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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의 첫날밤을 수집합니다-77화 (77/372)

77화

“실비아 님, 왜 그러세요? 과일이 상한 건가….”

세비스는 접시에 든 과일을 한입 베어 물곤 ‘멀쩡한데?’하고 혼잣말을 했다. 실비아는 배덕하고 짜릿한 상상에 함박웃음을 지을 뻔한 걸 참고, 간신히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크게 웃으면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일 것이 아닌가.

“아냐, 세비스. 나 멀쩡해. 그건 그렇고 키가 더 컸구나?”

“아…. 키가 컸나요?”

“응, 더 컸어. 이러다 금방 성체가 되겠는걸?”

정수리를 만지며 머쓱해 하던 세비스가 이내 풀이 죽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저희 일족은 웬만한 충격을 받지 않는 이상 성체가 될 수 없는걸요. 평화롭게 살아온 지가 워낙 오래돼서 이제는 각성 의식을 가져야만 성체가 될 수 있어요.”

“…그래도 자란 건 맞잖아. 조만간이지 않을까?”

그의 말에 욕망에 눈이 먼 실비아는 초조해진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탁자를 정신없이 두드렸다. 탁자를 두드리는 손가락을 바라보는 세비스의 얼굴이 어두웠다.

“하지만 각성 의식 없이 성체가 되는 경우는 보지 못했는걸요.”

“에이, 아냐. 앞으로 더 분발해. 무슨 충격을 받았길래 자란 건진 모르겠지만 앞으로 꾸준히 충격을 받도록 노력해. 그래야 하루빨리 성체가 될 거 아냐, 알았지?”

그녀의 말에 세비스의 낯빛이 굳어졌다.

이 어찌나 잔인한 말인지. 세비스는 어느 정도 실비아에 대한 제 마음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갑자기 성장한 이유가 그녀 때문임을 알았다. 그녀와 노엘이 오아시스에서 붙어 있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은 탓이다. 그러나 실비아는 그 사실을 몰랐기에 계속 충격을 받으라는 눈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오아시스에서 둘을 본 날 이후로 몸이 아프더니, 성장하려고 그런 거였나.’

실비아의 눈치 없는 잔인한 말에 그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한숨을 쉬던 세비스는 곧 기대에 찬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실비아 님은 왜 내가 성체가 되길 바라시는 거지? 내가 성체가 아니라서 던전 공략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나도 충분히 내 몫을 한 거 같은데. 물론 겉보기엔 노엘 님보다 체격이 작으니 약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 약한 건 사실이지.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너무해!’

세비스는 늑대 수인이지만 성체가 아니기에 매일같이 몸을 단련하는 전투 신관 노엘에 비하면 확실히 전력이 딸렸다. 그건 누가 봐도 객관적인 사실이기에 그는 울적해져 버렸다.

눈썹을 축 늘어트린 세비스는 어쩐지 번들거리는 것 같은 실비아의 눈깔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오싹해지는 게 몸살이 오려나 싶어 몸을 부르르 떨며 제 팔을 감싸 쥔 그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곤 조그맣게 속삭이듯이 말을 뱉어 냈다.

“…성체가 안 돼도 실비아 님을 옆에서 도울 수 있어요.”

“응?”

그가 속삭이듯이 말하자 못 알아들은 실비아는 멍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제가 못 미더우신가 봐요. 성체가 아니라 노엘 님보다 약하지만, 그래도 제 몫은 한다구요…. 휴.”

세비스가 한숨을 내쉬며 분명하게 말하자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던 망상 머신이 바로 가동을 중지했다.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잠시 멍해져 있던 실비아는 세비스가 단단히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세상에, 설마 성체가 되길 바란 내 말의 속뜻을 오해한 건가? 아니,제대로 파악해도 큰일 나긴 하는데, 설마 저렇게 받아들일 줄이야.’

실비아는 일시 정지한 채 속으로 땀을 뻘뻘 흘리다가 고개를 저으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오해는 바로 푸는 게 좋은 법.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야, 세비스. 난 네가 성체가 되고 싶어 하는 줄 알고 그렇게 말한 거야. 네가 어떤 모습이든 난 정말로 아무 상관없어. 그러니 성체가 되는 건 한동안 신경 쓰지 말자.”

“…정말요?”

세비스가 여전히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한참 동안 온갖 말을 하며 그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없는 말 있는 말 다 지어내 땀까지 뻘뻘 흘리며 위로하다 보니 더러운 그녀의 욕구는 어느새 지평선 저 너머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어어, 그런 거니까 말이야…. 휴, 이제 좀 맘이 풀렸니?”

“헤헤, 그런 거였군요.”

실비아가 약장수처럼 한참을 떠들고 나서야 그가 방긋 웃으며 기분을 풀었다. 겨우겨우 세비스의 오해를 풀고 난 뒤 실비아는 말을 많이 해서 바짝 말라 버린 입안에 다 식은 재스민차를 들이부었다.

‘하얗게 불태웠다…. 뭔 말을 함부로 못 하겠네….’

세비스를 겨우 다독인 후 실비아는 거의 한 달 만의 휴식을 제대로 즐겼다. 꿈쩍도 안 하고 누워 있기도 하고 세비스, 노엘과 뒷산으로 가 돗자리를 펴고 피크닉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지금은 림보의 몸을 마구간에서 즐겁게 씻겨 주는 중이었다.

