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그는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실비아에게 반지의 사용법을 설명해 주었다. ‘나와라, 레이저!’라고 말하면 레이저가 나오고, 반지 옆의 조그만 톱니를 돌리면 보석 색이 변하며 강도조절이 된다고 했다.
붉은색일 땐 아까 본대로 가장 강력한 레이저가 나오고, 노란색일 땐 고기를 썰거나 과일을 깎기 용이하며, 초록색은 부가기능 같은 것으로 치석 제거가 가능하다고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실 세계의 맥가이버칼 같은 존재였다.
당황했던 것도 잠시, 설명을 듣고 난 실비아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손을 모으고 노엘을 바라보았다. 소중한 할머니의 유품을 선뜻 내주다니, 정말 감동이었다.
“아…. 할머니의 유품이면 노엘 님에게 정말 소중한 물건 아닌가요? …고마워요. 소중히 간직할게요.”
“실비아 님이 좋아하시니 다행입니다. 하늘에 계신 할머니께서도 실비아 님이 써 주셔서 흡족해하실 거예요.”
실비아는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는 반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반지는 게임용 아이템이 아닌지 바라봐도 상세설명이 나오지 않았다. 게임 아이템이 아닌 걸 노엘이 주다니, 어쩐지 정말 소중한 걸 받은 느낌에 실비아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들은 여느 연인들처럼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산책을 시작했다. 주로 실비아가 수다를 떨면 노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식이었다.
후원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어느새 탈수기가 다 돌아갔을 시간이 되었다.
마구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노엘이 실비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실비아 님. 저는 실비아 님을 언제나 도울 수 있으니까, 필요하실 때마다 부담 없이 찾아오세요. 저택이랑 신전, 어디든 찾아오셔도 늘 기꺼운 마음으로 돕겠습니다.”
“노엘 님,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앞으로도 자주 볼 건데요, 뭘.”
실비아는 진심이었다. 아무래도 공략 캐릭터가 네 명이나 남았으니 이전만큼 그를 자주 보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잘생긴 노엘과는 계속 만나서 얼굴도 보고 대화도 나누고… 섹스도 하고 싶었다.
그녀의 말에 노엘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신전 알바를 할 때처럼 자주는 못 볼 것 같단 예감이 듭니다. 제 욕심으론 실비아 님을 언제까지고 곁에 붙잡아 두고 싶지만… 할 일이 많으시잖아요. 그건 너무 이기적인 거니까요.”
“아….”
말을 하는 노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의 얼굴에 비친 감정을 읽은 실비아의 가슴이 쓰라려 왔다. 그렇지만 노엘의 말이 아예 틀린 것도 아니라서 적절하게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신관의 씨앗 조각>을 모아야 한다는 조건이 남아 있긴 하지만 주 4일 알바를 할 때만큼은 자주 못 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야 여전히 자주 보고 싶지만, 나머지 캐릭터를 공략하는 동안, 아무래도 노엘 님과는 전처럼 자주 보진 못하겠지.’
깊은 한숨을 내쉰 노엘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실비아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일부러 표정을 밝게 하려 노력했다.
억지로 밝게 웃는 티가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 실비아의 기분이 이상해졌다.
노엘은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쥔 뒤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며 조용하게 속삭였다.
“자주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때가 오길 기다릴게요. 모든 게 끝나면… 그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노엘 님, 고마워요.”
실비아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노엘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그가 안겨 오는 작은 몸을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그녀와 맞닿은 단단한 몸이 가늘게 떨렸다. 포근하고 든든한 노엘의 품에 안겨 있던 그녀는 노엘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그녀의 상황을 생각해서 훗날로 미뤄 놨단 걸 깨달았다.
‘노엘 님이 날 배려해 주신 거구나….’
노엘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조그만 등을 어루만졌다. 던전에 있을 때만 해도 실비아와 돈독한 사이로 보이는 세비스에게 질투심이 나 같이 살자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러나 별장으로 돌아와 차분히 생각해 보니 그건 실바아에게 너무 부담이 되는 제안일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참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벅찬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에 노엘은 할머니의 유품을 실비아에게 선물했다. 사실 그녀에게 준 반지는 노엘의 할머니가 반려자가 될 사람에게 주라고 신신당부한 유품이었기 때문이다. 실비아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말하지 않았지만 속사정은 그랬다.
‘언젠가는 실비아 님에게 반지의 사연을 말할 날이 오겠지.’
한참을 껴안고 있던 둘은 주위가 어둑해지자 마구간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꽤 지나 어느새 노을이 발갛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노엘이 실비아의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배 안 고프세요? 이제 저녁 먹으러 들어가야죠.”
“그러게요. 배가 너무 고프네요.”
실비아는 저녁 식사를 기대하며 배를 문질렀다. 그 모습을 노엘이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마구간에 어질러 놓은 잡동사니를 정리하고 그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향하는데, 어쩐지 느낌이 싸했다.
‘뭔가 까먹은 것 같은데…’
“맞다, 림보!”
