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실비아가 상자 안을 자세히 보기 위해 한쪽 눈을 찌푸려 상자 틈새에 가져다 대자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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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사과 상자>를 획득했다. 1만 골드를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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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이다! 1만 골드나 주다니! 마을 주민들을 구한 보람이 있구나. 근데 왜 몰래 준 거지?’
실비아는 혹시나 해서 아이템의 상세설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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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사과 상자
- 촌장이 은밀하게 준비한 실비아만을 위한 사과 상자.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가계부 담당 세비스의 눈을 피해 몰래 1만 골드를 사용 가능하다. 양심이 찔린다면 세비스에게 알리고 가계에 보탬이 되도록 소지금에 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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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세비스에게 알린다니, 안 될 말이지. 1만 골드라니…. 슬슬 비밀상점을 다시 가 볼 때가 됐는데, 이 돈으로 살 만한 아이템이 업데이트가 됐으려나.’
어쩐지 던전 공략을 완료한 것 치곤 보상이 적다 했더니 마을 촌장에게 직접 보상을 받는 거였다. 상자를 들여다보던 실비아가 고개를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올리곤 눈을 반짝이며 촌장을 바라보았다. 다른 이와 대화를 하다가 시선을 눈치챈 그가 윙크를 하며 엄지를 들었다.
“실비아 님, 최고입니다!”
“감사합니다. 촌장님도 최고예요!”
그녀도 윙크를 하며 엄지를 들어 촌장에게 화답했다. 둘이서 영문 모를 사인을 주고받는 걸 세비스가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그녀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며 사과 상자를 옆구리에 꼈다.
어느새 시끌벅적한 인사도 끝나고 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인사를 하며 떠나갔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 놀러 오실 땐 미리 말해 주세요. 저희가 제대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춤 잘 봤어요. 진짜 잘 춰요. 멋져요!”
마을 주민들이 칭찬 세례를 하며 돌아가고 일행들은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저택으로 올라왔다. 노엘은 잠시 집사에게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먹다 만 브런치를 마저 즐기고 있으려니 마을의 특산품이라는 과일을 사용인이 깎아서 접시에 가져왔다.
포크로 집어서 한입 베어 문 실비아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커졌다. 그건 세비스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 붉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입을 멍하니 벌렸다.
꽃목걸이를 건 채 카펫에 앉아 있던 림보도 에비X 생수와 과일을 배급받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입 입에 넣고는 두 눈을 크게 뜨더니, 곧 감격한 듯 말발굽을 신나게 바닥에다 두드려댔다.
과일의 맛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진짜 맛있다. 마치 망고 같기도 하고 체리 같기도 한 것이…. 온갖 열대 과일 맛이 나는데?’
현생에서 먹어 본 어떤 과일보다 상큼하고 달고 맛있었다. 목으로 술술 넘어가는 과일을 입에 정신없이 집어넣고 있자니 세비스가 입에 든 과일을 우물대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실비아 님. 다음 주면 축제잖아요. 축제를 대비해서 옷을 사러 가야겠어요.”
“옷? 아아, 축제니까 예쁜 옷을 입는 게 좋겠지?”
“그런 것도 있지만 제가 알기론 그날 특별한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해서요. 이번 던전 공략 때 얻은 구슬들을 팔면 돈이 좀 나올 테니 옷을 살 수 있을 거예요. 어디 보자, 이번 달 생활비를 제하고 물세, 장작세, 식비, 림보 사치비 등을 제하면….”
돈 나갈 구석을 살피던 세비스의 낯빛이 그러데이션으로 어두워졌다. 그가 어두운 얼굴로 셈을 헤아리고 있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실비아는 속으로 뜨끔했다. 촌장이 준 <은밀한 사과 상자>에서 획득한 비상금 1만 골드가 생각나서였다.
‘세비스가 돈 걱정을 하는 걸 보니 양심이 찔리네. 그렇지만… 게임 공략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비밀상점을 가봐야 하는걸. 휴, 게임 시스템을 설명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럼 세비스한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그렇지만 현실 사람들이랑 다를 것 없는 세비스의 모습을 보면 어쩐지 여기가 게임인 걸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세비스는 이젠 품 안에서 낡은 가계부를 꺼내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돈 걱정을 하느라 진지해진 세비스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실비아의 마음이 더 안 좋아졌다.
눈이 잘못된 건지 몰라도 세비스의 눈썹에 버짐이 핀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실비아는 이대로 비상금을 혼자 쓱싹하는 건 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아이템을 사고 남은 돈은 옷 사는 데 보태야겠어.’
그녀는 몸을 일으켜 한창 계산에 열중하고 있는 세비스의 뒤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곤 얼렀다. 그녀의 손이 닿자 세비스가 순간 움찔했다.
“세비스, 너무 걱정하지 마. 던전에서 얻은 걸 팔면 돈이 꽤 나올 거야. 그리고 아니라도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해 볼게.”
“…어떻게요?”
잠시 굳어 있던 세비스가 눈을 데로록 굴리더니 그녀를 돌아봤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게 무척 귀여운 한편 들고 있는 가계부와 대비되어 안쓰러워 보였다.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린 실비아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약하게 쓰다듬었다.
