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응? 그런데 이 수영복…. 왜 이렇게 구리지?’
자세히 보니 원피스 수영복인데 팔과 허리 부분에 프릴이 달려 있고 전체적으로 형이상학적 무늬가 알록달록하게 프린팅되어 있는 게, 마치 70년대 화보 집에나 나올 거 같은 디자인이었다.
‘개구려.’
세비스의 안목에 의심이 간 실비아는 흔들리는 눈으로 수영복과 세비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세비스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 다른 건 비키니밖에 없어서요. 이, 이게 어때서요? 그, 활동성도 좋아 보이는데?”
“하…. 비키니를 사 왔어야지….”
실비아는 실망한 얼굴로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구린 수영복보단 비키니가 좋다. 거기다가 화요일엔 루카를 보러 갈 텐데 예쁜 비키니를 입으면 더없이 좋을 테다. 그녀의 떨떠름한 반응에 세비스가 눈을 어색하게 굴리더니 아-! 하고 다시 대꾸를 했다.
“글쎄요. 수영복 가게 주인 말로는, 음…. 이게 최신 유행하는 거라던데요? 실비아 님이 입으면 정말 예쁠 것 같아요.”
세비스가 어색하게 엄지를 치켜들며 활짝 웃었다. 그의 말에 실비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수영복을 이리저리 살폈다. 아무리 봐도 구렸지만 이 세계의 유행이 이렇다는데 어쩔 것인가.
‘복고풍이 유행인가. 유행이라고 하니 별수 없지. 이미 사 왔기도 하고….’
“음…. 가게 주인이 틀린 말은 안 하겠지, 알겠어.”
실비아의 말에 세비스가 활짝 웃었다. 사실 세비스는 실비아의 몸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게 싫었기에 구린 원피스 수영복을 샀다.
왜인지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본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안 좋아졌다. 구린 수영복을 손에 들고 떨떠름한 얼굴을 하는 그녀를 보면서 세비스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실비아는 다른 쇼핑백들도 뒤적거려 보았다. 안에는 수영복 외에도 튜브와 놀랍게도 선글라스까지 있었다. 한국인이 만든 게임인지라 없는 게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선글라스까지 있을 줄이야. 수영복을 입고 그 위에 하얀 와이셔츠를 걸친 실비아는 선글라스를 손에 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선글라스까지 게임에 있다고? 용량과다 아닌가? 뭐, 있으면 좋지.’
실비아가 나갈 준비를 마치자 세비스도 하와이안 셔츠와 트렁크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밀짚모자를 쓴 채 나왔다. 그리고 림보에게는 끈이 달린 꽃 모자와 해녀복같이 생긴 워터슈트를 세비스가 직접 입혀 주었다. 실비아와 세비스는 쪼리를 신었고 림보는 그물망으로 된 워터 슈즈를 신었다.
완전한 바닷가 물놀이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돈을 꽤 썼겠네. 세비스가 웬일이지.’
“이번엔 돈 생각 안 하고 마음껏 샀구나?”
“자주 있는 축제가 아니니까요! 그래도 여러 개 사니까 워터 슈즈랑 쪼리는 반값에 할인해 주던걸요.”
아무래도 구슬을 팔고 3만 골드를 얻어 행복해진 세비스가 충동적으로 구매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말을 아꼈다.
‘가끔 이런 낭비도 해 줘야지.’
집 밖으로 나온 그들은 셋 다 선글라스를 끼곤 위풍당당하게 바닷가로 걸어갔다.
던전을 갔다 온 새에 마을은 완전히 여름 날씨가 된 건지 수영복 위에 얇은 외투만 걸쳤는데도 전혀 춥지 않고 시원했다. 어차피 급한 일도 없었기에 림보를 타지 않고 셋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천천히 산책을 즐겼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그들은 바닷가로 이어지는 오솔길부터 어마어마한 인파에 입을 떡 벌렸다.
“와, 입구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네.”
한적했던 평소랑은 달리 바닷가 입구는 며칠 전부터 해수욕장이 개장한 데다가 오늘은 축제가 시작하는 날인 탓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제국민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람들도 방문한 건지 생김새가 다양했다.
인파에 떠밀려 걷다 보니 그들은 공략했던 던전이랑은 다른 갈래 길에 있는 바닷가 입구에 도착했다.
아이스크림, 번데기 등 여러 가지 주전부리를 파는 노점과 풍선 맞추기 게임을 하는 간이 상점이 입구에 줄지어 들어서 있었다. 상인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호객행위를 하는 모습은 현실 세계의 해수욕장과 너무 똑같아서 실비아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이스크림 막대를 들고 장난을 치는 터키 아이스크림 상인부터 리듬을 넣어 ‘번데기 팝니다-’를 외치는 상인까지, 현실이랑 똑같았다.
‘와, 진짜 현실 세계의 바다 축제에 온 것 같네.’
세비스는 터키 아이스크림 장수와 장난을 치며 놀다가 아이스크림 세 개를 사 왔다. 그리고 하나를 실비아에게 내밀고 나머지 하나는 림보의 입에 집어넣었다.
“실비아 님, 아이스크림 드세요.”
“우와! 이거 진짜 맛있다.”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으며 바글바글한 인파를 헤쳐 나간 일행은 곧 입구를 지나 해수욕장 안으로 들어갔다. 눈부시게 하얗고 고운 모래와 제주도 바닷가를 연상하게 하는 맑은 물은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세비스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실비아에게 말을 걸었다.
