가 동정…. 레벨을 2정도 더 올릴 수 있겠군.’
다행히 씨름대회 참가자 중엔 실비아보다 레벨이 높은 사람이 없는지 스킬의 주의사항에 쓰여 있었던 <간파>를 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스X크래프트의 저글링처럼 시방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미남들을 하나하나 재빠르게 껴안았다. 개중에 감이 날카로운 남자가 자신을 피하면 실비아는 다시 재빠르게 도약해 힘껏 껴안았다.
“어딜!”
“으읏.”
머드풀 안은 씨름으로도 개판이 되고 그녀 때문에도 개판이 되어 갔다. 다른 사람들은 씨름을 했지만 실비아는 그 안에서 혼자만의 게임을 즐겼다.
“뭐야?”
“뭔가가 날 껴안았어!”
<손은 눈보다 빠르다> 스킬 덕택에 실비아의 강제 프리허그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그 대신에 미확인 생물이 자신을 껴안았다는 참가자들의 말에 씨름판은 더욱더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신없던 허그 끝에 그녀는 목표로 하던 마지막 동정 미남을 껴안았다. 현타가 올 것 같은 아찔한 강제 프리허그가 끝나고 그녀가 헉헉대며 무릎을 짚고 있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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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허그 이용권>의 사용시간이 끝났습니다. 레벨이 총 3 업!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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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가 나타나면서 노끈으로 등 뒤에 묶어 놨던 피켓은 효용을 다하고 스르륵- 사라졌다.
‘레벨이 3이나 오르다니, 확실히 효과가 좋군. 그런데 뭔가 정신에 치명적인 타격이 온 것 같아….’
얼굴이 핼쑥해진 실비아는 더 이상 씨름대회에서 주목 받고 싶지 않았기에 벌렁- 바닥에 누워 버렸고 심판의 안내에 따라 밖으로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참가상 받아가세요!”
“…예.”
실비아가 밖으로 나오자 관계자가 그녀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힘없이 그 상자를 받아드는데 순간 그녀의 등 뒤가 섬뜩해졌다. 심지어 따끔따끔하게도 느껴져서 뭔가 싶어서 돌아보니 귀신들이 서 있었다.
‘억… 아니지….’
실비아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귀신들이 아니라 림보와 세비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