“내가 물건을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단 건 알고 있지? 그 안에 있는 아이템 중에 쓸모없는 걸 꺼내서 구제시장에서 팔면 되지.”
‘일단 비상금 얘기는 하지 말고, 우선은 아이템을 판다고 둘러대야겠다.’
실비아가 계속 부드럽게 쓰다듬자 세비스가 숨을 급하게 들이켜더니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런 방법이 있네요. 생각도 못 하고 있었어요.”
계속되는 실비아의 손짓에 세비스가 끼익- 소리가 나도록 의자를 뒤로 물리며 당황했으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그를 계속 만졌다. 위로하려는 의도에서 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세비스의 표정은 점점 안 좋아졌다.
“그래, 그러니까 돈 걱정은 그만하고 오랜만에 푹 쉬다가 집으로 돌아가자. 나도 그동안 쉬는 날 없이 열심히 일해서 몸이 많이 피곤하니까, 응?”
“네….”
세비스는 급하게 그녀에게서 눈을 돌리곤 가계부를 말없이 꼼지락거리며 만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가슴이 빠르게 뛰는 바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러나 실비아는 제 설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비스가 돈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부드러운 손길로 꼼지락대는 세비스의 손등을 감쌌다.
그리고는 남은 한 손으로 세비스가 땀에 젖은 손으로 만지작대는 바람에 잉크가 번지고 있는 가계부를 뺏어 저 멀리 소파에 던져 버렸다. 세비스는 손이 잡히자마자 헉- 하고 숨을 들이켜곤 안절부절못하며 가계부를 던지는 실비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비아의 눈에 그 모습은 콩나물 하나 사는 것도 머리 싸매며 고민하는 가난에 찌든 불쌍한 가정주부의 그것과 흡사해 보였다. 불안한 표정으로 잡힌 손을 멍하니 바라보는 세비스를 보던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뒤돌아 뒷짐을 지곤 킁킁거렸다.
‘내가 참 못난 가장이야. 세비스에게 용돈을 줘도 모자랄 판에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며 가계부에 집착하게 만들다니.’
뒷짐을 지고 코를 훌쩍이고 있자 세비스가 조용히 일어나더니 소파에 던져진 가계부를 주워서 탈탈 털곤 품 안에 고이 넣었다. 그리곤 실비아에게 다가와 핼쑥한 얼굴로 웃었다.
“실비아 님 말대로 오늘은 푹 쉬어야겠어요. 돈 걱정이 되긴 하지만, 뭐 어떻게든 안 되겠어요?”
“어어, 그래. 오늘은 재밌게 놀자!”
실비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비비곤 세비스의 얼굴을 은근히 관찰했다. 도톰하고 사랑스러운 입술이 터 있는 게 안쓰러웠다. 아까 손을 잡았을 때 보니 처음엔 섬섬옥수 같았던 손에 어느새 거스러미도 올라와 있었다.
귀공자같이 생긴 세비스이건만 어느새 노가다 일꾼처럼 몸에 고생의 흔적이 배어 버린 것이다.
‘에효, 분명히 처음에 봤을 때는 세비스의 때깔이 좋았는데… 가난에 시달리며 던전에서 생고생을 했더니 폭삭 늙은 것 같네…. 뭔가 처음보다 나이가 든 것 같은 게 안쓰럽다…. 응? 가만, 나이가 들었다고?’
실비아는 혀를 차며 눈을 꾹 감고 있다가 본인이 한 생각에 본인이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갑작스럽게 인식하게 된 사실에 깜짝 놀란 그녀는 제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세비스와 자신의 키를 눈대중으로 비교해 보았다. 저번에 쟀을 땐 그녀보다 약간 컸던 세비스의 키는 어느새 눈으로 봐도 확연히 알 정도로 커져 있었다!
“실비아 님?”
“잠깐, 세비스. 가만히 있어 봐.”
실비아는 정확한 측정을 위해 거울을 보며 그와 등을 맞댔다. 세비스의 키가 그녀보다 손톱 두 마디 정도 더 커져 있었다. 저번에 쟀을 땐 손톱 하나 정도의 차이밖에 안 났었으니 성장한 게 맞았다.
‘세상에! 또 자랐네? 엄청나게 자란 건 아니지만…. 조금씩 자라고 있었구나. 조만간 성체가 될 수도 있는 걸까?’
한동안 노엘에게 정신이 팔려 있느라 세비스에게 전혀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그새 성장을 했다니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입꼬릴 올리며 웃으려던 실비아는 이내 머리를 강타한 배덕감에 혼자 비틀거렸다.
다채롭게 변하는 실비아의 얼굴을 옆에서 과일을 먹고 있던 림보가 이상하게 쳐다봤다.
‘가만? 생각해 보니 좀 그래…. 세비스가 성체가 되면…? 한집에 살아서 가족 같은 세비스와 내가 섹스… 섹… 스한다고? 생각만 해도…끔찍….’
그녀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비틀거리다 가까스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곤 손깍지를 끼고 눈을 번쩍 떴다.
‘…끔찍하게 짜릿하다!’
실비아가 변태처럼 비릿하게 미소를 짓자 옆에서 그녀를 힐끗대던 세비스가 이상한 걸 본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