“던전이 있던 바닷가 말고 이런 곳도 있었네요. 처음 알았어요.”
“…….”
앞장서 가던 실비아는 해수욕장의 사람들을 보고 툭- 하고 아이스크림을 떨구고 입을 멍하니 벌렸다. 세비스는 아무 생각 없이 뒤따라가다가 그녀가 갑자기 멈춘 탓에 몸을 부딪치자 당황해 뒤로 물러났다. 그가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힌 채 실비아를 살폈다.
“왜, 왜요? 갑자기 왜 멈추셨어요?”
“아….”
실비아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앞만 쳐다보았다. 왜 그랬냐고? 해수욕장은 파라다이스 그 자체였다. 환상적인 바디를 가진 온 동네 미남이 도떼기시장의 물건처럼 도처에 널려 있었다.
“하하! 내 서브를 받으라구!”
“읏차!”
눈부시게 하얀 피부를 뽐내며 공놀이를 하는 상큼한 미남. 구릿빛 피부를 자랑하며 태닝 오일을 바르고 썬 베드에 누워있는 울끈불끈 근육 미남들, 강렬한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냉미남 등등….
각양각색의 다양한 미남들이 해수욕장에 산재해 있었다.
“실비아 님! 왜 말이 없어요!”
“…….”
세비스가 말을 계속 걸었지만 그녀의 귀는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먹먹해져서 잘 들리지 않았다. 취사가 다 된 전기밥솥처럼 햇살에 달궈졌던 그녀의 온몸이 미남들 때문에 또 한 번 달아올랐다. 심지어 겨울도 아닌데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오기 시작했다. 체온이 지나치게 높아진 탓이었다.
‘이러려고, 이걸 보려고 그동안 고생한 거였나?’
실비아의 눈에서 맑은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세비스는 그녀가 갑작스레 눈물을 흘리자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실비아는 마치 그랜드캐니언을 처음 본 관광객처럼 눈앞의 장관을 보면서 즙만 짤 뿐이었다.
뒤늦게 눈가를 꾹꾹 누르며 진정한 실비아는 정지되어 있던 뇌를 다시 가동했다.
‘이 축제는 성년의 날 축제. 그렇다면 이 미남들이 다 가능하단 소리인가?’
번뜩 정신을 차린 그녀는 <동정 레이더>를 작동시켜 보았다. 그러자 <동정 레이더>가 정신없이 동정 판정을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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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이 너무 많아서 판독이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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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더가 과부하를 선언했다.
세상에, 그렇다는 건 여기 있는 미남 대부분 다 ‘가능’하단 소리. 그녀는 별안간 두 팔을 활짝 벌리곤 백사장으로 뛰어갔다.
“야호!”
‘여기가 무릉도원이구나!’
실비아가 멍하니 서서 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환호성을 지르며 백사장으로 달려가자 세비스와 림보가 영문을 모른 채 뒤쫓아갔다.
실비아는 혼자서 빙글빙글 돌면서 야호! 거리다가 백사장에 벌렁 눕고 다시 일어나서 환하게 웃으며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등 속을 모르는 이가 보기에는 매우 심각해 보이는 상태로 돌아다녔다.
세비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다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침 식사 중에 상한 게 있었나?”
그의 말에 림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세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실비아의 기행은 제풀에 지친 그녀가 모래사장에 벌렁 드러누우면서 끝이 났다. 림보랑 세비스는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곤 말을 아꼈다.
모래사장에 누우니 쏴아- 하고 파도가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즐거운 소리와 아이가 가지고 노는 삑삑- 거리는 장난감 소리, 어딘가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니 여긴 게임 속이 아니라 사실 다른 평행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나른하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평화롭구나.’
잠시 여유를 즐기던 그녀는 별안간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
‘맞다! 프리허그 이용권을 써야 하는데.’
그녀는 백사장에 누운 채로 인벤토리를 소환했다. 인벤토리 창에는 아직 쓰지 않은 일회용 아이템 <프리허그 이용권>이 있었다. 미남 반 물 반인 지금 써야 하지 않을까. 거기다가 대부분 다 동정이라니 아이템 사용조건에 딱 맞았다.
‘후후, 여기 미남들이랑 한 번씩 포옹하라니. 19금 게임의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녀가 한창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세비스가 부루퉁한 얼굴로 불만을 말했다.
“실비아 님! 가만히 누워 계시면 어떡해요. 저희랑 같이 놀아 줘요.”
“히이잉!”
“어? 어어….”
실비아는 힐끗 옆을 쳐다보곤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저 두 짐승은 그녀에게 성가신 존재일 뿐이었다. 미남들과 프리허그를 실컷 해야 하는데 옆에서 뭐하는 거냐고, 자신들과 놀아달라며 성가시게 굴다니.
‘얘네들을 잠시 까먹고 있었네. 이걸 어쩐다.’
벌떡 몸을 일으킨 실비아는 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가 일어나자 세비스와 림보도 놀아 주려나 싶어서 같이 일어났다. 이 짐승들의 정신을 쏙 빼놓을 뭐 좋은 게 없을까 고민하던 찰나 그녀의 눈에 딱 좋은 곳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