‘이게 사람 사는 거지…. 알고 보면 여기가 나태지옥이 아닌가 싶었는데…. 이제야 살 것 같다.’

“랄라라.”

“히이잉.”

실비아는 림보의 몸을 솔로 박박 문지르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구석구석 정성스럽게 씻겨 주자 신이 난 림보도 함께 말발굽으로 땅을 쳐가며 즐거워했다.

“자, 들어가!”

그녀는 마구간에 있는 탈수기에 림보를 집어넣고 간이의자에 앉았다. 후원을 바라보며 한숨을 돌리고 있으려니 노엘이 찾아왔다. 고급스러운 하얀색 실크 블라우스에 각 잡힌 슬랙스를 입은 노엘의 모습은 오늘도 역시 너무 아름답고 귀티가 났다. 딱 봐도 ‘나 부잣집 도련님이요.’라고 얼굴에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실비아 님! 여기 계셨군요. 한참 찾았어요.”

“아, 노엘 님. 심심해서 림보 세마를 직접 하고 있었어요.”

‘오늘도 역시 잘생겼어. 당장 저 블라우스를 찢어발기고 한판 하고 싶은걸.’

실비아는 속으로 군침을 흘리며 상큼하게 웃는 노엘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노엘은 어쩐지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한 번, 탈탈탈 돌아가고 있는 탈수기를 한 번 번갈아 쳐다보더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실비아 님, 시간 있으시면 저랑 산책이나 할까요?”

“그래요, 음, 탈수기 다 돌아가려면 30분 정도 남았네요.”

탈탈탈 돌아가는 탈수기를 뒤로 하고 실비아는 노엘을 따라나섰다.

별장이 있는 마을은 실비아의 오두막이 있는 동네랑은 달리 선선한 가을 날씨였기에 산책하기 딱 좋았다. 후원에는 현실 세계에서 본 적 없는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섬세하게 세공된 조각상들이 사이사이에 배치되어 있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했다.

‘조각상 비싸겠다…. 우리 오두막집 팔아도 못 사겠지.’

실비아가 가만히 서서 아련한 눈빛으로 조각상을 쳐다보고 있자 곁에 서 있던 노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실비아 님.”

“네?”

“저…, 말을 꺼내기가 참 조심스러운데요…. 지금 아니면 못 할 거 같아서….”

노엘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질끈 감더니 심호흡을 했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살짝 발그레했다. 그의 평소와 다른 모습에 의아해하던 실비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러시는 거지. 마치 고백하는 사람처럼…. 고백? 설마 고백을 하려고?’

그러고 보니 호감도가 풀로 찬 지 오래고 섹스도 몇 번을 한 건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관계를 명확히 할 단계가 오긴 했다. 그렇지만 아직 갈 길이 구만리인 실비아 입장에선 조금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바로 선 섹스 후 고백? 큰일 났네. 공략 캐릭터가 아직 네 명이나 더 있다고, 고백하면 뭐라고 답해야 하지.’

그녀가 티 안 나게 땀을 흘리고 있는 와중에 노엘이 수줍게 미소 짓더니 바지 주머니 안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그리곤 뚜껑을 열고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실비아는 어색하게 웃곤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실비아 님에게 이걸 드리고 싶습니다.”

“아…. 이건?”

‘반지잖아…. 거기다가 붉은색 보석이 크게 박혀 있어. 설마 고백도 아니고 바로 청혼? 어떡해!’

실비아가 속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와중에 노엘이 망설이더니 반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머뭇거리고 있자 노엘이 가만히 미소 짓고는 입을 열었다.

“부담스러우신가요?”

“아…. 그런 건 아닌데….”

그녀의 말에 노엘이 긴장을 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한 손에 반지를 든 채로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꼭 끼워 주세요.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입니다. 실비아 님에게 드리고 싶었어요.”

“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앗!”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노엘이 그녀의 검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헛도는 것 같던 반지는 잠시 꿈틀대더니 손가락 사이즈에 딱 맞게 줄어들었다. 당황할 틈도 없이 실비아의 손을 감싸쥔 노엘이 그녀의 손을 옆으로 돌리더니 외쳤다.

“나와라, 레이저!”

그러자 지이잉-! 소리와 함께 눈앞의 조각상이 반지에서 뿜어져 나온 레이저로 인해 인정사정없이 반토막이 나 버렸다.

‘이게 뭐야!’

정확히 배가 반으로 갈라진 조각상의 상반신은 곧 쿠웅-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실비아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이게 무슨 상황인가 파악하려 애썼다. 옆을 힐끗 보니 노엘은 더없이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이게 뭔가요? 할머니 유품이라면서요….”

“네, 만능 레이저 반지입니다. 제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항상 끼고 다니시던 반지죠. 이걸로 과일도 깎아 드시고 치아 건강도 유지하셨어요.”

치아 건강이라니, 실비아는 믿을 수 없단 얼굴로 반지를 바라보았다.

“예? 치아 건강요?”

“네, 레이저 강도를 조절할 수 있거든요. 가장 약한 강도로 틀면 치석 제거도 가능…. 하하, 그래서 만능 레이저 반지입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꼭 필요한 분에게 주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실비아 님에게 드리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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