실비아는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깜짝 놀라 마구간으로 뛰어갔다. 황급히 탈수기 문을 여니 림보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네 다리를 꽈배기처럼 꼰 채 구석에 주저앉아 있었다. 잔뜩 골이 난 표정을 보니 마치 ‘허, 참. 이제 왔어? 미친 거 아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림보! 미안해.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히잉!”
실비아가 앞발을 잡으며 사과하자 림보가 팩-! 하고 제 다리를 치워 버렸다. 삐진 티가 역력했다. 한참을 사과한 끝에 실비아는 겨우 어부바를 해서 림보를 탈수기에서 빼 올 수 있었다. 마구간에서 림보를 등에 업은 실비아가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노엘이 당황하며 ‘말은 제가 업을게요.’라고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림보, 요새 많이 먹었구나….”
“힝!”
삐진 림보를 저택 안까지 업고 오자 실비아의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한참을 어부바 해 줬더니 림보는 화가 풀렸는지 다시 이빨을 보이며 싱긋 웃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모두와 즐겁게 식사하는 시간. 실비아가 노엘이 선물해 준 만능 레이저 반지로 스테이크를 썰다가 접시를 두 동강 내는 해프닝이 잠시 있었다. 두 동강 난 접시를 들고 울상을 짓던 세비스는 사용인이 배상하실 필요가 없다고 하자 다시 편히 웃었다.
즐겁게 식사를 한 뒤 테라스에서 별을 구경하고, 귀신 얘기를 하며…. 그렇게 노엘의 별장에서의 밤이 깊어갔다.
간만의 달콤한 휴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3일 동안 푹 쉬며 재충전을 한 실비아와 일행들은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성년의 날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슬슬 오두막이 있는 바닷가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다.
짐을 싸서 나온 그들은 저택 입구에서 별장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았다.
모두가 말에 올라타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어딜 갔었는지 안 보이던 중년의 집사가 급하게 달려 나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노엘의 손을 감싸 쥐었다.
“노엘 님! 다음에 오실 땐 좋은 소식 가져오세요.”
그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면서 노엘과 실비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표정을 보니 둘이 어떤 사이인지 알아챈 것 같았다. 집사의 시선을 받으며 실비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꼬리만 올렸다.
‘밤에 떡친 걸 들킨 건 아니겠지.’
노엘은 집사의 말에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다음에 또 놀러와요!”
그들은 집사와 사용인들의 성대한 배웅을 받으며 별장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마을에 들른 실비아는 주민들에게 신전을 잘 관리해달라는 부탁을 한 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마을을 떠났다. 마을 어귀로 나오자 그녀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제1장 : 잊혀진 신전 공략을 완료하셨습니다.]
———————————————
‘게임에서 큰 파트 하나가 끝난 기분이네.’
실비아는 어쩐지 벅차오르는 기분에 잠시 림보를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복잡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마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세비스가 왜 그러시냐고 물어왔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한 뒤 다시 림보에게 자율주행을 시켰다.
마을에서 나온 뒤로는 일사천리. 그들은 터보 주행으로 순식간에 바닷가 마을로 돌아왔다.
“도착했네요.”
“으…. 멀미 날 것 같아.”
“실비아 님, 저도 속이 안 좋아요.”
노엘은 터보 주행이 익숙한지 차분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실비아와 세비스는 저택에서의 산해진미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급하게 먹었더니 둘 다 멀미를 했다.
“그럼, 축제 마지막 날 봐요.”
노엘은 축제 마지막 날 신전이 주최하는 행사가 있으니 꼭 보러 오라고 말하고 갈래 길로 말을 몰았다.
림보를 자율주행 시켜 집으로 향한 실비아와 세비스는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이 보이기 시작하자 어깨를 추욱 늘어트렸다.
후줄근한 오두막집은 보기만 해도 그들의 사기를 떨어트렸다.
실비아가 세상 다 산 얼굴로 힘없이 대문… 아니, 방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대문이고 뭐고 문을 열자마자 방이니 방문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듯했다.
‘행복 끝, 거지 인생 시작이구나. 노엘 님 저택에서 지낸 게 꿈만 같아.’
안으로 들어가길 원치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 내며 실비아가 말했다.
“휴, 세비스, 빨리 들어가자.”
“아…. 빨래를 안 하고 떠났던 것 같아요…. 청소부터 해야겠네요.”
힘없이 림보 위에서 내려오던 세비스는 오두막 입구의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위에서 핼쑥해진 전서구가 졸고 있는 걸 발견했다.
전서구는 위태롭게 나뭇가지에서 졸다가 뒤늦게 세비스를 발견하곤 비틀하고 날아오더니 곧 찢어지도록 울어댔다.
참새처럼 생겼지만 비둘기 소릴 내는 전서구는 세비스가 느릿느릿 걸어오자 초조했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푸드득- 날아서 문으로 들어가던 실비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곤 편지가 묶인 다리를 내밀었다.
“구루룩! 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